고교를 중퇴하고 동대문 평화시장 청계피복의 재단사 시다(보조원), 구로공단 재단사 등으로 활동하며, 현장 노동운동을 한 노동운동가가 경험을 중심으로 자서전을 편찬해 눈길을 끈다.
김문수 전경기도지사, 심상정 정의당 대표, 전태일 열사 모친인 이소선 여사 등과 과거 노동운동의 절친한 동지적 관계였던 김준용(전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이 최근 펴낸 <모천회귀母川回歸 -재단사에서 통합전도사로>(한스컨텐츠 2015년 11월)는 지나온 과거의 삶과 노동운동에 있어서의 저자의 철학이 담긴 책이다.
저자는 1957년 전남 고창에서 태어나 전남 장성에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니다, 광주로 이사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다. 가정 생계의 어려움으로 인해 고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 중퇴하고 야반도주해 어린 나이에 서울동대문 평화시장 봉제공장 시다로 노동자의 길을 선택한다. 그는 당시 담벼락과 길거리 전봇대에 붙어 있는 '00구함 수미꼬미 가능' 전단을 보고 취업을 한다.
"수미꼬미는 일본말로 '고용주의 집이나 직장에서 삶'이란 뜻이다. 우리말로 하면 더부살이와 같다. 요즘 광고 문구로 바꾸자면 '침식제공'이 적합할 듯하다. 먹고 자는 것이 가능한 직장을 의미한 것이다." - 본문 중에서당시 날이 갈수록 공장에는 일감이 넘쳤고 그 만큼 작업량이 늘어났지만 노동에 대한 합당한 대가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달 동안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서도 손에 쥔 월급봉투엔 1만 원이 조금 넘게 들어 있었다. 밥값 6000원을 제외하면 쓸 돈이 없었다고. 당시 쌀 40kg이 1만 원이었으니 '머슴살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청계피복 노동조합 가입과 함께 노동운동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전태일은 알고 있지만, 그가 분신한 평화시장에서 노동운동에 앞장섰던 청계피복노조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청계피복노조는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이 있고난 2주 후에 그의 친구들과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주축이 돼 만들어졌다. 합법화된 88년 전까지 두 차례 해산과 간부 구속, 수많은 노동자의 시위와 연행 등의 과정을 겪었다. 내가 청계피복노조에 가입한 것은 1976년 늦가을 무렵이었다." - 본문 중에서한 마디로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고 6년 후에 청계피복노조에 가입한 것이다. 이곳에서 전태일 열사 모친인 이소선 여사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의 노동운동의 전환점은 최고의 멘토를 만나면서 부터이다. 경동교회 야학과정을 수강할 때 서울대경영학과를 나온 학생운동출신(학출) 노동운동가 최한배씨를 만나면서부터다. 작고한 최한배씨가 '어머니'정도의 멘토였다면 김문수 전경기도지사는 '아버지'정도의 멘토였다는 것이다.
79년 군대에 입대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고, 광주민주화운동, 서울의 봄 등 대형 시국사건이 잇따르고 있었다. 33개월의 군 복무를 마치고, 멘토 최한배의 부름으로 그가 다니던 구로공단 최대 봉제회사인 대우어패럴에 취업했다. 이후 초대 노조위원장으로서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결성에 성공한다.
"대우그룹차원에서나 회사 내 감시가 심할 때였다. 당시 전국규모의 노동조합만이 인정하는 산별노조 체제였기에 기업별노조를 구성할 수 없었다. 노조를 결성하려면 상급단체인 섬유노동조합연맹과 한국노총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해당 관청에서 신고필증을 받아야 적법한 노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섬유연맹 집행부 이원보 선생을 찾았다. 이 선생은 박종근 섬유연맹위원장을 만나라고 조언했다. 당시 박종근 위원장은 한국노총위원장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섬유연맹의 지원을 얻어냈다. 1984년 6월 9일 합정동에 있는 섬유연맹회관에서 대우어패럴노조 결성식을 가졌다." - 본문 중에서당시 대우어패럴 노조 결성식을 앞둔 시점에서 사내 간부들의 방해 책동이 말도 못했고, 결성 이후에도 회사 측은 운동선수 출신 구사대를 고용해 방해와 탄압이 도를 지나쳤다고. 종교단체, 시민단체 등 여론에 호소해 결국 김우중 대우그룹회장과의 만남으로 사태가 진전되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 심상정(국회의원) 현 정의당 대표와의 만남도 대우어패럴에서 이루어졌다.
"대우어패럴에도 최한배 형을 비롯해 몇몇 학출(학생운동출신 노동운동가)들이 일하며 현장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이가 바로 심상정 의원이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1공장에서 미싱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나이를 왕창 줄인 김혜란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김문수 전경기도지사와의 만남은 1983년 노동조합 결성을 한창 준비할 때였다.
"김문수 전경기도지사는 서울대 재학시절 전태일의 분신사건에 자극을 받아 일찍이 공활 경험을 한 소위 위장취업 1세대다. 최한배 형의 1년 서울대 선배인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두 번의 재적을 당한한 후, 노동현장에 투신한다.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 금속노조 남서울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전두환 정권의 등장과 함께 노동계 정화대상자로 지목돼 해고되었고, 두 번의 수감생활을 했던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산증인이자 거목이다." -본문 중에서- 대우어패럴노조위원장 당시 노동쟁의조정법,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언론기본법 등을 이유로 저자가 군부독재정권의 탄압에 구속되면서 촉발된 것이 구로동맹파업이다.
"구로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최초의 동맹 파업이자 노학연대투쟁으로서, 향후 우리나라의 노둥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구로동맹파업 이후 노동자와 학생 등 민주화 세력은 지속적인 연대투쟁을 벌였고 마침내 1987년 민주화 대투쟁으로 결실을 맺었다." -본문 중에서- 87년 8월 22일 옥포 대우조선노동자 이석규 열사가 가두시위 과정에서 최류탄에 맞아 사망했다. 8월 28일 대우조선 종합운동장 장례식에는 저자를 비롯해 이소선 여사, 민종덕 청계피복노조위원장, 권인숙씨, 노무현 변호사 등이 참석했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이석규 열사의 사인규명 작업에 앞장섰다. 며칠 후 노 변호사가 노동쟁의조정법 3자 개입위반과 장례식 방해 등의 이유로 구속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노무현 변호사가 장례기간 중 대우조선 노동자들에게 몇가지 조언을 한 것과 장지 문제를 두고 노조와 유족 간에 이견이 생기자 유족에게 '개인의 죽음으로 묻어버리지 말고 잘 생각해서 결정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나는 이때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났다. 당시에는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소탈하면서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국회의원 보좌관 생활을 하면서 현실정치를 배웠고, 정치가 해법이라는 생각에서 15대 총선에 출마해 낙선 후유증과 이후 도피성이 되어준 강원도 홍천의 생활, 독실한 기독교 교인이 된 이유 등도 책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저자는 현재 노동조합 간부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마음을 드러냈다. 노조가 단순한 이익집단을 넘어 사회가 건전한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중심적 역할을 하기를 바라고 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추천사를 통해 "30년 전 우리는 모두 현장 노동자였고 노동해방을 원하는 조합원이었다"며 "지금은 각자 다른 위치에서 살아간다, 김준용과 나는 다른 정치적 노선을 택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자와 노동의 가치, 이 점에서는 서로 토양을 공유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구로공단이 노동운동가로 살아온 지금의 내가 있게 만들어 준 마음의 고향이라는 것이다. 연어로 치자면 내 인생의 모천(母川)과도 같은 곳이 구로공단(금천구)이라는 점을 착안해 책 제목을 <모천회귀(母川回歸)>라고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모천회귀는 강에서 태어난 연어가 바다로 가 자란 후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최후를 맞는다는 의미의 고사성어다.
지난 5일 오후 4시 서울 금천구 보벨르 웨딩컨벤션 5층 시크릿홀에서 열린 출판기념 북콘서트에 많은 지인들이 참석해 축하했다.
저자는 서울지역노동조합연합(서노협), 민주노총 전신인 전노협(전국노동조합연합)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고, 신계륜 의원 보좌관, 중앙노사정위원회 부노특위 공익위원, 서울지하철노조 정책자문위원, 공무원노총 위원장 특보, 서울노사정 서울모델 공익위원, 국민노총 상임자문위원 등을 지냈고, 현재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으로 사회갈등 조정과 해소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