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보(萬人步)'. 한 명의 만 걸음보다 만 명의 한 걸음이 당당합니다. 만인은 권력과 자본 앞에 할 말 하는 언론의 버팀목입니다. 만인은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드는 어깨동무이자, 찬우물처럼 깨어있는 시민의 뉴스 공동체입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오마이뉴스>를 매월 자발적으로 유료 구독하는 10만인클럽의 만 번째 주인공이 되어 주십시오. [편집자말] |
안녕하세요? 시민기자 강인규입니다. 어느덧 11월도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한국 언론에 등장하는 '단풍 절정' 이야기도 잦아들고, 곧 겨울냄새 묻은 바람이 불기 시작하겠지요. 그리고 머잖아 새해가 찾아오고, 한국 언론은 또 약속이라도 한 듯, 이글거리며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여주며 '새로운 희망'을 말할 것입니다.
한국 언론은 올해가 시작되던 날에도 찬란히 솟는 해를 통해 국민들에게 '희망찬 한 해'를 빌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때, 여러분은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언론이 매년 되풀이하는 축사대로 '희망찬 한 해'를 보내셨습니까? 많이 바쁘시겠지만, 잠시 제 말에 귀를 기울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부와 대다수 언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라가 '발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는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라도 상황이 나아지면 다행이겠지만, 미래는 오히려 더 암울해 보입니다.
농담거리가 된 국민들의 생계한국 언론사들이 멋진 일출 사진을 준비하고 있던 지난해 말, 한국갤럽은 우울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2015년 경제가 어떻게 될 것 같느냐는 질문에 국민들 15%만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답했고, 48%가 '2014년과 비슷할 것'이라고 답했으며, 37%는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답한 것입니다.
아직 한 달 반 여의 시간이 남아있지만, 누구의 전망이 옳았는지를 알기 위해 치밀한 분석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2014년 성장률은 3.3%였습니다. 결코 좋은 성적이 아니었지요. 그렇다면 '지난해와 비슷할 것'이라는 전망 역시 희망찬 답변으로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결과를 보면, '지난해와 비슷할 것'이라는 암울한 예언조차 빗나갈 게 분명합니다.
국제통화기금(IMF)는 지난 10월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7%로 전망했습니다. 불과 8개월 만에 세 번이나 전망치를 하향조정한 결과였지요. 한국은행이 전망한 성장률도 2.8%로, 앞의 국제통화기금의 전망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정부는 애초에 3.8%를 목표로 내세웠다가, 지난 6월 3.1%로 대폭 낮췄습니다. 목표 자체를 지난해 성장률보다 낮게 잡은 것이지요.
그런 뒤 석달 남짓 지난 10월 초,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1% 성장률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하방 리스크'가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낮춰 잡은 목표마저 자신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다시 열흘 뒤, 그는 국회 대정부질문 자리에서 "경제는 나 말고도 잘할 분이 많다"며 장관을 그만 두고 총선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비쳤습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내가 물러나야 우리나라 경제가 잘된다고들 하지 않았느냐"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한국 언론은 최장관이 이 "농담"으로 국회의원들의 "폭소"를 자아냈다고 보도했습니다. 경제가 어떻게 되든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는 사람들과, 하루하루가 전쟁터인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몰상식이 상식 행세를 하는 나라
더 암울한 점은, 국민 대다수가 실제로 겪고 있는 고통은 '경제 성장률' 수치가 말해주는 것보다 훨씬 끔찍하다는 점입니다. 지난해 20∼30대 가구주 가계의 소득 증가율이 0%대로 떨어졌고, 올해 비정규직 비율은 지난해에 비해 20만 명 가까이 늘어 총 627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두 통계치 모두 사상 최저와 최대를 기록했으니, '역사적인' 수치라 할 만합니다.
나라 꼴이 이 지경인데, 한국의 대통령과 여당은 느닷없이 '역사와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국민 수백 명의 목숨을 잃게 만들고는 '세월호 때문에 경제가 악화됐다'고 책임을 돌렸고, 올해에는 메르스 환자 단 한 명을 관리하지 못해 수십 명의 사망자와 2백 명 가까운 환자를 만들어 놓고는 '메르스때문에 경제가 악화됐다'고 변명했었지요.
그러더니 여름에는 '정규직과 노조의 이기주의 때문에 경제가 악화됐다'며, '임금삭감'과 '손쉬운 해고'를 밀어붙였습니다(이에 앞서 대통령은 청년들에게 일자리는 중동에 가서 알아보라고 했었지요). 이러던 정부가 가을이 되니 만사를 제쳐놓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정부가 '국정화' 군불을 지피던 당시, 한국 경제는 결코 한가로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국내외 기관들이 일제히 한국의 경제 상황에 어두운 전망 내놓으며 예상 성장률을 계속 낮추고 있었고, 국내총생산 성장률(GDP)은 세월호 이후 5분기 연속 0%대를 기록했으며, 수출 성장기여도 역시 5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던 때였습니다. 이런 때 청와대와 여당은 난데없이 '국정화'를 끄집어 냈고, 국민 절대다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억지 결정을 밀어붙였지요.
이런 한국 상황을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표현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요사이 벌어지는 요상한 일들을 보고 있자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는 말이 탄식처럼 흘러나옵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말이겠지요. 그런데도 대통령은 국정교과서 강행이 '비정상화의 정상화'라고 우깁니다. 이처럼 우리는 몰상식이 상식 행세를 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태를 지켜봐야 하는 것일까요?
몰상식한 언론이 몰상식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안타깝게도, 한국사회의 몰상식은 꽤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대통령을 국민 절반 가까이가 지지하는 탓입니다. 여론조사 기관인 리얼미터가 최근 11월 1주차(2~4일)에 집계한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는 무려 45.7%였습니다.
지난해에는 더 놀라운 여론조사 결과도 있었지요. 세월호 참사 이틀 뒤, 리얼미터는 박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를 71%로 발표했습니다. 이후 일정주기로 등락이 반복되었지만, 4월 내내 50% 이상의 지지도를 유지했습니다.
이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해할 수 없는' 정부와 더불어 살면서 우리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일까요? 우리는 정말로 국민들의 의사는 물론, 목숨까지도 업신여기는 지도자에게 열광할 만큼 잔인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가장 큰 책임은 언론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에서 언론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언론의 역할'입니다. 언론의 사회적 역할을 다룰 때 빠지지 않는 것으로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뭔가 어려운 듯 학술적 냄새를 풍기는 말이지만, 뜻은 간단합니다. '다시 드러냄' 또는 '대신해서 드러냄'이라는 의미입니다.
국민들은 대통령 집무실을 찾아가 대통령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수 없습니다. 오직 대중매체가 이따금씩 전해주는 모습을 통해서만 판단할 수 있지요. 언론이 권력의 동태를 살피는 '감시견(watchdog)' 역할을 포기하고 '애견'이 되어 재롱을 떨 때, 국민들은 지도자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 언론이 권력의 모습 그대로를 국민을 '대신해서', 국민들 앞에 '다시' 드러내주지 않을 때,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의 한국사회처럼 말입니다. 정부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냉정한 비판, 객관적 사실은 사라지고, 은폐, 칭송, 찬양만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여론조사 결과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국민이 나서는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의 또 다른 기능으로 '매개(mediation)'의 역할을 들 수 있습니다. 언론은 국민을 대신해 권력의 허물을 낱낱이 까발려야 할 뿐 아니라, 국민의 요구를 권력자에게 전달해야 할 의무를 지닙니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은 권력에 대해, 그리고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기보다, 자신의 영향력을 권력과 맞바꾸는 짓을 해왔습니다. 말 그대로 청와대와 여당의 '대변인'으로 전락한 언론인들이 이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저는 '비정상을 비정상으로 부를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두 언론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해직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뉴스타파>이고, 또 하나는 <오마이뉴스>입니다. 특히 제가 <오마이뉴스>와 13년간 맺어온 인연은 각별합니다. 10만인클럽에 가입해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시민기자로서 뉴스 생산에도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매년 '희망찬 새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매일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론이 '재현'과 '매개'의 역할을 하지 않을 때는 국민들이 직접 나서야 합니다. '기레기'라는 조롱이 분한 마음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그 '기레기짓'을 멈추는 데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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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인클럽 '만인보' 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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