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 아빠가 '짜잔'하고 보여준 우리 가족의 새집은 아파트였다. 어제까지 살았던 낮고 아담한 집에 비해 아파트는 크고 높고 또 어린아이의 눈엔 꽤 멋져 보였다. 부푼 가슴과 함께 나의 아파트 생활은 그날 그렇게 시작되었고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아파트를 좀 벗어나고 싶다.
눈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넓디넓은 땅에 빽빽이 들어찬 아파트 숲을 보며 '와' 하고 환호했던 적도 있긴 하다. 마을 골목을 휘젓고 다니듯 아파트 단지를 휘젓고 다니는 것도 꽤 괜찮은 놀이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파트 숲은 진짜 숲이 될 수 없었고, 아파트 단지도 마을 골목의 다양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아파트에 살면 살수록 점점 더 고립되기만 했다. 이웃 수는 늘어났지만, 정작 인사를 주고받는 이웃은 없다. 윗집, 아랫집,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그저 집 안에서 우리는 혼자 삶을 살아갈 뿐이다.
아파트는 집에 관한 관점을 독점하기도 했다. 집이 풀어낼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가 사라지고, 어느 동네, 어느 아파트, 몇 평이 이야기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집에 관한 관점이 우리가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거의 유일한 관점이 되어버린 지금, 상실된 많은 이야기들에 저절로 그리움이 커진다.
매일매일 답답증이 쌓여가는 이유, 힘이 들 때면 집에서의 휴식보다 여행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 아파트로 대변되는 지금의 집이 더는 우리에게 안락함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아파트, 또는 도시를 벗어나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잃어버린 집의 가치를 재건하고, 그 속에 나만의 가치, 문화, 생활 방식을 차곡차곡 쌓아 넣는 즐거움. 이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사람들은 마땅히 아파트로 헤쳐 모이던 관성을 버리고 멀리 멀리 흩어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생활 터전이 여전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처럼 자유롭지 못하다. 군집에서 멀리 떨어져 홀로 지내야 하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도 그들처럼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책이 나왔다. 소설가 홍새라가 쓴 <협동조합으로 집짓기>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협동주합주택
북한산 등산로 입구 155평 부지에 다세대주택이 들어섰다. 주택 이름은 북한산 둘레길 8구간인 '구름정원길'에서 따온 '구름정원사람들'. 지하 1층과 지상 1층엔 세 개의 점포가 입점 가능하고, 지상 2층부터 4층까진 40, 50대로 이루어진 여덟 세대가 각자의 취향을 반영해 둥지를 틀었다. 여덟 세대 모두가 솔숲 조망과 일조를 공평하게 나누었고, 3개의 복층집, 5개의 단층집도 충분한 토의를 거쳐 각 세대에게 나누어졌다.
'평생을 함께할 소중한 보금자리'를 위해 모인 입주민들은 집 설계부터 완공까지 모든 것을 함께 했다. 입주를 끝낸 뒤에는 함께 텃밭을 가꾸고, 상가에서 나오는 임대수익도 공평히 나눈다. 4층에는 공동 공간 '사랑방'을 두어 함께 영화도 보고 막걸리를 기울이며 잃어버렸던 공동체 생활도 만끽한다. 지역발전을 위해 사랑방은 마을 회관으로 내어주기도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주택협동조합 '하우징쿱주택협동조합'의 1호점인 구름정원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책에는 생전 처음 만난 사람들이 협동조합을 조직하고, 민주적인 토의 과정을 거쳐 집을 지어 올리는 과정이 쉽고 유쾌한 투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땅을 사들이고, 집을 설계하고, 인테리어를 꾸미고, 입주 뒤 생활을 이어가는 일련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사람이 함께 사는 곳엔 으레 갈등도 따라오는 법. 살아온 환경과 가치관이 모두 다른 여덟 세대가 저마다 의견을 내다보니 오해도 생기고 날 선 대화가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인 홍새라의 말대로 "단순히 여러 명이 모여 '집'을 짓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 '집'을 매개로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라야 협동조합주택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집만 지어놓고 그 이후엔 서로 나몰라라 하는 건 협동조합주택의 나아갈 길이 아니다. 이웃과 함께 즐겁게 살기 위해선 소통을 위해 모두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구름정원사람들 조합원들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MBTI 성격 유형 검사를 실시하고, '협동조합은 무엇인가?'에 대해 공부하고, 서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비폭력대화법을 익혔다.
누가 삐치기라도 하면 몇 명이라도 달려가 대화를 시도했고, 관계를 풀었다. 그렇게 서로 이해하고 익숙해지는 사이, 집은 그 모습을 점차 갖춰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협동조합주택 구름정원사람들은 2014년 10월 준공이 완료된다.
입주를 끝내고 생활을 시작한 조합원들은 높은 만족감을 보였다. 우리나라에는 없던 형태의 주택을 짓던 탓에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무엇 하나 쉽지는 않았지만, 그 결과는 생각보다 더 좋았다. 책의 말미에 실려있는 입주민 몇 명의 인터뷰를 옮겨 보면 이렇다.
"이사 와서 가장 좋은 것은 먹을 것을 나눈다는 것이다. 전에는 시골에서 야채를 가져오면 미처 다 먹지 못해 썩히거나 버렸다. 그런데 지금은 복도에 내놓고 밴드에 알리면 각 집에서 필요한 것을 가져간다.""텃밭농사를 하면서 함께 땀 흘리고 생명이 자라는 걸 보는 게 좋았다.""입주해서는 아파트와 달리 나무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땅도 가깝고, 사람들 사는 소리도 나고, 새소리, 풀벌레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 특히 사랑방은 우리들만의 사랑방일 뿐 아니라 마을회관 역할까지 하고 있다. 나만, 우리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마을까지 그것을 나눌 수 있으니 참으로 뿌듯하다."저자 홍새라도 책의 서문에 집을 지은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여덟 가구가 모여서 이전에 살던 것과는 다른 의미의 집을 지었다. 나는 이 집에 어릴 적 큰 사랑방처럼 우리 모두 모일 수 있고 지인들도 불러 모임을 할 수 있는 '사랑방'이 있는 것, 각 층마다 안마당 같은 공용테라스를 둔 것, 집과 집 사이의 계단과 계단참이 널찍하고 밝은 것, 건물 출입구 앞으로 동네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넓은 통로를 만들어놓은 것, 작긴 하지만 공동세탁실이 있는 게 참 좋다.""가장 좋은 것은 먹을 것을 나누는 일"
협동조합주택은 아직 우리에겐 생소하기만 하다. 직접 집을 짓는 것뿐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과 뜻, 마음, 거기다 돈도 모아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 결코 쉬워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읽고 협동조합주택에 조금은 반했다. 아파트의 대안으로 이 정도면 꽤 괜찮지 않을까?
협동조합주택은 아파트에선 벗어나고 싶지만 지금 사는 곳에선 멀리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 아파트 전셋값 정도의 자금으로 집을 소유하고 싶은 사람들, 개성 가득한 공간은 꿈꾸지만 그렇다고 홀로 따로 떨어져 살긴 두려운 사람들, 그간 잃어버렸던 이웃 간의 정이나 공동체 의식이 그리운 사람들, 거기다 경제적 이익도 원하고, 지역 사회 공헌에도 뜻이 있다면 한번 생각해 봄직한 주택 형태이지 싶다.
우리나라 협동조합은 이제 걸음마 단계이다. 2012년 12월 1일, 협동조합 기본법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나 역시 협동조합에 대해 듣기 시작한 게 겨우 몇 년 전이다. 내겐 낯설기만 한 이 작은 공동체가 유럽 어느 나라에서는 일상이 되어있는 모습을 책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접했다. 심지어 덴마크에서는 사람 셋이 모이면 협동조합이 하나 생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협동조합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슬슬 협동조합 바람이 불고 있는 듯하다. 작년에 본 다큐멘터리 <다큐 3일>에서는 '동네빵네'라는 협동조합 빵집이 소개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택시 협동조합 '쿱' 택시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리고 주택도 협동조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 책이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아직 협동조합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다. 국제협동조합연맹에선 협동조합을 이렇게 정의 내리고 있다.
'공동으로 소유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사업체를 통하여 공통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자율적인 조직' 덧붙이는 글 | <협동조합으로 집짓기>(홍새라/휴/2015년 10월 27일/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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