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9일. 우리 첫 아이, 기련이가 태어났다. 나를 마라도에 남아 있게 한 아이, 나와 남편을 자연주의로 이끈 아이, 가게가 망하고 또 망해도 오뚝이처럼 일어나게 한 아이가 새해를 이틀 앞두고 태어났다. 우리 부부에게 이렇게 특별한 존재로 오려고 그랬는지 그 출생 일화도 어지간히 요란했다. 8년 전 기억을 더듬고 더듬다 보니, 바로 엊그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글을 줄일 수 없어 2회로 나누어 싣기로 한다.
작은 섬에 살다 보면 아무리 애를 써도 그곳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은데, 출산도 그중 하나다. 자칫 잘못하면 두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것이 출산이다. 본섬과 이어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배가 오가는 시간이 한나절에 불과하니, 그 나머지 시간에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몹시 힘들어지고, 풍랑주의보라도 발령되어 대체 선박마저 뜨기 어려운 지경이면 그야말로 암담해지는 곳이 섬이다.
제주시에 있는 조산원을 다니던 아홉 달 동안, 나는 신랑과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반은 우스갯소리로, 반은 진지하게 거의 백 번이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뭍사람들은 마라도에서 만난 임산부 자체를 신기해하며, 아이는 어디서 어떻게 낳을지, 걱정스럽게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 편하게 "정 안 되면, 신랑이 받아야죠, 뭐"라고 대답했고, 신랑은 나보다 더 속 편하게 "내가 받아야죠, 별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내가 남편을 '신랑'이라는 매우 사랑스런 호칭으로 불렀었구나. 언제부터 그 호칭이 바뀌었던 것일까? 아무튼 이 글에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불러야겠다).
새벽 마라도 집에서 찾아온 진통
말이 씨가 된다고, 출산예정일을 코앞에 두고 예비 풍랑주의보가 떨어졌다. 가진통은 이미 시작되었다. 주의보가 이틀 동안 이어질 거라고 했다. 우리는 부랴부랴 마라도를 벗어났다. 조산원에 가서 몸의 상태를 보니, 자궁문이 2센티미터 가량 열려 있었고, 곧 진짜 진통이 시작될 것 같았다. 아무쪼록 주의보가 떨어진 이틀 안에 아기가 나오기를 바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뱃속에서는 별 기척이 없었다. 불규칙적으로 아랫도리를 자극하는 불쾌한 느낌만 올 뿐이었다. 그런 상태로 조산원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자니, 적잖이 머쓱해져서 낮에는 계속 돌아다녔다.
조산원 원장님은 많이 걸어야 빨리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사라봉 꼭대기까지 걸어갔다 내려오고, 오일장 구경도 하고, 급기야 왕복 2시간 정도 걸리는 성읍민속촌까지 다녀왔다. 그래도 나는 전혀 출산이 임박한 산모 같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우리는 다시 마라도로 돌아왔다. 예정일 하루 전날이었다.
마라도에 돌아오니, 제대로 머쓱해졌다. 선착장에서부터 맞닥뜨린 주민들은 뜨악한 표정으로 우릴 쳐다봤다. '애 낳으러 간 거 아니었어?'라며 여전히 꺼지지 않은 내 배를 향해 레이저총 쏘듯 쏘아대는 눈빛들이라니.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안 나오는 애를. '내 잘못이 아니라고요.' 그렇게 돌아와서 나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주방과 홀을 오가며 짜장면을 팔았다. 그리고 밤이 오고, 새벽이 왔다.
사달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오전 2시, 아랫도리에 통증이 왔다. 가진통과는 다른 통증이었다. 이것이 진짜 진통인가? 참 생경한 통증이었다. 여자가 아니면, 아이를 낳는 순간이 아니면 절대 느낄 수 없는 야릇한 통증. 그런데 안타깝게도 글로 옮길 수가 없다. 표현하기 어려워서라기보다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서다. 나중엔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오지만, 몇 달만 지나도 잊어버리기 시작한다더니, 정말 그랬다. 모든 엄마들이 그래서 둘째도 낳고, 셋째도 낳고 하는 거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진통이 거듭되는 시간을 재었다. 5분 간격, 또는 7분 간격으로 왔다. 진짜 진통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어쩌자고 오전 2시에 이러냐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더 견뎌 보기로 했다. 그렇게 2시간을 보냈다. 진통이 조금씩 심해져 몸이 뒤틀렸다. 신랑을 깨웠다. 신랑은 대번에 "응, 와? 가까?"라며 일어났다. 목소리에는 잠이 잔뜩 묻어 있었지만, 잠 속에서도 항시 대기 상태였던 모양이었다. 여차하면 자신이 아이를 받아야 할지도 모르니, 아이를 낳는 나보다 더 긴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랑은 깜깜한 새벽에 짜장을 볶았다. 출산을 앞두고 신랑의 아는 형님과 내 친구의 남편을 마라도로 불러 두었었다. 나는 출산휴가에 접어들 것이므로, 일을 대신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이들은 마침 그때 백수였고, 마라도 생활을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신랑은 자신이 마라도에 없는 동안 둘이 알아서 팔라고 짜장을 잔뜩 만들어 두었다.
다시 2시간이 흘렀다. 통증은 점점 심해졌지만, 신랑이 준비를 마칠 동안 참고 기다렸다. 오전 6시, 안 되겠다 싶었다. 오전 10시 30분에 들어오는 첫 배를 타고 나가다가 길에서 아이를 낳으면 어떡하나 겁이 났다. 신랑이 119에 전화를 했다. 통화는 순조롭지 못했다. 119에 전화를 거는 위급한 사람들의 심리는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전화 떨어지기 무섭게 헬기든 배든 출동해서 짠하며 순식간에 나타나는 것이지만, 현실은 완전 딴판이다. 나이, 이름, 주소 등등 시시콜콜한 인적사항을 다 물어봐놓고는 '하시는 말씀'이 119는 육로 이동수단밖에 지원하지 않으니, 해양경찰로 연락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뭐니? 원래 그런 것이었어? 한꺼번에 몰아쳐오는 황당함과 조급함과 짜증을 겨우 누르고 있는데, 해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119에서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다시 시작되는 인적사항 조사. 21세기로 진입한 지도 어언 8년이나 지났건만, 무슨 시스템이 석기시대 모양으로 주먹구구식이었다. 섬을 끼고 있는 지역이라면 그 정도 업무 공조는 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어쩌랴, 제발 배 한 대만 보내주십사 하며 고분고분 대답했다. 해경의 대답은 이랬다. 해양경찰선을 보내주긴 주는데, 현재 그 배가 1시간 거리의 서귀포시 앞바다에 있단다. 그래도 제주시 앞바다 아닌 게 어디냐고 최대한 긍정적 마음가짐으로 통화를 계속하는데, 그 다음 말은 귀로 듣고도 믿기 힘든 말이었다.
마라도의 선착장은 경찰선이 접안할 수 있는 구조가 못 되므로 선착장에서 배까지 실어 나를 보트가 필요한데, 보트를 수소문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트 정도는 경찰선에 장착이 되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백번 양보해서 그게 불가능하다면, 인근 가파도나 모슬포에 있는 보트 몇 척은 비상연락망으로 확보되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냔 말이다. 나중에 신랑한테 들은 바에 따르면, 선착장이 경찰선이 접안하기 어렵게 생겨먹긴 했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일반 여객선도 접안하는 선착장에 해양경찰선이 접안을 못 하면 그건 대체 왜 존재하는 건가 말이다. 해경은 위급한 민간인의 신속한 수송보다 경찰선에 흠집날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해경이 보트를 수소문하는 동안 통증은 더 심해졌고, 나는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오매불망 전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 만에 온 해경의 전화는 가히 분노스러웠다. 보트를 수배한즉, 제주시 쪽에 있는 보트가 수배되었는데, 마라도까지 오려면 아무리 달려도 1시간 이상 걸린다고 했다. 얼마나 정보가 없었으면, 멀어도 그리 최대한 멀리 있는 배를 수배했을까. 해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할지 의사를 물었다. 우리에게 무슨 선택권이 있다고 그리 친절하게 물어보시나요, 예? 신랑과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경찰선 타고 멀미와 싸우며 도착한 제주도
그런데 일은 엉뚱한 데서 풀렸다. 신랑의 뇌리에 마라도에도 보트가 있다는 것이 그제야 떠올랐다. 마라도에서 유일한 그 보트는 마라도의 양대 실세 중 한 집안 소유였다. 신랑은 전혀 왕래를 하지 않던 집안 것이라 뒤늦게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아무리 필요한 일이 생겨도 부탁 같은 건 하지 않을 사이인데, 출산은 신랑을 움직이게 했다. 안 빌려주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기까지 했는데, 그쪽에서도 출산이라는 사태 앞에서는 선선했다. 마침내 경찰선이 곧 도착한다는 연락이 왔다. 9시가 다 되어 있었다. 처음 119에 전화 건 시간이 6시였으니, 무려 3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참았다가 정기여객선을 타고 나가도 될 일이었다.
그래도 애써 온 경찰선을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인지라 마을 트럭을 타고 선착장으로 나갔다. 보트는 이미 대기하고 있었고, 경찰선은 그러고도 한참 더 지나 수평선에 나타났다. 보트에 몸을 싣고 내달리는데, 너울을 타고 널을 뛰었다. 자칫하다가는 그대로 바다에 곤두박질칠 것 같았다. 팔다리가 부서져라 힘을 주고 버텼다. 이게 출산 직전의 임산부가 겪어도 되는 일인가? 이때부터 모든 게 이상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경찰선 밑에 닿았다. 보트는 낮고, 경찰선은 높았다. 나는 두 명의 해양경찰에게 팔이 붙들려 들어 올려졌다. 아, 저기요. 나 임산부거든요. 마치 내가 짐짝 같았다.
경찰들은 친절했다. 마주치는 경찰들마다 인사를 하며 괜찮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여러모로 괜찮지 않았다. 바람에 머리칼은 수습할 수 없을 만큼 헝클어져 있고, 배는 불러 흔들리는 배 위에서 발을 떼기도 무서웠고, 무엇보다 정신은 마라도에 떨어뜨리고 온 듯 멍한 상태여서 그냥 모른 척 하는 게 날 위한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선실로 내려가 침대에 누웠는데, 그때부터 문제는 진통보다 멀미였다. 숱하게 배를 타고 오가던 신랑도 멀미를 느낄 만큼 경찰선의 요동은 심했다. 그렇게 30여 분을 멀미와 싸우며 가서 도착한 선착장은 어라? 처음 보는 곳이었다.
그곳은 선착장이 아니라 배를 정박해두는 곳이었다. 유람선 두 척이 운행 시간을 기다리며 나란히 정박해 있었고, 경찰선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는 그 유람선 옆자리뿐이었다. 선실에서 올라온 나는 경찰선을 반 바퀴 돌아 바깥쪽 유람선 위로 역시나 들어 올려졌고, 그 유람선을 다시 반 바퀴 돌아 안쪽 유람선으로 옮겨 타고 다시 반 바퀴를 돌아야 땅에 내릴 수 있었다. 멀쩡한 승객 선착장 놔두고 왜 여길 와서 임산부 '개고생' 시키나 그래.
뱃머리를 도는 동안 진통이 와 한동안 멈춰서 있다가도 괜히 새벽잠 깨어 나온 많은 '관계자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서둘러 발길을 재촉해야 했고, 그 때문에 도리어 마음은 계속 언짢아졌다. 나중에는 짐짝처럼 들어 올려지는 게 싫어 부축을 해주려는 팔들을 뿌리치고 내 힘으로 건너갔다. 괜히 탔어, 괜히. 후회가 해일처럼 덮치는 사이, 누군가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해양경찰서 보고용일 것이다.
경찰선과 유람선 두 척을 돌고 돌아 비로소 땅에 내리자, 앰뷸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대목에서는 좀 놀랐다. 119는 해양경찰을 연결해준 뒤로는 다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들 말대로 육로 이동만 가능하니, 부두에서 제주시까지는 데려다 줄 모양이었다. 배에서 내리면 이 모든 '관계자들'을 뒤로 하고 우리 차를 타고 이동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우르르 둘러싸고 우리를 앰뷸런스 쪽으로 인도하는 바람에 찍소리도 못하고 차에 올랐다. 그 직전에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이번에는 119 보고용이겠지. 근데 늘 이렇게 사진을 찍는 것은 아닐진대 어디 기사라도 내려고 그랬나?, 하는 생각이 지금에야 든다. '임산부, 119 이송 중 분만' 뭐, 이런 기사 말이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경제매거진 <이코노믹리뷰> 온라인판 11월 19일자에도 함께 실립니다. 이 이야기는 2008년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으며, 현재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은 마라도가 아니라 서귀포시 화순에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