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속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을까?지난 10일 밤, 아내는 PC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검색하다 내게 묻습니다.
"여보, 김제를 가야하는데, 걱정이네요!""김제까지? 차 끌고 가면 되지, 아니면 KTX를 타든가!""워낙 멀어서 그렇죠. 열차 시간도 마땅찮은데….""뭐 하러 가는데 그래?""전북 다문화 우리말 한마당 잔치를 하는데, 내가 심사를 부탁받아서요.""그래? 내가 기사 노릇하면 되잖아. 걱정말라구!"나는 선뜻 아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내심 뭔가 기대가 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 혹시? <인간극장>에 나온 누구더라? 그녀도 나올까? 아, 깔끼단!'
며칠 전, KBS1 <인간극장>에 나온 깔끼단이라는 에티오피아 신부 생각이 났습니다. TV에서는 완주군 대표로 선발된 내용은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혹시 대표로 출전하면 TV 속의 주인공을 직접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아내의 제안을 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아내는 다문화 가족과 관련된 일을 합니다. 이번 행사에서 심사를 부탁받아 출장을 가게 되는 모양입니다.
아내는 <인간극장>을 보지 않아 깔끼단을 알지 못합니다. 대회에서 순위를 매기는 행사라 나는 혹시나 참가하게 될지도 모를 깔끼단에 대한 정보를 숨겼습니다. 심사에 영향을 주면 안 될 거라 생각한 것이지요.
흔히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라고 비유합니다. 사람의 삶의 여정은 기쁨과 노여움, 또 슬픔과 즐거움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평소 소시민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인간극장>을 즐겨봅니다. 가끔 의도적으로 연출되는 게 느껴져 식상할 때도 있지만, 우리네 이웃들의 색다른 삶을 엿볼 수 있어 재미있습니다.
아, 에티오피아!
'지구 반대편의 멀고 먼 에티오피아 신부가 어떻게 한국에 왔을까?' 나는 시작부터 호기심에 가득했습니다. 1부를 보고 내친김에 IPTV로 5부까지 보게 되었지요.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 열사의 땅입니다. 그리고 커피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커피는 에티오피아가 태초라 합니다. 커피의 원종(原種)이 세계 각처로 퍼져 나간 곳이 에티오피아이기 때문이죠. 전체 인구의 30%이상이 커피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또한 생산량의 절반가량을 자국민이 소비할 정도로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커피는 공기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아주 가난한 나라로 알려졌지만, 에티오피아는 6·25 한국전쟁 당시 UN참전국 16개국 중 하나로 우리를 도운 고마운 나라입니다. 5차에 걸쳐 6천여 명의 병력이 참전하여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이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이기지 않으면 죽음을 선택한 그들의 용맹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6·25 당시 대한민국이 지구상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달려와서 목숨을 건 고마운 에티오피아인들! 그들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에티오피아인들의 노고가 숨어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에티오피아 하면 또 마라톤 선수 아베베를 기억합니다. 맨발의 마라토너로 유명한 아베베는 한국전쟁에도 참전한 용사였습니다. 그는 제17회 로마올림픽(1960년)에서 맨발로 뛰어 세계 최초 2시간 15분대로 우승하여 마라톤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올림픽인 제18회 도쿄올림픽(1964년)에 출전하여 2시간 12분대의 세계신기록을 세워 올림픽 마라톤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하였습니다. 그의 불굴의 정신은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 입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신부와 한국인 신랑의 사랑우연찮게 방송을 타고 찾아온 에티오피아 신부의 이야기는 호기심을 넘어 화면 속으로 빠져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앳된 22살의 에티오피아 신부 깔끼단과 착하고 순한 선머슴 같은 32살의 유준상씨. 그들의 꾸밈없는 진실한 삶의 이야기에 나는 매료되었습니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낯선 땅에서의 이방인, 그리고 뇌종양 수술 후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젊은 청춘이 운명처럼 만나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진솔한 내용은 한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이젠 9개월 딸 '그래'의 엄마로, 친딸처럼 보듬어 준 시부모님의 별난 며느리로 살아가는 일상이 이색적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데이트하는 도중, 한국생활에서 느낀 것을 자주 찾던 의자에 앉아서 말합니다.
"여기에 있는 의자가 내 친구야, 그리고 여기 있는 나무가 다 친구야!"그녀는 화가 나고 힘들 때는 의자와 나무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남편의 사랑과 시부모님 보살핌이 있었다지만 그녀가 겪었을 외로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두 사람이 처음 결혼하겠다고 선언할 때를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이던 시아버지의 말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상황이 벌어지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 생각은 그렇지만 본인이 좋다는데 어떡하겠냐. 아들이 원망스러워서 속으로 많이 울었다."이들 가족이 겪었을 말없는 아픔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우리말 한마당 행사에서 만난 깔끼단
11일, 우리는 김제에서 벌어지는 전북 다문화 우리말 한마당 행사장으로 향합니다.
"여보, 그만 일어나! 여기 김제야!"나는 깜박 잠이 든 아내를 깨웠습니다. 우리는 서둘러 행사장에 들어섰습니다. 행사장에는 이미 다문화 가족들로 많이 붐볐습니다.
현수막에 깔끼단의 이름과 '엄마라는 말'이라는 그녀의 발표주제가 보입니다. 나는 TV 속의 에티오피아 주인공을 만난다는 기대로 가슴이 부풉니다. 식전행사가 펼쳐지자 현장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합니다.
14명의 다문화 가족 연사들의 웃고 울리는 내용을 조용히 들었습니다. 전라북도 14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예선을 거친 도대회 행사라 참가자들은 많은 연습을 하여 차분하게 발표를 했습니다.
그들은 언어장벽에 따른 소통의 어려움과 문화적 차이에서 온 이해 부족, 그리고 서럽고 아픈 이야기들을 풀어냅니다. 가족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지금 누리는 행복한 이야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냅니다.
어눌한 말투에 조금은 떨었던 그들이지만, 당당하고 파이팅 넘치는 자세가 참 보기 좋았습니다.
'한국생활 1년 반 만에 깔끼단이 수많은 청중 앞에서 한국어로 발표를 잘할 수 있을까?' 나는 반신반의 하였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숨죽이며 들었습니다. 내 기우는 빗나갔습니다. 남편의 도움을 받았는지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를 외워 발표하는 모습이 대견하였습니다.
아래 부분을 이야기할 때 나는 울컥했습니다.
"한국으로 온 첫날, 시어머니는 저에게 엄마라고 부르라 했어요. 엄마, 자꾸만 좋아서 불러봅니다. 엄마. 이젠 새로운 엄마가 생겼으니 우는 일은 그만할래요. 돌아갈 고향은 없어졌지만, 새로운 고향이 생긴 거지요. 그리고 잘 살겠다, 다짐하듯 또 불러봅니다. 엄마."드디어 시상식. 아내가 심사위원을 대표하여 심사평을 합니다.
"모두 열심히 하였습니다. 우열을 가리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순위를 떠나 온갖 어려움을 뛰어넘어 이젠 한국인으로서의 떳떳한 모습이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웠고요. 앞으로도 사랑과 이해를 바탕으로 더욱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이루세요. 여러분의 행복이 우리나라의 미래이니까요. 오늘은 참가자 모두 우승자입니다!"단상 앞에 한 아이를 안고 서성이는 한 남성이 눈에 들어옵니다. TV 속에서 본 깔끼단의 남편 유준상씨입니다. 안고 있는 아기는 그의 딸이구요. 나는 가까이 가서 인사를 나눴습니다.
"네가 '그래'로구나! 그래 아빠, TV에서 좋은 모습 잘 봤어요.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요."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이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TV 속의 소박하고 순수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행사가 모두 끝났습니다. 아내는 입상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깔끼단과 딸을 안고 있는 그의 남편과도 사진을 찍자고 합니다.
아내는 손을 붙잡으며 깔끼단에게 말합니다.
"깔끼단, 예쁜 모습 보기 좋아요! 오늘 누구보다 정말 멋졌어요!"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왜 깔끼단이 대상이 아니고, 금상이야! 대상 받은 분도 훌륭했지만, 깔끼단도 아주 감동적으로 발표 잘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