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어린 학생들을 죽이고도 1년 동안 진실을 밝히는 노력을 거부하는 박근혜 정권은 오로지 자본가 계급과 이들의 정치적, 사상적 대변자들의 재산 증식과 권력 확대에만 열중하고 있다."국내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고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이는 <오마이뉴스>가 최근 입수한 2015년 '자본론' 새 번역판(비봉출판사) 서문에 씌여있다. 그는 "이것이 '자본주의체제의 기본특징'"이라고 적었다. 김 교수의 생애 마지막 책이 된 '자본론'은 16일 오후 출간됐다.
김 교수는 지난 2013년부터 자신의 옛 '자본론' 개정 작업에 들어가, 그동안 새로운 번역에 몰두해 왔다. 김 교수는 올해 초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오는 2017년이면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세상에 나온 지 150년이 되는 해"라며 "이에 맞춰 내가 조금이라도 힘을 남아있을 때 미리 (150주년을) 축하하고 싶어서 새롭게 번역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는 특히 "이번에는 젊은 친구들도 보다 쉽게 이해할수 있도록 어려운 용어들을 알기 쉬운 우리글로 새롭게 번역하고 있다"면서 "올 여름께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세 번째 <자본론> 재번역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나오는 각종 경제학 용어 자체가 다른 경제학에선 전혀 사용되지 않는 용어인 데다, 각종 화폐, 무게, 길이 등 단위 역시 시대와 환경 역시 우리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이에 자본론 전 3권(1,3권은 상하 두권, 2권과 별책포함 모두 6권)을 새롭게 쓰면서, 아예 별도의 책에 참고문헌과 인명해설 등을 담았다. 당초 예정됐던 출간도 3개월 가량 늦어졌다. 김 교수는 지난 6월께 자본론 별책에 들어가는 서문을 최종 완성했다. 하지만 7월말 미국에서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다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삶을 마감했다. 26년 동안 세차례에 걸쳐, 공들여온 그의 마지막 <자본론>을 정작 김 교수는 보지 못했다.
"'부자를 위한, 부자에 의한, 부자의 정치' 강화"그의 마지막 <자본론> 서문도 날로 심화되는 불평등과 빈부격차, 계급간 갈등에 대한 고찰과 대안이 그대로 녹아 있다. 그는 "2007년부터 터지기 시작한 미국의 금융공황이 지구 전체로 퍼지면서 정치와 사상, 인간성을 포함한 자본주의적 문명 전체가 치명적 타격을 입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현재의 경제위기를 1930년대 세계 대공황에 비유하면서, 정부가 부자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교수의 이런 비판은 이미 수년 전부터 꾸준히 해왔던 것.(관련기사: 2011년 인터뷰
"세계대공황 3년은 더 간다...MB는 복지 몰라")
"1930년대 세계 대공황에 버금가는 거대한 실업자와 빈민이 날마다 격증하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 정부와 국회와 사법부는 이번 공황의 원인이기도 한 '부자를 위한, 부자에 의한, 부자의 정치'를 오히려 강화하면서 국가 재정을 모두 부자를 위해 쏟아 붓고 있다."그는 특히 최근 10년 새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해 약소국 국민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게다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내에선 옛 파시즘 경찰국가 등장으로 민주주의가 아예 '유린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다시 그의 말이다.
"열강들은 외국을 침략하여 부를 약탈하면서 약소국의 인민 대중을 죽이는 것을 컴퓨터 게임처럼 여기고 있다. 국내에서도 파시즘의 경찰국가와 정보사찰로 인민 대중의 민주주의적 권리가 말할수 없이 유린되고 있다."그는 지난 미국 월가와 영국 런던 젊은층의 대규모 집회 등을 예로 들며 "이런 막다른 골목에서 세계의 모든 인민이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하려고 떨쳐 나서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강조했다.
"민주적이고 자유롭게 보다 평등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김 교수는 이번 서문에서도 자본주의 체제가 갖는 필연적인 불평등과 계급갈등을 다시 한 번 비판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탄생했으며, 자본가 계급이 어떻게 부를 축척했고, 임금 노동자들이 착취의 대상이 됐는지를 '자본론'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
"자본주의 체제는 재산을 가진 자본가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노동력뿐인 임금 노동자를 착취하는 사회이고, 부자가 빈민을 억압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며 더불어 사는 사회가 될 수 없다...(중략) 자본가가 된 인사들은 자기의 노동으로 새로운 부를 생산하여 자기의 재산을 증가시키기보다는, 대체로 권력에 빌 붙거나 토지와 아파트에 투기하거나, 고리대금업을 하거나, 시장을 독과점적으로 지배하거나, 상공업을 운영하여 일반 대중의 주머니를 털거나 임금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재산을 증가시킨 경우가 많기 때문에..."김 교수는 "자본가들이나 부자들, 고위관리들은 임금수준이 낮고 노동자들이 고분고분할 때 마음껏 착취하여 더 많은 돈을 벌자는 욕심뿐이다"고 비판했다. 이어 "임금 노동자들은 자본, 토지, 노동 등 이른바 생산의 3요소가 남아도는데도 그들이 굶어 죽고 있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 체제' 때문이라는 확신을 들게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같은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꾸준히 '새로운 사회'를 역설해왔다. 그동안 기자와 수차례에 걸친 인터뷰에서도 꾸준히 주장해왔던 이야기다. (2014년 인터뷰:
"이 모든게 '돈' 때문...새로운 사회를 준비해야" )
그는 이번 책 서문에서도 노동자와 대중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김 교수는 "소련 공산주의와는 전혀 다른 민주적이고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라고 덧붙였다. 다시 그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노동자들 모두가 현재 현실적으로 공동 점유하고 있는 공장 전체나 회사 전체를 자기들 모두의 공동소유 즉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켜, 자기들의 집단적 지성에 따라 운영하게 된다면 '임금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주인의식'을 가지면서 자기들의 개성과 능력을 자발적으로 헌신적으로 기분좋게 발휘함으로써 사회를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1990년 첫 완역본 이후 26년 동안 공들인 21세기판 <자본론> 끝내 보지못해...그의 평생 작업이자 유작이 된 2015년판 <자본론>은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왔다. 김 교수와 공동 번역작업을 진행한 강성윤 박사는 "기존 책에서 지적돼왔던 어색한 표현과 번역 용어를 쉬운 우리말로 대폭 바꿔 젊은 세대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강 박사는 "수십 년간 '자본론'을 연구하고 강의해 온 김 교수 본인의 연구성과에 후배 제자들의 기여가 더해진 21세기판 '자본론'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자신이 처한 현실에 분노하고 실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번 자본론은 고민과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한국사회경제학회는 고 김수행 선생 추모위원회와 함께 오는 20일 오후 '자본론' 출판 기념회를 갖는다. 이 자리에서 '21세기 한국에서 '자본론' 읽기와 대중화를 위한 모색'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도 열린다. 강신준 동아대 교수를 비롯해 류동민 충남대 교수, 장시복 목포대 교수, 하태규 경상대 교수 등 국내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이 대거 참석한다. 기념회는 이날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