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바람이 내게로 이번 게스트하우스는 용두암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사진으로 보던 것처럼 외관이 아주 독특했다. 근방에 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그리고 작은 식당들 사이로 기묘한 모양의 건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방은 작은 편이었지만 깔끔했다. 무엇보다 지난 게스트하우스와 달리 이곳엔 혼자 숨어들 곳이 있어 마음에 들었다. 여행이 며칠 안 남은 만큼 이제는 특별히 어디를 가기 보단 지난 여행을 정리하고 싶었다.
정유정의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보면 저자도 히말라야 등반을 끝낸 뒤 일부러 며칠 더 머물면서 지난 여행을 되돌아본다. 그리고 그렇게 되돌아본 덕에 생각지도 못했던 여행기를 쓰게 되기도 한다.
나는 히말라야 등반처럼 한계를 뛰어넘는 여행을 한 건 아니지만, 그만큼 몸이 축난 것도 아니지만, 정유정처럼 시간을 되돌아보며 내 제주 여행을 환상적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이곳 용두암 근처를 마지막 근거지로 삼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오늘만 빼고.
사실 원래 이곳은 내일 도착해야 할 곳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지난 게스트하우스에서 3박을 하고, 또 이곳에서 3박을 해야 했다. 그런데 지난 게스트하우스에서 2박을 한 바람에, 이곳에서 4박을 하게 됐고, 오늘은 식이와 함께 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식이는 한라산을 함께 등반했던 장기수이다.
방에 짐을 넣고, 식이가 올 시간에 맞춰 아래로 내려갔다. 울산 집에서부터 오토바이를 끌고 왔다는 식이는 오늘도 오토바이를 부릉 타고 나타난다. 한 번도 오토바이를 타 본 적 없다는 내게 오토바이를 툭툭 치며 콧바람을 제대로 쐐 보잔다.
"나는 별로 오토바이를 타고 싶지 않은데...""그러지 말고 한번 타 봐요. 조심히 운전하면 돼요."보자마자 얼굴이 왜 그렇게 탔냐며 놀려대는 식이를 무시하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물었다. 식이는 비양도를 가자고 했고, 나는 프리마켓을 가자고 했지만, 결국 그냥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걸로 결정 났다. 비양도는 너무 멀었고, 프리마켓은 메르스 때문에 열지 않았다.
우선, 밥부터 먹을까? 제주에 오래 머물렀던 식이는 제주랑은 전혀 상관없는 음식이 먹고 싶댔다. 그러니까 햄버거 같은 거. 나도 이상하게 요즘 딱 햄버거가 먹고 싶었는데! 우리는 햄버거를 맛있게 먹고 다시 용두암을 거쳐 해안도로를 시계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오호! 오토바이 처음 탄다!
평소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다 아슬아슬했다.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지, 싶었다. 특히 뒤에 탄 사람이 더 위험해 보였다. 그런데 내가 지금 식이 뒤에 매달려 달리는 중이라니.
제주엔 스쿠터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이 많다. 듣기로는 자동차보다 렌트비도 더 비싸다던데, 아무래도 스쿠터만의 맛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찾는 것일 테지? 그 맛이 뭘까?
처음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긴장만 됐다. 이러다 혹 사고라도 나는 거 아닌가 싶어, 식이에게 천천히 가라, 조심해야 한다, 급발진하지 마라, 급정차는 더 안 된다 등등 쉴 새 없이 주문을 외웠다. 마치 내가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있다는 듯이 좌우를 다 살피고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봐주는 등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뭔가, 보호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차도를 달릴 땐 언제나 갑옷 같은 자동차 속에서 안전하게 앉아 있었는데, 갑옷 없이 오토바이 위에 앉아 있자니 몸만 가린 내 옷가지가 너무 허술해 보였다. 차도 한 가운데에 자동차들과 함께 정지해있는 기분도 묘했다. 다 처음이라 이런 거겠지만, 암튼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너무 수선을 떨었던 걸까. 급기야 식이가 말한다.
"제발 나를 믿어줘요. 조심히 갈게요. 지금 누나 때문에 속도도 거의 안 내고 있단 말이에요. 나 오토바이 탄 지 오래됐어요. 어? 그런데 누나 지금 웃고 있는 거에요? 지금 기분 좋죠?"사실 기분이 좋긴 했다. 차를 타고 달리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기분. 세상의 바람이 다 내게로 쏟아져오는 기분. 강아지들이 차창으로 얼굴을 내밀고 마냥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 바람이 두두두두 소리를 내며 식이와 나를 스쳐갔고 나는 무거운 갑옷을 벗고 세상에 활짝 공개된 채로 실컷 바람을 향유했다.
오토바이가 좋은 점은 동네 구석구석을 다리로 걷는 것 보다 더 빨리 훑어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식이와 나는 둘 다 조그만 동네에 들어가 이곳저곳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한 데 모여 있는 카페들보다는, 소박한 동네를 거닐다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예쁘장한 카페가 더 좋았다.
함덕 해변 쪽으로 달리면서 들른 신촌리에서는 집 밖에 놓여있는 대여섯 개의 소파들이 눈에 들어왔다. 버려진 소파 같지는 않았고, 동네 주민들이 모여 앉아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를 할 것 같은 소파였다. 소파를 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해안선 모양을 따라 동네 구석구석을 꼼꼼히 훑으며 달리고 달려 삼양검은모래해변에도 잠깐 들렀다가 함덕 해변에 도착했다. 해변 주차장에 오토바이를 세운 뒤 먼저 서우봉에 올랐다. 오르기 싫다는 식이를 끌고 억지로 오른 서우봉에선 함덕 해변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계단에서는 의미 있는 문구를 만나기도 했다. 아, 이게 여기에 있던 거구나.
남원읍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맥주를 마셨던 주신 언니가 헤어진 뒤 보내준 사진이 한 장 있었다. 사진에는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다'라고 쓰인 문구가 있었고, 그 배경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바로 이 목재 계단이었다. 이제야 알게 된 셈이다. 주신 언니도 여기 서우봉에 올랐었다는 것을.
주신 언니는 왜 이 문구를 내게 보내줬을까. 이 문구가 여행하는 여행자의 발끝에 가장 어울리는 문구라고 생각했던 걸까. 나는 이 문구를 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나이다'라는 이 생각이 수많은 여행자들을 세계 속으로 밀어 넣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여행길에 오르기 전의 나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걸지도.
서우봉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온 뒤 다시 둘레길을 걸은 후 바다가 보이는 지점에 서서 함덕 해변을 내려다봤다. 협재 해변과는 달리 이곳엔 해수욕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20대 초반 남자 일곱여덟 명만이 괴성을 지르며 온 바다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로에게 물 폭탄을 쏘고, 넘어뜨리고,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둥 신나게 뛰어노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 나도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다가 바다에 풍덩 빠지고만 싶었다. 식이도 그 사람들이 부러웠나 보다. 해변이 너무 아름답다면서 내일이고 모레고 다시 올 거라고 말했다.
"스노클링 장비 가지고 와서 바다에서 좀 놀아야겠어요.""오~재미있겠네요.""누나도 같이 올래요?""아니요~. 난 남은 며칠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요."바다를 전세내고 있는 그들을 한참 구경하다 서우봉을 내려왔다. 이후 우리는 함덕포구, 동문시장에 들렀다가 저녁으로 같이 치킨을 먹고 헤어졌다. 식이와는 마지막 날 다시 만나 함께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으니 벌써 헤어짐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겠지? 대신 다신 만날 일이 없을 오토바이를 툭툭 건드리며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 또 오토바이 탈 일은 없겠지?
제주에 운면면허증 따러 온 중국인 리지 게스트하우스로 들어서는 내 등 뒤로 제주의 어둑한 저녁이 시작되었다. 씻은 후 2층 카페에 앉아 창 밖을 좀 보다가 잠이 들면 완벽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방에 들어서자 이미 두 명의 룸메이트가 들어와 있었고, 씻고 다시 들어오니 이번엔 한 명만 남아 있었다. 여리여리하고 예쁘장한 외모의 그녀는 본인을 중국인이라고 소개하며, 리지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도 내 이름을 말해줘야지.
"보라고 불러."짐을 정리하며 리지에게 말을 붙였다.
"여행하러 온 거야?""아니, 운전면허증 따러 왔어.""운전면허증? 그걸 왜 여기서 따?"난 상하이에서 사는데, 거기선 운전면허증 따는 데 무지 오래 걸려. 시험 한 번 떨어지면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해. 그런데 난 급히 운전면허증이 필요했거든. ""그렇다고 어떻게 한국에 와서 딸 생각을 했어?""알아보다 보니까 한국에선 운전면허증 따기가 쉽고 또 빠르게 딸 수 있다고 하더라고.""여기에서 운전면허증을 따면 그걸 상하이에서 쓸 수가 있어?""응. 간단한 절차만 밟으면 돼."처음 듣는 이야기였고, 세상엔 참 많은 꼼수가 만연하고 있다는 걸 다시 실감했다. 리지의 운전면허증 이야기엔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리지마저 이상한 건 아니었다.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고 또 은근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리지와 며칠을 함께 하며 조금씩 나눠 들은 이야기로는, 한국에 있는 브로커가 중국인들을 여러 방면에서 도와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명의 한국인이 여러 명의 중국인을 전담하고 있다고 했다. 리지랑 있다 보면 가끔 그 한국인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메시지는 주로, 오늘은 운전면허장으로 몇 시까지 오라는 내용이었다.
제주에서 돌아와 기사를 찾아보니 한국에서 속성으로 면허를 따고 간 사람들이 중국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한국 운전면허 시험이 너무 쉬어 막상 따도 운전을 제대로 못해 교통사고를 자꾸 낸다는 게 중국의 말이었다. 그래서 이젠 중국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 면허증을 인정하지 않는 곳도 생겨나고 있었다. 너무 쉽게 운전면허증을 내주는 한국도 문제고, 운전면허 하나 따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중국도 문제고, 뭐 다 문제인 것 같다.
집을 정리하며 리지와 더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그냥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 먹었다고 하면 무슨 밥을 먹었냐, 맛있었냐, 하는 둥 뻔한 질문들을 던져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리지는 오후 9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아직 밥을 안 먹었단다. 아까 들어왔을 때 봤던 한국인이 친구랑 돌아오면 같이 먹을 생각이란다.
벌써 아홉 시가 넘었는데, 뭘 더 기다리냐 싶어 나는 리지에게 그냥 나랑 같이 나가서 먹자고 했다. 내게 피해주기 싫다며 극구 사양하는 리지에게 그럼 앞 편의점에 가서 라면을 사와 먹겠냐고 다시 물었다. 라면이 뭔지는 알지? 응. 리지는 그건 좋다고 했다. 편의점에 같이 가서 라면과 삼각김밥을 샀고, 리지는 고맙다며 내게 캔맥주를 사줬다.
자기는 술을 못 마신다면서 캔맥주를 내미는 리지에게 몇 번 사양의 제스처를 보냈지만 맥주를 보자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는 같이 게스트하우스에 마련된 카페로 와 한 명은 라면을 먹고 한 명은 맥주를 마셨다.
중국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나는 그냥 우선 아는 얘기를 꺼냈다.
"상하이는 공기가 괜찮아? 베이징은 장난 아니라던데."리지는 웃긴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킥킥거리다가 대답했다.
"베이징만큼은 아니지만 상하이도 공기가 나빠."리지는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했다. 원래는 외국계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아이를 낳아 지금은 육아휴직 중이란다. 아이 때문에 더는 회사를 못 다닐 것 같아 프리랜서로 전향할 계획인데, 프리랜서로 일을 하려면 차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육아휴식 기간 내에 운전면허증을 따야해서 급히 제주로 오게 된 거란다.
리지는 책 읽는 걸 좋아한다고도 말 했다. 책?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쁘다. 나는 나도 책 읽는 걸 좋아한다며 기쁘게 맞장구 쳤다. 그러자 리지는 내게 혹, 작가냐고 물었다.
"응? 아니? 그런데 내가 글을 쓰고 싶어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흐흐. 신기하네."리지는 내 얼굴이 작가같이 생겨서 그렇게 물었다고 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작가 같이 생긴 얼굴은 뭐지. 인생이 다큐멘터리였던 것 같이 생긴 얼굴이라는 건가. 어찌 됐건 왠지 칭찬의 말 같아 나는 리지가 급 좋아졌다.
맥주를 마시며 리지와 이야기를 하는 데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만큼 신이 났다. 우리는 서로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를 상대에게 말해주었다. 같은 작가라도 서로 다른 이름으로 알고 있어 위키백과를 이용해야 했다.
리지는 먼저 나츠메 소세키를 좋아한다고 했다. 나더러 아느냐고 해서 나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었다고 말했다. <도련님>도 읽어 봤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련님을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그냥 말았다.
리지는 도스토예프스키도 좋아한다고 했다. 그중 'The idiot'을 좋아한다는 데 아마 <백치>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리지는 본인의 책 읽는 스타일을 '올드 스타일'이라고 했다. 현대 작가보다는 예전 작가를 더 좋아한다고. 실제로 리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내게 공이 굴러왔다. 나도 좋아하는 작가를 대야 하는데 좋아하는 작가가 한둘이 아니니 누굴 먼저 대야 할지 고민이 좀 됐다. 우선, 헤르만 헤세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댔다. 리지는 헤르만 헤세는 알았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모른다고 했다.
"조르바. 조, 르, 바. 몰라?""응, 모르겠어."자기가 좋아하는 작가 이름을 대며, 그 작가를 왜 좋아하는지 이야기하며 우리는 오후 11시가 넘도록 잠에 들지 않았다. 남은 며칠을 함께 할 좋은 동무를 만난 듯했다.
덧붙이는 글 |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