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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교수(성공회대)는 "지금 정부가 국가 정체성을 강조하고 제헌절을 내세우고 있지만, 국정화 역사 교과서라도 제헌 헌법 내용은 싣지 않을 것 같다"며 "제헌 헌법의 기본정신은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이지 적어도 양극화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통합진보당 강령이 '종북'이라며 해산까지 했는데, 제헌 헌법 내용을 보면 통합진보당보다 더 새빨갛다"며 "가령 제헌 헌법에서는 노동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뿐만 아니라 '노동4권'이라 하여 '이익분배 균점권'까지 담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또 그는 "제헌 헌법에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고 되어 있다. 지주를 보호해 줄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김성수가 반대했으면 이 조항이 들어갈 수 없었다. 그때 민중의 힘이 있었기에 설득이 되었던 것"이라며 "진보 아젠다의 99%가 제헌 헌법이고, 기본정신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였다"고 말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지난 20일 저녁 창원노동회관 대강당에서 "영화 <암살>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본 한국 현대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지난 20일 저녁 창원노동회관 대강당에서 "영화 <암살>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본 한국 현대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 윤성효

한 교수는 지난 20일 저녁 창원노동회관 대강당에서 민주노총 경남본부 초청으로 "영화 <암살>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본 한국 현대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제헌 헌법을 설명하면서 그는 "우리 헌법의 혈통이 진보적 민주주의인 것"이라며 "그런데 수구 보수세력은 헌법의 애미·애비도 모르고, 헌법을 뒤틀어 국가보안법으로 전락시켰다"고 말했다.

"국정화 문제는 역사적 아버지가 누구냐를 두고 싸우는 것"

한홍구 교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육군본부에서 <한민족의 용틀임>이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의 역사 인식이 딱 그 정도다"며 "그분들은 현대사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역사 지식은 70년대 말 내지 전두환 정권 때 국정교과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들은 4․3항쟁이나 '반민특위', '민간인 학살', '민주화운동'을 배운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내가 모르는구나' 하고 반성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북한 교과서를 베낀 것'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라 덧붙였다.

한 교수는 "박정희가 친일파라고 하면 중앙정보부에 불려갔다. 60년대 '박영만'이라는 사람이 '박정희는 친일이 아니라 비밀광복군이었다'는 내용의 책을 만들었는데, 그때 박정희가 그 책을 집어 던졌다고 한다"며 "그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가나 친일파들이 생존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책이 나오면 박정희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망신 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라 설명했다.

이어 "지금은 친일파가 다 죽었다. 유신 때 교과서에는 친일은 안 나왔지만 그렇다고 미화하지는 않았다"며 "그런데 뉴라이트는 친일을 감추는 게 아니라 대놓고 미화하는 것이다"고 덧붙였다.

그는 "뉴라이트 토론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그들은 '친일파'는 편향된 것이라며 '신문화를 받아들인 아버지'라 하더라"고 말했다. 이어 "그래서 그들은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고 했다. 역사적 아버지는 독립, 통일, 민주화운동을 한 분들이라 했다. 지금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역사적 아버지가 누구냐를 두고 싸우는 것"이라 설명했다.

또 그는 "얼마 전 새누리당 염동열 국회의원이 손석희 앵커(JTBC)와 대담을 하는데, 손 앵커가 '국정 교과서를 쓰는 선진국은 없다'고 하자, 염 의원은 '러시아와 필리핀, 베트남이 쓴다. 특히 북한도 쓰고 있다'고 말했다"며 "북한이 하니까 우리도 따라 하자고 한 것이다. 그게 종북 아니냐"고 말했다.

한홍구 교수는 "최고 권력자와 역사 기록자가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했던 적이 있나. 연산군 이후 처음이다. 조선 임금도 실록과 사관은 바꿀 수 없었다"며 "성경 말씀도 4종류인데 어떻게 역사가 하나일 수 있나. 노동자와 자본가가 기억하는 70년대가 어떻게 같을 수 있나. 지금 정부가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것은 힘없는 사람은 입 다물고 있으라는 것"이라 말했다.

영화 <암살>이 우리에게 던져준 것은?

강연에서 영화 <암살>과 관련한 설명을 이어갔다. 한홍구 교수는 "영화가 크게 기여한 바는 독립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끔 해주었다는 것"이라며 "안옥윤의 실제 모델로 꼽히는 '남자현'은 손주까지 있는 할머니로 암살단에 나섰고, 좌파에서 대표적인 '김명시'는 조봉암과 어깨를 나란히 한 혁명가였으며, 우파에서 대표적인 '정정화'는 해방 뒤 살아서 돌아온 여성 중 가장 세게 독립운동에 몸담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암살>과 관련해 많이 묻는 물음 가운데 하나가, 1933년 경성에서 정말 저렇게 총격전을 벌였느냐는 것"이라며 "1930년대는 영화와 같은 활극은 없었지만, 1920년대 의열단은 여러 번 경성 시내를 들었다 놨다. 독립운동 탄압의 상징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대와 전설적인 400대 1의 혈투를 벌인 김상옥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이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사람이 1만3000명이 넘는데 그중 여성은 300명이 되지 않는다. 광복회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을 약 15만 명으로 추산한다"며 "우리가 그 이름을 기억하여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그의 1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또한 밀양 출신 '김원봉'을 소개했다. 한 교수는 "영상을 보면 백범(김구)이 '집에 가자'를 외치는 청년들을 뒤로하고 옆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김원봉이 작은 술잔에 술을 따르고 촛불에 불을 붙이며 먼저 간 동지들을 추모하고 있다"며 "너무 많이 죽은 동지들에 대한 미안함을 뒤로하고 김구와 김원봉은 살아서 고국 땅을 밟았다"고 말했다.

이어 "김원봉이 고향 밀양을 찾던 날, 밀양사람 전원이 거리를 메워 차가 갈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에서 폭탄만 터졌다 하면 김원봉이 보낸 사람이었기에 김원봉에 대한 현상금은 천정부지로 올라갔었다"며 "김구, 김일성, 여운형, 안창호도 다 일본이나 중국 관헌에 체포된 적이 있지만, 김원봉은 단 한 번도 체포된 적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해방 이후 김원봉은 어떠했을까. 한홍구 교수는 "김원봉이 해방된 조국에서 노덕술(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 따위에게 잡혀가 고문을 당했고, 풀려난 김원봉은 의열단 동지 유석현의 집에 가 사흘을 대성통곡했고 남북협상 길에 북으로 가 돌아오지 않았다"며 "고향에 남은 조선 최고의 독립운동가 가족들은 월북자 빨갱이 가족이 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친동생 셋과 사촌 다섯이 빨갱이로 학살당했다"고 말했다.

한홍구 교수는 "독립운동한 사람은 이후에도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하고, 나라 팔아먹은 사람은 이후에는 독재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또 그는 "해방 뒤 친일파는 목숨을 걸었고, 일반 국민은 가만히 있었다. 친일파들이 저지른 '반민특위 해체'와 '국회 프락치사건', '김구 암살'로 그 좋았던 제헌 헌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국가보안법과 친일파가 득세했다"고 말했다.

이승만에 대해 한 교수는 "전쟁이 나니까 한강 다리를 끊어버리며 국민한테는 생업을 하라 해놓고 자신은 도망갔다"며 "수구 보수세력은 그를 '국부'라고 하는데,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자식을 버리고 자신만 살겠다고 도망을 가느냐"고 말했다.

여러 독립운동가를 소개한 그는 "독립운동가들이 쓰던 편지가 왜 국어 교과서에 실리지 않느냐, 그들이 불렀던 노래가 왜 음악 교과서에 실리면 안 되느냐, 그들이 그렸던 그림이 미술책에 실린 것을 본 적이 있느냐"고 말했다.


#한홍구 교수#암살#역사교과서 국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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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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