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를 내다 놓고 잠시 편의점에 들렀다. 집에 가져갈 제주 생막걸리를 사기 위해서였다. 편의점에서 막걸리 세 통을 사 봉지에 하나씩 담아 꽁꽁 묶었다. 터지더라도 사방으로 내뿜어지지는 않길 바라며.
소심한 나는 혹시 몰라 어제 항공사에 전화까지 해본 터였다.
"저 말씀 좀 여쭐게요. 비행기에 막걸리 들고 타도 되나요? 액체인데?""국내 여행은 괜찮습니다.""아, 네."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사장님께 택시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배웅을 하러 나와있는 리지와는 깊게 눈인사를 했다. "상하이에 꼭 놀러와, 우리 집에서 자면 되니까"라고 리지는 말했다. 나는 "응"이라고 대답했다. 아쉽게도 택시가 너무 금방 온다. 사장님은 즐거운 여행이었길 바란다며 손수 캐리어를 옮겨 주었다. 지나온 모든 게스트하우스 사장님들에게 인사를 하는 마음으로 고맙다고 말한 후 택시를 탔다. 오늘은 집에 가는 날이다.
왜 이렇게 빨리 온 걸까. 수속까지 다 마치고 게이트 앞에 앉았는데 시간이 한 시간 반이나 남아 있다. 식이는 출발 시간에 간당간당하게 맞춰 도착할 것 같다고 연락이 왔다. 혼자 뭐한담.
하릴없이 공항을 왔다 갔다 하다 구석 자리에 앉았다. 하나, 둘 사람들이 의자를 채워간다. 함께 제주를 떠나게 될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소설 <남쪽으로 튀어!>에서 우에하라의 대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책에서 우에하라 가족은 도시 생활에 질린 나머지 남쪽 섬으로 이사를 온다. 오키나와보다도 더 아래쪽에 있는 이리오모테 섬. 이 섬에서 터를 잡고 자급자족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려던 우에하라는 어느 날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낙원을 추구해. 단지 그것뿐이야."우에하라가 남쪽으로 튀어 이리오모테 섬으로 들어간 이유는 그곳이 낙원이라서기 보다는 그곳에서는 낙원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제주를 찾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
제주는 낙원이 아니다. 제주엔 사람이 있고, 삶이 있고,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고, 또 지금껏 제주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가 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게 제주는 낙원 같은 곳이다. 바다가 있고, 오름이 있고, 바람이 있고, 멈춤이 있는 곳이니까.
도시 생활에 환멸이 느껴질 때, 저절로 떠오르는 낙원이 내겐 제주도이다. 그곳에 가면 조금은 괜찮아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하는 낙원. 훌쩍 떠나고 싶은 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게 해주는 낙원.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해주는 낙원. 낙원을 꿈꾸는 우리에게 낙원이 되어주는 제주.
그런 제주를 떠나는 오늘, 나는 제주를 더 좋아하게 됐다고 느낀다.
게이트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들어가기 시작했다. 헐레벌떡 뛰어온 식이는 우선 늦게 와 미안하다고 말한 뒤 먹을 게 좀 없는지 묻는다. 나는 가방 속에 하나 남은 초콜릿바를 떠올리며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착하게 살자는 마음에 그냥 꺼내 주었다. 울산에 살면서 서울에 있는 이비인후과를 다니고 있는 신기한 식이와 비행기로 함께 들어섰다. 한 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
[에필로그] 한 달 동안 지내고도 다시 제주로2015년 5월에서 6월까지, 30일간 여행했던 제주에 대한 기록이 끝났다. 처음엔 여행기를 마무리하는 데 3개월이면 충분할 줄 알았다.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일이 뭐 그렇게 어려울까 싶었다. 그런데 어려웠다! 너무나도. 그래서 나중에는 제발 마무리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겨우 하루치, 또 하루치의 글을 채워나갔다.
재미있고, 유쾌하고, 소소하게, 그리고 읽는 누구나 피식 웃을 수 있는 글을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것 같지는 않다. 글은 마음먹은 대로 써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대학교 1학년 땐가 아빠의 꼬임에 넘어가 연습도 하지 않고 5km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후로 처음 참가한 거였다. 그때는 5km 내내 걷기만 했는데, 이번에는 제주도에서의 훈련을 바탕으로 걷지 않고 내내 달릴 수 있었다. 10km 완주 기록은 1시간 2분. 처음 참가하는 거라 난 이게 좋은 기록인지 별 볼일 없는 기록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완주했다는 게 기쁠 뿐!
6월에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 나는 당분간, 그러니까 적어도 1, 2년 안에 제주를 여행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난 10월, 언니가 슬쩍 이렇게 묻는 것 아닌가.
"보름아, 너 제주여행… 또 갈래? 아니… 언니가 애기 낳고 움직이질 못했더니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서 어디든 가고 싶은데 또 멀리는 못 가잖아. 너가 올해 제주를 갔다 왔다는 건 나도 알지. 그것두 한 달간이나. 이제 제주엔 가고 싶은 곳도 없을 거야. 그래도 언니는 너랑 같이 가고 싶은데... 어때?"운전사가 필요했던 언니는 내게 운전을 해줄 수 있겠냐는 말을 이런 식으로 물은 거였고, 나는 언니의 말을 듣자마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놀랄 만큼 강렬히. 여름의 제주와 가을의 제주는 분명 다를 것이고, 무엇보다 귀여운 조카의 첫 여행에 나도 동행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10월 19일, 3박 4일 일정으로 엄마와 언니, 나, 조카가 함께 제주로 여행을 떠났다. 오름도 오르고, 물회도 먹고, 함덕 해변도 또 가보고. 에코 랜드, 곽지해변도 가봤다. 조카와 함께 했던 4일 내내 웃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아무리 좋았다고는 하나, 나는 이번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당분간은, 그러니까 적어도 1, 2년 안에 제주를 또 여행할 일은 없겠지? 그렇겠지? 설마~
* 그동안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로요, 정말!
덧붙이는 글 |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