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 일곱감정'(七情)은 청년이 느끼는, 기쁨·분노·사랑·즐거움·슬픔·미움·욕구를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보듯 살펴봅니다. 남의 이야기도 듣고 제 이야기도 해봅니다. 심심하면 서평도 써보고요. 꼭 순서대로 다루라는 법은 없겠죠? - 기자 말사이버 공간에서 활동하는 청년 중 무작위로 딱 셋을 붙잡았다. 양해를 구하고 전화번호를 얻은 뒤, '자신을 스스로 어떤 세대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해봤다.
손정만씨(가명·대학생·20) : "'치킨 세대'요. 기념일과 주말·불금을 축하할 만한 음식으로 더는 치킨 이상의 것을 바랄 수 없는 거 같아요."
황성필씨(대학생·28) : "평범함을 강요받는 세대죠. 우리 세대는 어려서부터 우리가 받는 교육 정책에 대해 목소리를 낼 기회부터 뺏겼어요. 대학에 왔고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라고 해봤자, 기존의 틀에 맞춰져 체화된 게 있는데 쉽게 바뀌지 않죠. 익숙한 대로 취업준비밖에 할 수 없고, 사회 풍조가 이러한 인간상을 자꾸 강요하고 있습니다."
하가희씨(취업준비생·28) : "거의 자포자기한 세대요. 일본 사토리 세대와 비슷하기도 한 데 또 다르기도 해요. '헬조선'(지옥+조선)이라 해서, 저항의 목소리도 삐죽삐죽 튀어나와요. 하지만
꼭 헬조선이란 말에 모두 공감하는 건 또 아니에요. 사람마다 차이가 있죠."점차 변화하는 '은둔형 외톨이'
중국에 바링허우 세대가(80년대 출생자) 있다면 일본에는 사토리 세대가 있고, 한국의 2030은 사토리 세대와 곧잘 비교된다. '사토리'는 일본 전설에 등장하는 깨달음을 얻은 원숭이를 말하며, 상대의 생각을 미리 읽어낼 정도로 눈치가 빠르고 적개심을 감지하면 도망을 친다고 전해진다. 사토리가 산속에 살듯, 사토리 세대도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가 되기 일쑤이며 해탈한 수도자처럼 욕구가 적고 출세나 소비에 관심이 적다.
그래서 한국의 'N포 세대'(인간관계·취업·연애·결혼·출산·내 집 마련 등 '포기'한 게 너무 많아 셀 수가 없는 젊은층)와도 자주 비교된다. 하지만 이 자포자기처럼 보이는 현상은, 개인이 '선택 가능한' 문제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대처하는 자세에 가깝다. 명문대 입학은 철 지난 코스고, 직장은 늘 잘릴 수 있고 간섭과 업무량에 비교하면 보상은 적다.
사토리가 출세보다는 피드백이 빠르고 업무 분위기도 자유로운 편인 '프리터'가(프리랜서+아르바이트) 되기를 더 선호하는 이유다. 물론 한국 청년들에게는 이조차도 꿈같은 이야기다. 프리터 생활이 가능해지려면 실질최저임금이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한다. 하지만 '2015 한국노동연구원 해외노동통계'에 따르면, 2013년 한국의 실질최저임금은(PPPs) 시간당 5.30달러로, 일본의 6.70달러에 못 미친다(관련 기사 :
돈 안 푸는 기업, 노동자에 '고통 분담' 말하는 정부).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에서, 사토리들의 특징을 '지금 여기'에 충실한 삶으로 꼽았다. 어릴 때부터 불확실해 왔던 미래에 굳이 힘을 쏟기보다, 현재에서 행복을 찾는 걸 '효율적'이라 본다는 것. 하지만 최근 이 경향은 변화로 흔들리고 있다. 히키코모리처럼 의기소침하던 사토리들이 웬일인지 집 밖으로 나오고 있다.
이런 변화에는 두 사건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그리고 지난 9월 아베 정권이 평화헌법 제9조의 해석을 바꿔 집단 자위권을 인정한 안보법 통과 강행 사건이다.
이때 '실즈'와(SEALDs: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 긴급 행동) 같은 청년 단체들은, '재밌는 데모'와 '감각적 선전'을 추구하며 사회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청년 활동지원가 사토 요사쿠는 지난 11월 25일 <한겨레21>을 통해, 이 변화에 대해 다음처럼 의견을 밝혔다(관련 기사 :
N포 대신 N 저항을).
"자연재해와 인재(人災)가 더해져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데다, 경제적 번영은 물론이고 '전쟁 없는 나라'도 누릴 수 없다는 위기감까지 덮쳤다. … 청년들이 충격받고 … 현실에 무관심하고 비정치적이었던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 몸으로 느끼는 것 같다. 이념이 아니라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거다."이 말은 곱씹어 볼 만하다. 현재 '주어진 조건'을 담대하게 거부할 수 있게끔 하는 원동력은 이념과 본능 중 어디에 가까울까. 정신분석학자들은 후자 쪽의 손을 들어주며, 사람에게는 '자궁 회귀본능'이란 게 있다고 설명한다(<정신분석학 입문>). 인생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생존·미래 개척 의지가 약해지면, 곧잘 '과거의 안락한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는 것. 그렇다면 사토리들에게 '집'이란 무엇이었을까.
아마 포근한 어머니의 자궁을 대체하는 사회문화적 의미의 장소에 가깝지 않았을까. 하지만 동일본 대지진 당시 사토리들은 '집도 안전하지 않다'는 충격을 경험했고, 아베 정권은 여기에 2차적 심리 충격을 가했다(산부인과학적으로도 산모의 자궁에 충격이 가해지면, 조산(早産) 위험이 크다). 사토리들은 '살기 위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변화가 가능했던 경위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지점이다.
'이불 밖은 위험해!', '안녕하새오' 시리즈가 말하는 것
자궁 회귀본능은 물론 한국 청년들에게도 관측된다. 현재 인터넷에서 유행 중인 '이불 밖은 위험해' 시리즈란 게 흥미롭다. 각종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게시판에, 이불에 덮인 반려동물이 고개만 빼꼼히 내민 사진을 찍어 올리고 '역시 이불 밖은 위험해!' 하고 글을 적는 식이다. 반려동물을 의인화시켜 메시지를 '대신 말하게 시킨다'는 특징도 눈길을 끈다.
'이불 밖은 위험해' 시리즈의 발흥 시점과 원출처는 소문만 무성하다. 지난여름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메르스'(중동 호흡기증후군·MERS)가 기승을 부렸을 때였다는 말도 있고,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의 등장인물 오 박사의 '밖은 혼자 다니기엔 위험하단다!'라는 대사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라는 속설의 연장 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이불 속은 안전한 걸까.
아직은 안심하는 청년들과 그러기 힘든 청년들 중간 어디쯤. 거기에도 많은 청년이 위치할 것이다. 다만 '이불'이 넓은 의미에서 일상을 상징한다면, 청년들이 느끼는 '이불의 위기'(일상의 위기)는 점점 심화하고 있다. 지난 11월 27일 김지수씨는(대학생·21) 자신의 SNS에 공개한 '안녕하새오?' 시리즈 패러디 네 컷 만화가 대표적이다.
이 독특한 '새오체'의 원조는 온다 리쿠 작가의 <나와 춤을>에 실린 '충고'라는 단편 소설이다. '충고'는 존이라는 반려견이 어설프게나마 글을 쓸 수 있게 됐다는 콘셉트의 이야기로, 존이 주인에게 닥쳐올 위험을 말로 알려주며 은혜를 갚으려 한다는 내용이다. 김씨의 네 컷 만화에도, 김씨 '대신 말해주는' 한국사 교과서·컵라면·통장·죽창이 등장한다.
김씨는 "아직은 민중총궐기와 같은 집회가 청년들의 감수성과는 거리감 있는 분위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교과서 이슈도 대학생들에게는 큰 일상의 문제로 와 닿지 않을 수 있어서, 우선 잘 와 닿게 표현해보려고 다양한 소재로 메시지를 전해봤다"고 콘텐츠 제작의도를 밝혔다.
작가가 이렇게 무정물에 인격과 생명력을 실어 넣는 문학 기법을 '활유법'이라고 한다. 활유법 자체도 상당한 상상력을 요구하지만, 네 컷 만화에 드러난 문제의식도 현재 청년들이 어떠한 '일상의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는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표현이 한층 적나라해진다면, 이제 사이버 공간 어디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헬조선'(지옥+조선), '지옥불반도'(지옥+한반도)를 떠올리면 된다. 한반도가 불타고 있다는 재앙(災殃) 콘셉트부터가 위기의식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만큼 청년들의 위기감은 고조되고 있다(관련 기사 :
'헬조선' 최후의 탈출구 죽창은 분풀이에 불과할까). '한국 사회는 헬조선이다'라는 위기감을 모든 청년이 체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가 있는 맥락을 더 많은 청년이 공유해가고 있단 건 부정하기 어렵다.
나날이 심화하는 부의 양극화 추세를 꼬집는 '수저 계급론'(금수저 대 흙수저)은 경제 불평등 지표들을 통해, 이미 사실로 확인됐기 때문이다(기사 아래 '덧붙이는 글' 참조). 계급론의 확장성이 한풀 꺾일 수도 있지만, 한국의 제론토크라시(노인 정치)와 학벌주의를 꼬집는 방향으로 확장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토리 세대'가 거리로 뛰쳐나왔다면, '헬조선 세대'가 그러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아직은 자신들이 느끼는 위기감을 패러디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도 분명 변화는 보인다.
참고한 자료 |
<정신분석학 입문/꿈의 해석>(프로이트 / 동서문화사 / 2007 / 1만6000원)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후루이치 노리토시 / 민음사 / 2015 / 1만9500원) <하류지향>(우치다 타츠루 / 민들레 / 2013 / 1만2000원) <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 2015 / 1만2000원) <'헬조선' 최후의 탈출구 죽창은 분풀이에 불과할까>(하지율 / 오마이뉴스 / 2015.9.24) <N포 대신 N 저항을!>(황예랑 / 한겨레21 / 2015.11.25) <[김호기의 원근법] 밀레니얼, 사토리, 바링허우>(김호기 / 한국일보 / 2015.11.5) <한국에서의 부와 상속>(김낙년 / 낙성대연구소 / 2015.11.16) <한국의 부와 불평등, 2000-2013: 상속세 자료에 의한 접근>(김낙년 / 낙성대연구소 / 201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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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동국대 김낙년 교수는(경제학) 10·11월 경제적 불평등 이슈 관련 보고서를 발표했고, 다수의 매체는 이를 수저 계급론과 연관지어 보도했다. 보고서는 한국은 '상위 10%가 전체 부(富)의 66%나 차지하는 반면 하위 50%는 2%만 차지한다', '1980년대 재산에서 증여·상속이 차지하는 비율이 27%였다면, 2000년대는 42%로 증가했다' 정도로 요약된다. 한국 사회가 노력 만으로 계층 이동이 가능한 것으로 보기 어려워지고 있어, 수저 계급론은 더욱 설득력을 얻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