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8일, 이른 아침 탄자부르에서 폰디체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탄자부르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을 지나 폰디체리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시바신 축제로 어젯밤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던 브리하디스와라 사원은 고요하기만 했다.
폰디체리(Pondicherry, 불어 퐁디셰리)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의 촬영 배경이 된 곳으로 익히 알고 있다. 나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면서 그 배경에 나오는 폰디체리를 꼭 한 번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파이의 고향으로 달려가는 버스 안에 차창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이 설렜다.
버스 운전사의 말로는 탄자부르에서 폰디체리까지 약 7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버스가 탄자부르 도심을 벗어나자 벼가 자라고 있는 푸른 들판이 나왔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풍경이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문득 여행을 떠나기 전 어지러웠던 서울 생활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정말이지 마음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차차 마음의 평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래 떠나오길 잘했어. 차창을 통해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나는 <웰컴투오로빌>이란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물질적인 부와 사회적 지위로 인한 가치보다 각 개인의 장점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일은 생계를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 봉사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고 능력과 가능성을 발굴하는 도구로서 존재하며, 결과적으로는 각자에게 생계와 전공분야를 제공할 것입니다. 요약해서, 이곳은 거의 오로지 경쟁과 싸움의 논리에만 근거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향상과 협력을 위한 선의의 경쟁관계, 진정한 형제애가 대신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1954년 8월, 마더, 어 드림 중에서)."정말 지구상에 이런 곳이 있을까? 믿을 수 없지만 남인도의 오로빌이 바로 그런 곳이란다. 태양열로 밥을 지어 먹고, 유기농업, 대체요법 등 생태적 기술부터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법까지 다양한 가르침과 배움이 끊임없이 교환되는 곳, 돈 때문에 일하지 않고 그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곳, 무상급식에 무상교육을 받는 마을, 화폐의 교환이 없는 마을.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삶이다. 서울은 숨이 가픈 도시다. 사람들 모두가 숨이 차서 헉헉 거리는 도시다. 나 역시 그랬다. 이번 여행은 너무나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해서 떠나온 여행이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여행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은 지금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2014년 2월 16일, 아이들이 살고 있는 전세로 살고 있던 봉천동 아파트에서 남양주시로 쫓겨나듯 이사를 했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이사를 한 지 일주일 뒤에 배낭을 메고 남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서울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봉천동으로 아파트 전세를 얻어 이사를 간 것은 2012년이었다. 두 아이들 다 직장이 봉천동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봉천동에서도 전셋값이 싼 곳을 찾다보니 서울대입구역이라든지 지하철역과 가까운 곳을 얻지 못하고 봉천고갯길 위치한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를 고르게 되었다. 봉천동 1번지는 봉천동에서도 가장 높은 곳이다.
비록 낡은 아파트지만 거실에 앉으면 관악산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은 곳,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올망졸망 내다보이는 곳. 또한 이곳은 봉천동이 낳은 소설가 조경란씨가 소녀시절 옥탑방에서 소설가의 꿈을 키우며 살았다는 달동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재개발되어 그 달동네는 20년 전에 사라지고 거의 아파트가 건설되었다.
그 아파트에서 아이들이 전세를 산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날, 집주인으로부터 전화 한 통화를 받았다. 내용은 전세보증금을 5천만 원을 올려주던지, 월세를 50만 원을 주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을 하라는 것이었다.
말을 마친 집주인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세 만료일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때였다. 전세기간이 다 되어가도록 집주인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어 그 전 조건대로 그대로 연장을 해서 사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심하게 맞은 듯 통증이 오고 멍해졌다.
더구나 이사를 하기에도 힘든 가장 추운 한겨울이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후 나는 집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했다. 한 2천만 원 정도만 올릴 수 없으시냐고, 아니면 월세를 20만 원 만 받으시던지. 통사정을 해 보았지만 집주인은 막무가내였다.
기한까지 이행을 하지 못하면 집을 비워 달라는 냉랭한 목소리만 들려왔다. 그것도 시세보다 싸게 해 준 것이라고 했다. 복덕방에 전화를 걸어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날씨는 추워서 사람들의 마음을 꽁꽁 얼어 붙게 하는데, 전셋값은 열이 붙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다.
정말 기가 차고 목구멍에 가래가 끌어 올랐다. 5천만 원이란 큰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고정수입이 없는 은퇴자가 한 달에 50만 원 월세를 내기는 더욱 버거운 일이었다. 하도 답답해서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을 했다.
"으음… 그게 말일쎄. 주택임대차보호법에는 임대차기간이 끝나기 1개월 전까지 집주인이 갱신거절 통지를 하지 않은 경우에는 전 임대차계약과 동일한 조건으로 다시 임대차한 것으로 되어 있어. 또 임대보증금도 5퍼센트만 올리게 되어 있거든.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그래. 법적으로는 절대로 쫓아내지 못하게 되어 있어. 허지만 현실은 이게 잘 지켜지지 않고 있지. 가진 자들의 횡포야. 그래도 주인에게 전화를 해서 자네가 말했던 대로 좀 깎아달라고 다시 한 번 사정을 해보게나. 그렇게 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법대로 그냥 살겠다고 버텨보게.""잘 될까?""일단 내 말대로 한 번 해 보게나." 집주인은 법이 정한 둘 다를 지키지 않고 있었다. 전세 기간이 끝나기 전 20일 전의 통지, 25퍼센트의 보증금 인상.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그랬다. 나는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가 알려준 대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랬더니 집주인은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며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소리를 마구 질러댔다. 이쪽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소리만 질러댔다.
이거야 정말, 적반하장. 혹 때려다 혹을 붙인 격이 되고 말았으니. 집주인은 기일까지 무조건 집을 비우라고 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전화를 해대는 드센 집주인과 싸울 수도 없었다.
우린 할 수 없이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전세가 싼 집을 찾다보니 서울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로 눈을 돌렸다. 아이들의 직장이 멀어지지만 머리를 맞대고 아이들과 상의를 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남양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2월의 그 추운 날, 덜덜덜 떨며.
남양주는 봉천동의 전셋값에 조금만 보태면 거의 작은 아파트를 한 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부족한 돈을 융자를 받아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아예 집을 사기로 했다. 2년 후에 또 전셋값을 올려 이사를 가라는 소리를 들을 것은 생각하니 끔찍해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도농동은 아내와 내가 살고 있는 연천과는 거리상으로 상당히 가까워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추운 겨울에 쫓겨나듯 이사를 하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집주인의 매몰차고 살벌한 말에 어찌나 기가 질리던지, 날씨보다 마음이 더욱 추웠다. 이사를 해 놓고도 한 동안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아주 잘 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집주인 덕분에 우리들의 집이 한 채 생겼지 않는가? 지금은 오히려 집주인에게 감사를 하고 있다. 다행히 아이들도 지하철을 타고 먼 직장을 다니는데 적응을 잘해 주었다. 허지만 그 당시에는 아내와 나는 도저히 마음을 추스르기가 힘이 들었다.
"여보, 우리 어디 여행이나 좀 갔다 와요. 이대로는 도저히 마음을 추스르기가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사실 나도 그래요." 이사를 해 놓고 아내와 나는 괜히 억울하고 마음이 짓눌려서 그대로는 그냥 마음을 추스르고 지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항변도 하소연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디 이런 일이 나뿐이겠는가? 대한민국 사회가 총체적으로 그렇다. 천정 높은지도 모르고 치솟는 전셋값을 융자로 충당하고, 그 이자를 추가로 부담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젊은이들은 치솟는 전세자금 마련이 두려워서, 아이를 낳아 키울 육아비용이 두려워서 결혼을 자꾸만 미루고 있다. OECD 국가 중 저출산 1위, 자살률 1위, 국민고통지수 1위. 아아, 양극화 현상이 점점 더 극대화되어 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서민들은 숨이 차다!
그래서 숨이 찬 우리도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기고 했다. 여유 돈이 있어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서 여행이라도 떠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아 한 숨 돌이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어디로 갈까? 문득 나는 언젠가 <웰컴투오로빌>이란 책에서 읽었던 남인도 폰디체리의 오로빌이 떠올랐다. 그래, 거기로 가는 거야. 아내도 쾌히 동의를 했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여행 배낭을 멨다. 그리고 남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여행은 뭔가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평정을 되찾게 해준다. 어려운 고비가 닥칠 따마다 우리는 여행으로 해법을 찾곤 했다.
남인도 코친에서 시작한 우리들의 여행은 서고츠 산맥을 넘고, 마두라스를 거쳐 탄자부르에서 폰디체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북인도는 몇 차례 다녀 온 적이 있었지만 남인도는 초행길이었다. 북적거리는 북인도와는 달리 남인도의 풍경은 여유롭고 풍요로웠다. 푸른색이 많고, 어딜 가나 휴양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으며 여행을 할수록 답답했던 가슴이 점점 풀리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 갔다.
"이 지구상에 어떤 나라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하는 곳이 어딘가에는 있어야만 합니다. 선한 의지와 진지한 열망을 지닌 모든 인간이 세계의 시민으로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 지고의 진리라는 유일한 권위에만 복종하여 살 수 있는 그런 곳이 어딘가에 있어야만 합니다…… 중략……이곳에서는 일의 조직화와 봉사의 기회가 직위와 직권을 대신할 것입니다. 몸이 요구하는 것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제공될 것입니다. 전체 조직 속에서 개인의 지적, 도덕적, 영적 능력은 삶의 쾌락과 권력을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무와 책임을 위해 발휘될 것입니다(1954년 8월, 마더, 어 드림 중에서)."정말 꿈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그 꿈같은 삶이 남인도 폰디체리에 있는 오로빌 공동체에서 반세기 가까이 존재해 오고 있다. 1968년 시작되어 올해로 47년이 되는 오로빌에는 세계 40여 나라에서 온 2100여 명의 오로빌리언들이 숲속에서 큰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 폰디체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다가 보였다.
일곱 시간의 버스 여행 끝에 거의 폰디체리에 다 올 즈음, 나는 끔직한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맙소사!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한 남자가 트럭에 부딪치더니 저만큼 퉁하고 나둥그러졌다. 그리고 큰 대자로 눕더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절을 했는지 절명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트럭 운전사가 운전대에서 내려 쓰러진 사람을 흔들어 보지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부디 살아났으면 좋겠는데. 이렇듯 모든 일은 순간에 일어난다. 이 일순간에 삶과 죽음이 갈린다. 그 교통사고는 순간순간의 삶이 매우 소중하고 값진 것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글을 쓰는 순간에도 자꾸만 그때의 장면이 어른거린다.
폰디체리에 도착하니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시원스럽게 눈에 띠고, 밝은 미색의 야트막한 프랑스풍 저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가 프랑스인지 인도인지 잘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폰디체리는 인도 속의 또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르 카페', '르 클럽'등 '르'자로 시작하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거리엔 서양인 들이 많이 눈에 띄고 부유층으로 보이는 인도인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인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 유일하게 프랑스 식민지였던 폰디체리는 인도에서 프랑스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작고 아름다운 해안도시다. 많은 사람들이 폰디체리를 찾는 이유는 인도답지 않는 깨끗한 휴양지를 즐기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하나는 세계 최대의 공동체 마을인 오로빌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다. 일상의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영성 공동체 마을이인 오로빌에서 뭔가 다른 삶을 체험하기 위하여 몰려든다고 한다.
사람들은 오로빌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경쟁이 일상화된 세상을 등질 수 있는 기회를 타진하기도 하고,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른 삶을 꿈꾸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폰디체리는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도피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숨가쁜 서울을 피해서 여기까지 왔지 않은가?
폰디체리에 도착해서 우리는 먼저 바다가 바라보이는 벵골만으로 갔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파이의 가족들이 호랑이 등 동물들을 싣고 떠났던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간디 동상이 서있는 바닷가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긴 여정으로 쌓인 피로가 바람을 타고 파도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 같았다. 한동안 그렇게 넋을 잃고 바다를 바라보다가 우리는 오로빌로 갔다.
오로빌은 폰디체리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오로빌에 입구에 도착하니 푸른 유칼립투스 나무로 이루어진 숲길이 길게 이어졌다. 그 숲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니 오로빌 방문자 센터가 나왔다. 야자수 그늘이 시원스럽게 드리워진 방문자 센터 앞에는 여행자들이 한가롭게 누워 있거나 앉아서 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