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 중 하나는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초반이다. 당시 "NEA 양복감"이란 것이 있었다. 미국교육협회(NEA)에서 구호물품으로 우리나라 교사들에게 보내온 양복감을 일컫던 말이다. 처음 양복감 2400명 분이 부산항에 도착하였을 때 이를 접수하는 행사장에는 전국의 교육감들까지 참석할 정도였다.
교육자들이 NEA양복을 입고, 학생들은 한 교실에 100명씩 모여 앉아, 교과서 한 권을 6, 7명씩 나누어 보며 2부제, 3부제, 심지어는 4부제로 수업을 해야 했다. 그래도 교육을 통해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살려야겠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매진하던 것은 당시 백성들의 교육열 때문이었다. 이런 교육계를 일대 혼란에 빠뜨린 파동이 있었다. 이름하여 '한글 간소화 파동'이다. 파동의 주인공은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맞춤법 개정을 밀어붙인 이승만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정부수립 초기인 1949년 10월 9일 한글날 담화를 통해 당시 한글을 "괴상하게 만들어 놓아 퇴보된 글"이라고 규정하고 "모든 언론계와 문화계에서 특별히 주의하여 맞춤법을 속히 개정하기를 바라는 바"라는 입장을 표명한 적이 있었다. 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3일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한글전용 원칙과 함께 한글 철자법의 개정을 이렇게 요구하였다.
"'잇다'와 '있다'가 무엇이 다른가? 문화를 진보시키려면 하루바삐 고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퇴보할 것이다. 한인들이 완고해서 퇴보하려면 모르되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말하는 식으로 고쳐야 할 것이니, 만일 민간에서 고집을 하고 개량을 안 하면 정부만이라도 사용하도록 할 것이다."이승만 대통령이 말하는 "내가 말하는 식"은 그가 개화기부터 읽어오던 한글판 신구약 성경대로 우리글을 소리 나는 대로 쉽게 표기하는 방식이었다. 전쟁의 발발로 인해 대통령의 주장은 한동안 실천되지 못했다.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53년 3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 수도 부산에서 또다시 담화문을 통해 "신구약과 기타 국문서에 쓰던 방식을 따라 석 달 안에" 한글을 간소화해서 써야 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후 우리나라 교육계, 문화계, 언론계, 정치계는 2년간 이에 대한 찬반 논란으로 혼란과 갈등을 겪어야 했다. 대통령 담화 1개월 후인 4월 27일에 국무총리 백두진은 '현행 철자법의 폐지와 구식 기음법의 사용'이라는 국무총리 훈령 8호를 발표하여 대통령의 뜻을 구체화하였다.
해방 직후부터 한글전용 문제나 한글맞춤법 개선 문제는 지속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심지어는 전쟁 후반에 한국을 방문하였던 유엔 한국재건단(UNKRA)의 보고서에서도 한글 문제를 언급한 바 있다. 당시 국민학교 교과서는 국가 시책에 따라 한글전용이었기 때문에 국민학생들은 한자를 배우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에서 대해야 하는 신문이나 일반 서적 대부분은 국한문 혼용이었기 때문에 국민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이를 읽는 데 곤란을 겪는 것이 문제였다. 이 보고서는 국민학교 교육에서 한자를 지금처럼 갑작스럽게 폐지할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제거하든지 아니면 학교와 학교 이외의 분야에서 일률적으로 한자를 제거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국어학계 내부에서도 당시 한글 맞춤법이 지나치게 복잡하여 배우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는 학자들이 다수 있었다.
압도적인 반대 여론, 한글 간소화 정책의 표류
대통령의 담화가 있고, 국무총리 훈령이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찬성보다는 반대 여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당시 사용하던 한글 맞춤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 대신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개화기의 맞춤법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지닌 불합리성이었다. 둘째는, 불과 3개월 안에 고치자는 주장의 성급함이 문제였다. 한 나라의 국어를 전면 개선하는 데 3개월이라는 기간을 못 박은 것은 누가 보아도 무리한 요구였다. 권력자의 오만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하였다.
대통령의 이런 주장에 대해 사회 각계의 비난이 쏟아졌다. 한글학회를 포함한 학계의 비판이 가장 엄중하였음을 물론이다. 가장 조직적으로 비판을 제기한 단체 중 하나는 당시 대한민국 7만 교육자를 대표하고 있던 대한교육연합회(현 교총)였다. 대한교육연합회는 1953년 5월 30일에 대의원회를 개최하고 '한글철자법 폐지 반대에 관한 건의안'을 대통령, 국무총리, 문교부장관, 그리고 국회에 제출하는 동시에 일간 신문에 성명서를 게재하였다.
이 성명서는 한글맞춤법이 하나의 문법이기 이전에 이 땅의 수많은 "학자들의 다년간 혈투의 결정"이라는 점, 구식 철자법으로의 회귀는 국어문화의 혼란, 학도의 지식 상 혼란, 그리고 민족문화의 후퇴를 가져올 것이기에 반대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철자법 수정이 필요하다면 반드시 오랜 기간 신중한 연구를 거쳐서 결정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글 간소화 정책'을 반대하던 문교부 편수국장 한글학자 최현배와 비판적 여론에 부담을 느꼈던 김법린 문교부장관은 사임을 하였다. 대통령의 문교부장관 제안을 받는 많은 인사들이 고사함으로써 한 동안 문교부장관 자리는 비어 있었다. 여론이 청문회나 다름없었다.
새로 문교부장관에 임명된 역사학자 이선근 주도로 정부의 한글 간소화안이 1954년 7월 3일에 정식으로 발표되었고, 10일 후인 7월 13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 간소화 실천의지를 담은 담화를 발표하여 추진 의지를 보였다.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다는 이른바 표음원칙에 기초한 이 간소화안에 대한 불만과 비판은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는 국민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정부 주도로 조직한 '국어심의위원회'에서도 간소화안의 폐기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결국 여론에 승복하다비판적 여론에 묻혀 한글 간소화 정책은 정부안 발표 후 1년 이상 표류하였고, 결국 1955년 9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 발표로 전격 철회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국문을 어렵게 복잡하게 쓰는 것이 벌써 습관이 되어서 고치기가 대단히 어려운 모양이며, 또한 여러 사람들이 이것을 그냥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무슨 좋은 점도 있기에 그럴 것이므로, 지금 여러 가지 바쁜 때에 이것을 가지고 이 이상 더 문제 삼지 않겠고, 민중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자유에 붙이고자 하는 바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총명이 특수한 만치 폐단이 되거나 불편한 장애를 주게 될 때에는 다 깨닫고 다시 교정할 줄 믿는 바이므로 내 자신 여기 대해서는 다시 이론을 붙이지 않을 것이다. (서울신문, 1955. 9. 20)여론을 대하는 이승만의 태도, 자기 국민의 총명함을 신뢰하는 대통령의 태도는 내가 지니고 있던 독재자 이승만의 이미지와는 충돌한다. 그렇기에 더 감동적이기도 하다.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국가정책이라면 그것이 대통령의 의지가 담긴 정책이라고 하더라도 비판을 주도하였던 학자와 선생님들, 전문가와 국민들의 반대 여론에 따라 자신의 소신을 굽혔던 대통령의 모습에서, 민주주의의 가치에 투철하였던 60년 전 대한민국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총명이 특수"하다는 말로 국민들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던 대통령의 마지막 담화문이 주는 울림이 새롭다. 60년 전의 한글 간소화 파동, 그것은 지금의 국정교과서 논쟁과 여러 가지로 닮은꼴이다. 시작지점과 전개과정이 유사하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이 지난 60년간 어느 정도 진보하였는지, 특히 헌법에서 강조하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 지니는 가치에 대한 이 시대의 신뢰가 어느 수준인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국정교과서 논쟁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길상님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입니다. 이 글은 월간 <새교육> 2016년 1호에 실릴 연재물 '이길상의 <새교육>으로 본 교육사' 원고를 축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