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1987년 '민주화' 이후 역대 총선을 통해 진입한 '초선' 지역구 국회의원 비율이다. 비례대표까지 포함한 역대 국회 초선 국회의원 비율은 48.1%까지 치솟는다. 즉 4년마다 약 40% 이상의 '정치신인'이 지역구에 등장하는 셈이다. 2000년 16대 총선부터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16대 37%, 17대 55.5%, 18대 32.6%, 19대 39%의 신인이 여의도에 입성했다.
바꿔 생각하면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 매번 반복되는 '물갈이' 속에 수많은 정치인이 역사의 뒷편으로 밀려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이겨내고 지금껏 여의도를 지키고 있는 정치인들이 있다. 이 중 생존을 넘어 '뚜렷한 존재감'까지 표출하는 정치인들을 정리해봤다.
[서청원] 현역 최다선 의원, 두 번의 옥고에도 생존력 발휘
생존력 '갑'을 따지자면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을 빼놓을 수 없다. 서 최고위원은 1981년 11대 총선 당시 민주한국당 후보로 당선된 뒤 19대 국회까지 등원한 현역 최다선(7선) 의원이기 때문이다. 특히 13대 총선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끄는 통일민주당 후보로 나서 당선된 이래 '거물급' 정치인으로 급성장했다. 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고 문민정부의 정무 제1장관을 역임했다. 또 신한국당 원내총무와 한나라당 사무총장, 당대표까지 역임했다.
그러나 만 34년에 달하는 정치역정 중 부침이 없을 수 없다. 서 최고위원은 '차떼기 사건'과 '비례대표 공천헌금' 사건에 연루돼 두 차례나 옥살이했다. 이 같은 전력을 감안하면 그는 당연히 '물갈이'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 최고위원은 끊임없이 저항했다.
17대 총선 당시 당 지도부가 '공천혁명' 수준의 물갈이를 예고했을 때, 서 최고위원은 의원·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 개최 요구, 최병렬 당시 당대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 등을 거론하며 맞섰다. 당시 당무감사 자료 유출 사태 땐 "나라는 노무현 대통령이 망치고, 한나라당은 최병렬 대표가 혼란을 자초했다"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역부족이었다. 서 최고위원은 자신의 오랜 지역구인 동작갑에 다시 공천을 신청했지만 대선자금 수수 혐의로 구속되면서 1차 심사에서 배제됐다. 그는 이후 낙천이 확실하자 하순봉 전 의원과 함께 탈당을 선언했다.
이후 서 최고위원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경선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을 도우며 정치적 재기에 나섰다. 당시 그는 박근혜 캠프의 상임고문으로서 '경쟁자'였던 이명박 전 대통령을 적극 공격, '중진 저격수'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당시 경선에서 패하면서 서 최고위원의 정치적 재기도 벽에 부딪혔다. 특히 한나라당의 18대 총선 공천은 '친박 학살'로 요약됐다. '차떼기 사건'에 연루된 데다 비주류 '친박'에 속한 서 최고위원이 공천을 따낼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는 이때도 맞섰다. 서 최고위원은 당시 당의 공천심사를 "최소한의 원칙도, 기준도 없는 밀실야합이며 승자독식에 모든 것을 거는 반역사적 퇴행"이라고 비난했다. 또 당시 낙천자들을 중심으로 2008년 3월 신당 '친박연대'를 꾸려 총선에 도전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서 최고위원은 남성 몫 비례대표 1번(전체 순번 2번)을 배정받아 여의도로 재입성했다.
영광은 짧았다. 서 최고위원은 총선 직후 불거진 '비례대표 공천헌금' 문제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결국 그의 여의도 복귀는 박근혜 정부 출범 후에야 가능했다. 서 최고위원은 2013년 10월 경기 화성갑 보궐선거에 전략공천돼 7번째 등원에 성공했다.
[이인제] 탈당·입당 반복하며 물갈이 피한 '불사조'
'불사조'란 별칭을 자랑하는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도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끄는 통일민주당 후보로 여의도에 입성한 그는 잦은 당적 변경으로 '물갈이'를 수월하게 피했다.
이 최고위원은 19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회창 당총재에게 패한 뒤 탈당했다. 그는 곧바로 '국민신당'을 창당, 대선 본선에 도전했으나 3위로 낙선한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계개편으로 새로 개편된 새천년민주당에 합류해 출마한다. '영입파'로서 당내 지분을 확보한 만큼 '물갈이' 걱정은 없었다. 당시 국민신당쪽 영입의원 6명 가운데 장을병 부총재를 제외한 전원이 조직책으로 확정된 점도 이를 방증했다. 이 최고위원은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004년 17대 총선도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이 최고위원은 16대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패한 후 이에 불복하고 탈당했다. 그리고 김종필 전 총재가 이끄는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했다. 당시 '2004 총선시민연대'가 그를 '철새정치인'으로 낙천명단에 포함시켰지만 영향은 없었다. 이 최고위원은 당시 자민련의 총재권한대행, 부총재 등을 맡은 '실력자'였다.
이 최고위원은 18대 총선에서도 여의도 입성에 성공했다. 다만 16대, 17대 총선 공천 때와 같은 '영입 대우'가 아니었다. 그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앞서 이 최고위원은 2005년 김종필 전 총재의 정계은퇴 선언 뒤 자민련을 탈당한 뒤 심대평·류근찬 전 의원이 창당한 국민중심당에 합류했다. 이어, 2007년 새천년민주당이 개편된 민주당에 재입당했다가 민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이 합당한 통합민주당에 합류했다.
하지만 당시 '도덕성'을 최우선으로 앞세운 통합민주당의 공천심사를 넘지 못했다. 이 최고위원은 이 때 "정치생명은 오직 주권자인 국민의 판단에 의해서만 끊기거나 계속될 수있다"라며 무소속 출마를 감행해 당선됐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자유선진당 후보로 등원했다. 그는 2011년 10월 자유선진당과 국민중심연합이 합당한 충청권 신당인 '통합' 자유선진당에 입당, 3개월 뒤에 발표된 당의 1차 공천 명단에 포함됐다. 당시 선진당은 '20% 물갈이'를 공언했지만 1차 공천 때 현역 의원 6명을 그대로 공천했다.
이 최고위원의 당적은 6번째 등원에 성공한 후에도 바뀐다. 2012년 대선 정국 가운데 선진통일당(옛 자유선진당)이 새누리당과 합당했기 때문이다. 이 최고위원은 현재 당 지도부에서 친박(친박근혜)계를 대변하고 있다. 그는 9일 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대구·경북 지역에서의 '물갈이'를 위한 방법이란 우려를 사고 있는 총선 예비후보 간 '결선투표제' 도입을 "신인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라며 지지하고 나섰다.
[김무성] 두번 연속 '보복공천' 당하고도 여권 대선주자 1위
두 번 연속 공천에서 탈락하고도 당당히 차기 대선주자 1순위로 꼽히는 이도 있다. 바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다. 김 대표는 지난 15대 총선 당시 신한국당 후보로 여의도에 입성한 후 모조리 등원에 성공했다. 그러나 첫 등원 이후 이어진 공천심사는 모두 그에게 살얼음판이었다.
2000년 16대 총선 땐 그의 지역구인 부산 남구을과 이상희 전 의원의 지역구인 남구갑이 통합됐다. 초선의원과 3선 중진의 맞대결이었다. 심사 초반만 하더라도 이 전 의원이 경합에서 앞서 나간다는 평이 많았다. 그러나 결과는 김 대표의 승리였다. 김 대표는 당시 '이회창 친정체제' 구축을 견제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 쪽의 입김이 되살아나면서 기사회생했다.
이와 관련, <한국경제>는 2000년 2월 "YS계 핵심실세인 김광일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대변인격인 박종웅 의원, 자금줄이 될 수 있는 김무성 의원은 공천돼 민주계 내부에서도 희비가 엇갈렸다"라며 "민주계를 분열시켜 무소속 벨트의 형성을 차단하려는 이회창 총재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김 대표는 17대 총선 공천 땐 '물갈이' 타깃이 된 부산 지역을 적극 대변하고 나섰다. 그는 당 상임운영위원회에서 부산 지역 공천 과정에서 특정 모임 멤버들이 공천을 받았다고 지적하며 "공천이 아닌 사천(私薦)"이라고 당 지도부를 공격했다. 자신의 공천이 확정된 뒤에도 당 지도부를 향한 공격을 이어갔다. 그는 당시 부산 등 영남지역의 공천을 '꽃꽂이 공천'에 비유하며 "뿌리를 살려야 하는데 겉만 그럴 듯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김 대표는 18대 총선 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당시 당의 공천이 '친박학살'로 요약됐던 만큼 당시 '친박계의 좌장'으로 꼽힌 그도 낙천을 피할 수 없었다. 이에 김 대표는 "이재오·이방호가 공천개혁을 빙자해 박근혜 죽이기를 하고 있다"라며 탈당을 선언했다. 또 '친박'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역설적으로 김 대표는 19대 총선 공천에선 '비박(비박근혜)'란 멍에를 쓰고 낙천했다. 18대 국회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반대에도 당 원내대표를 맡고 세종시 수정안 사태 때도 박 대통령의 뜻과 배치되는 행동을 해 '비박'으로 분류된 것이다. 이 때도 무소속 출마 가능성이 점쳐졌다. 특히 낙천인사를 중심으로 한 신당 창당 움직임도 가시화됐다. 그러나 김 대표는 이 같은 예상을 뒤집고 "우파 분열의 핵이 돼서는 안되므로 백의종군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라고 선언했다. 또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의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정권재창출에 기여했다.
이후 김 대표는 2013년 4.24 재보궐선거에서 부산 영도구로 지역구를 옮겨 5번째 등원에 성공한다. 또 1년 뒤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장악하며 여권 대선주자 1위로 등극했다. 그러나 그의 6번째 등원도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친박계는 그를 겨냥, 수도권 등 '험지'에 출마하라고 강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주선] 거듭된 구속에도 무죄 받고 복귀, 20대는 어떻게?
야권에서는 다선 의원보다 호남 의원의 생존력이 더 돋보인다. 총선 공천 때마다 안마당인 호남을 겨냥한 '물갈이'가 득세했기 때문이다. 결국 호남 의원들은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보다 매번 어렵게 등원해야 했다.
그 중 독보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이는 광주 동구를 지역구로 둔 박주선 무소속 의원이다. 3선 의원인 그가 공천심사를 통과한 것은 딱 한 번이었다. 그것도 여론조사 경선을 통한 공천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네 차례나 구속 수감된 바 있다. 그런데도 매번 '물갈이'되는 정치판에서 생존해 낸 것이다.
첫 등원부터 그랬다.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지낸 박 의원은 1999년 '옷로비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그러나 무죄로 석방된 직후 2000년 16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전남 화순·보성에 출마해 당시 한영애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박 의원은 그해 5월 새천년민주당으로 입당했다. 17대 총선 때도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는 2003년 '나라종금사건'에 연루돼 구속 수감되면서 낙천대상이 됐다. 그러나 그는 옥중 출마를 감행했고 낙선했다. 다만, 해당 사건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8대 총선에선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때는 공천심사를 통과했다. 1999년 '옷로비사건', 2003년 '나라종금사건', 2006년 '현대건설비자금사건'에 연루돼 세 차례나 구속수감된 전력이 있었지만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아낸 저력이 먹혔다. 그는 이 때 여론조사 경선에서 경쟁자인 양형일 의원을 꺾고 공천을 따냈다. 그리고 전국 최고득표율(88.7%)로 당선됐다.
그러나 4년 뒤 19대 총선 때 그는 또 다시 무소속이었다. 그의 지역구인 광주 동구에서 국민참여경선 선거인단 모집과정 중 투신자살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당은 이 사건을 이유로 광주 동구를 '무공천 지역'으로 결정했다. 박 의원은 이에 무소속으로 출마, 전국 최저득표율(31.6%)로 등원에 성공했다. 그는 이후 이 사건으로 구속됐지만 일부 무죄 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생존 도전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박 의원은 지난 2014년 3월 '안철수신당'과 합당해 새로 재편된 새정치민주연합에 입당했다. 그러나 그는 문재인 대표 체제 이후 비주류를 자임하며 '각'을 세어왔다. 그리고 지난 9월 "야권의 창조적 재편과 새로운 대안 정치세력 건설을 위해 나서겠다"라며 새정치연합 현역 의원 중 첫 번째 탈당의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