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대선개입사건의 사실관계를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재판이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 주요 증인인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의 불출석 또는 증언 거부가 원활한 진행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11일 서울고등법원 형사7부(부장판사 김시철)는 오전 10시에 시작한 원세훈 전 원장 등의 파기환송심 3차 공판을 중단한 뒤 오후 2시 반에 재개했다. 이날 부른 국정원 심리전단 안보 5팀(트위터 전담) 직원 셋 가운데 단 한 명, 김아무개씨만 출석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간단하게 절차를 정리한 다음 그가 출석하기로 한 오후 3시 45분쯤부터 본격적인 심리를 진행했다.
하지만 1시간 동안 이뤄진 증인 신문에서 김씨는 거의 모든 질문에 "증언을 거부하겠다"고만 답했다. 그는 ▲ 자신이 안보 5팀에서 파트장으로 근무했고 ▲ 팀장에게서 매일 '이슈와 논지'를 받아 파트원들에게 전달했으며 ▲ 트위터 계정 '진유나(@wlsdbsk)' 등을 직접 만들었다고 이미 검찰 조사 때 인정한 내용들조차 답변을 거부했다.
"증언 거부한다"는 말만 반복한 증인검찰은 파트장인 김씨가 '이슈와 논지'에 맞춰 글을 작성하면 파트원들이 트윗덱·트윗피드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 그의 글을 퍼뜨렸다고 본다. 대표 사례가 IEA사건이다. 국정원은 원전을 홍보하라는 원세훈 전 원장의 지시사항대로 '이슈와 논지'를 만들어 직원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IEA(국제에너지기구)를 IAEA(국제원자력기구)로 잘못 썼다. '진유나' 계정은 이 오기를 그대로 옮겼고. 다른 국정원 직원들은 그 트윗을 퍼나르기에 바빴다(관련 기사:
국정원, '원장님 말씀' 조작 제출했다).
김씨는 검찰의 관련 질문에 전혀 답하지 않았다. "국제에너지기구는 IAEA가 아니라 IEA인데, 알고 있냐"는 물음에조차 증언 거부권을 행사했다.
'트위터를 개인용도로 쓴 적이 있냐'는 질문에도 김씨가 "증언을 거부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하자 검찰은 이의를 제기했다. 형사소송법은 증인이 질문 받은 내용이 업무상 비밀이거나 그로 인해 기소되거나 유죄판결 받을 수 있다면 증언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김씨의 안보 5팀 파트장 근무 여부, 업무용 외에 트위터를 사용한 적이 있는지 등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검찰은 주장했다.
원 전 원장의 변호인은 안보 5팀 근무 여부가 범죄 사실이 될 수 있고, 그 자체를 따지면 증언 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셈이라고 맞섰다. 그는 개인용도로 트위터를 썼는지, 안보5팀으로 발령 난 2012년 2월 전후로 트위터를 사용했는지 등은 트위터 사용 능숙도를 따지는 기준이 될 수 있고, 결국 안보 5팀의 트위터활동 관련해 불리한 정황으로 보일 수 있다며 김씨가 대답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다시 반박했다. 증언을 거부할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면 심리 자체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검찰은 "어디까지가 증언 거부권 대상인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김씨의 증언거부를 인정하면) 앞으로 나올 증인들이 인적사항 등 거의 모든 답변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며 김씨의 증언 거부가 적절한지 판단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또 김씨의 증언 거부는 정당한 사유가 없으므로 법에 따라 과태료를 부과해달라고 했다.
재판부 생각은 달랐다. 김시철 부장판사는 "지금 단계에서 저희가 꼭 (증언 거부가 적절한지) 판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증인 신문을 계속 진행했다. 그는 "제가 판사생활을 20여년 했지만 (증인이) 증언 거부권을 행사한 사례는 손에 꼽히고, 증언 거부권의 한계에 명확한 기준을 정리한 논문 등도 많지 않은데 이게 맞다, 아니다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과태료 부과 문제를 두고서도 "양쪽(검찰과 변호인) 견해가 다르다면 부정적"이라고 했다. 재판부가 별 다른 제재를 하지 않자 김씨의 증인 신문은 "증언을 거부하겠다"는 말로 끝났다.
검찰로선 난감한 상황이다. 대법원이 사건을 다시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내라고 한 만큼 검찰은 '원세훈 전 원장 - 이종명 전 3차장 -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 - 심리전단 팀장 - 파트장 - 파트원'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에 맞춰진 국정원의 정치활동과 선거활동을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검찰은 2013년 국정원 압수수색 등으로 많은 자료를 확보했지만, 시큐리티 파일 같은 핵심 증거를 국정원 직원의 '모르쇠' 법정 진술 탓에 써먹지 못했다. 김씨의 증언 거부권 행사 역시 검찰에게는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모르쇠 이어 꼭꼭 숨는 국정원 직원들
국정원 직원들이 아예 법정에 나타나지 않는 것도 검찰에게는 불리하다. 재판부는 검찰 신청을 받아들여 김씨 등 안보 5팀 소속 직원 7명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이들의 트위터 계정 정보 등이 담긴 '시큐리티, 425지논' 파일이 나온 이메일 계정 주인 김아무개씨는 11월 27일 1차 공판의 신문 대상이었다(관련 기사 :
원세훈을 들었다 놨다한 '그 남자'). 대법원이 두 파일의 증거능력을 부정하긴 했지만, 검찰은 김씨를 다시 불러 국정원 심리전단의 조직적인 선거운동을 증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두 차례나 증언했고, 사건 발생 후 시간이 많이 흘러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불출석했다. 재판부는 김씨의 주장을 받아들여 증인 채택을 취소했다. 검찰은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으며 혐의 입증에 필요한 증인이고, 다른 국정원 직원들의 출석 여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반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1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아무개씨도 비슷한 이유로 증인 채택이 취소됐다.
재판부는 다만 이씨와 함께 불출석한 트위터 계정 '태산4(@taesan4)'의 주인 김아무개씨는 1월 11일에 한 번 더 부르기로 했다. 지난 4일 나타나지 않은 장아무개, 김아무개, 박아무개씨에게도 소환장을 다시 보냈다.
4라운드에 들어 줄곧 애먹고 있는 검찰은 반전을 꾀할 수 있을까(관련기사:
재판장 "이전 판결 잘못됐을 수도 있다"). 원 전 원장의 파기환송심 4차 공판은 12월 18일 오전 10시에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