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황당한 말로 테러방지법 제정을 압박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8일 국무회의에서 "우리나라가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법체계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IS(이슬람국가)도 알아 버렸다. 이런데도 천하태평으로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지 않을 수 있겠나?"라고 발언했다. 또한 "테러방지법이 통과되지 못하면 테러에 대비한 국제공조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다른 나라와) 정보 교환도 할 수 없다"며 겁을 주고는 '긴급명령을 발동'해서라도 법을 제정하겠다고 덧붙였다.
"테러 나면 책임지겠느냐"는 정치권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도 지난 8일 "테러가 일어나면 새정치민주연합 책임"이라고 윽박질렀다. 그는 "G20 국가 중에 테러방지법이 제정되지 않은 곳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단 3곳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해당 법안의 제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불순한 발상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테러 발생하면 책임질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테러 방지'에 관해서 우리나라는 G20에 속한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력한 기구와 제도를 운용한다는 점이다. 한국은 식민지와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시민 통제와 관련해서 G20 중 최고의 안보국가로 정평이 나 있다. 이미 통제가 지나쳐 과도하게 시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중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라. G20 국가 중 우리나라처럼 온·오프라인에서 광범위하게 시민들의 사생활과 일거수일투족을 정부가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나라가 몇이나 되겠는가? G20 중 어느 나라 검찰이 기소권, 수사권을 독점한 채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가? 우리나라 검찰은 세계 최고 수준의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과연 G20 중 출입국 제도, 주민등록제도가 우리나라처럼 촘촘한 나라가 또 있는가? G20 중 우리나라 국정원처럼 국내외 정보수집기능, 비밀경찰기능(수사기능), 정책기획 기능, 나아가 작전 및 집행기능에 이르기까지 무소불위의 권한을 지닌 정보기구를 두는 나라가 또 있는가? 과연 G20 나라 중 우리나라만큼 많은 수의 군대와 경찰을 가진 나라가 몇이나 있는가? 심지어 '치안한류'라는 이름으로 이를 해외에 자랑하며 파견하고 있다.
이런 나라에서 정부와 정치권이 나서서 '테러나면 책임지겠느냐'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한 것 아닌가?
테러방지법이 없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테러방지법'이라는 이름의 법이 없을 뿐이다. 한국에는 무차별 공격과 유사한 인질 사태 또는 무장공격 행위를 예방하고 대응하기 위한 법과 제도가 무수히 많다. 식민지 시대와 분단을 거치면서 '테러'라는 용어가 정치적으로 악용되어 왔으므로 해당 용어를 쓰지 않고 있을 뿐이다. 사실 많은 나라에서 '테러방지법'은 하나의 법안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개별법들의 묶음을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나라도 이미 수많은 '테러방지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테러방지법이 없다고? 그렇지 않다한국에는 '테러'에 직접 대응하는 대비태세를 갖추기 위해 각종 법령과 기구가 이미 마련되어 있다. '적의 침투·도발이나 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각종 국가방위요소를 통합하여 동원하는 통합방위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비상대비 자원관리법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다.
통합방위사태가 선포되면 국무총리가 총괄하는 중앙통합방위협의회가 각 지역 행정조직과 경찰조직, 군과 예비군, 그리고 국정원 등 정보기구를 통합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통합방위사태는 대통령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선포하고 통제구역을 설정한다.
기타 시민들의 대피, 구조·구난 활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국민안전처도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신설됐다. 육·해·공군과 해병대, 그리고 경찰과 해경은 각각 대테러 특공대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 쌍용차 노조 파업 진압에 경찰 대테러 특공대가 동원되어 구설에 오른 바 있지 않은가?
게다가 한국이 지닌 대테러 진압 능력에는 한미연합사가 지닌 정보·작전 능력도 포함해야 한다. 한국과 미국 간에는 군사정보를 공유하는 군사비밀보호협정이 체결되어 있다. 한국 국방부는 주한미군을 비롯한 미군의 정보자산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으며 매년 정기적으로 한미 대테러 훈련도 시행하고 있다. 그 밖에 국가대테러 활동지침에 따라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국가테러대책회의도 오래전부터 운영해오고 있다.
'사이버 안전'을 위해서는 이미 정보통신기반 보호법, 전기통신사업법, 통신비밀 보호법 상 비밀보호 예외조항 등 다양한 법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그런데 시민들의 통신 기록을 무단으로 대량수집하고 도·감청까지 한다는 의혹도 있다. 공안당국은 카카오톡을 비롯한 SNS를 임의로 감청하고, 테러단체도 아닌 평범한 시위대를 추적할 목적으로 통신사업자의 기지국 통신자료를 통째로 가져가는 것을 비롯해 영장 없이 가입자 정보, 통신사실 확인자료, 위치정보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있다.
국경없는기자회는 2009년 이래 우리나라를 '인터넷 감시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2월 게재한 '한국이 인터넷 공룡인 진짜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인들이 광속 인터넷 환경을 누리고 있지만 자유로운 인터넷 사용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고 분석하며 "한국은 암흑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테러 관련 자금 추적 장치 역시 촘촘하다. 범죄에 사용되는 자금을 추적할 자금세탁 방지제도인 '범죄수익 은닉 규제법'과 '금융거래정보 보고법'은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제정되었는데 G20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밖에 공중 등 협박목적자금조달 금지법(일명 '테러자금 조달금지법')도 2008년 제정하여 UN뿐만 아니라 미국, EU 등에서 요청한 개인과 단체의 자금을 세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이 법에 따르면 '테러 관련 자금'이라고 의심되면 영장 없이 금융거래를 동결하고, 수사에 필요한 정보는 검찰총장·경찰청장과 국민안전처장에게 제공된다. 외국환 관리법도 해외금융거래와 관련해서 유사한 통제장치가 있다.
'테러위험 인물'들의 출입과 동선을 추적하기 위한 출입국 관리제도 역시 다른 어느 나라보다 통제가 강해서 인권침해가 심하다는 지적이 있다. 예를 들어 지난 2010년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경찰청은 중동·아프리카·동남아시아의 이슬람권 57개국에서 입국한 5만여 명의 국내 체류상황을 조사해 그중 행적이 의심스러운 외국인 99명을 특별히 '관리'했다. 또한 경찰청은 "법무부와 국가정보원 등도 테러 용의자 명단을 확보해 입국금지 대상에 포함하고 있으며, 현재 입국이 금지된 테러 혐의 외국인은 5천여 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 명단 때문에 시민사회단체의 G20 관련 학술회의에 참가할 예정이었던 파키스탄 여성단체 대표 칼리크 부슈라(Khaliq Bushra), 네팔노총 사무총장 우메쉬 우파댜에(Umesh Upadhyaya), 국제농민단체 비아 캄페시나 대표인 헨리 사라기(인도네시아) 등 6명의 비자가 거부되었고, 필리핀에 있는 개발원조단체인 이본 인터내셔널(IBON International)의 폴 퀸토스 부장을 비롯한 8명의 필리핀 활동가는 비자를 받고도 공항에서 무더기로 입국불허 통지를 받아야 했다.
이들은 대부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국제행사에 자유롭게 참여해오던 인사들이었다. 2010년 2월에는 경찰이 대구 이슬람 사원 주변에서 근무하는 이맘과 이주노동자 등 2명의 파키스탄인이 탈레반 구성원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재판 과정에서 검찰과 경찰은 관련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
법이 없어 국제 공조와 정보교환이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은 테러방지법이 제정되지 않으면 국제 공조도 정보교환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처럼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국제 정보 공조는 테러방지법 제정과는 거의 상관관계가 없고 지금도 국제공조와 정보교환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앞서 언급했듯이 한미 간 군사비밀보호협정이 체결되어 있고 연례적인 대테러 군사훈련과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에드워드 스노든은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전 세계와 자국민을 무차별 사찰하고 감청해온 사실을 폭로한 바 있다. 이후 스노든이 한국 언론과의 화상대화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한미 정보당국 간에는 최소한 "국방 측면의 정보 공유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테러 관련 자금 추적을 위한 국제 정보교환과 공조 역시 활발하다. 한국은 지난 7월부터 1년간 국제자금세탁 방지기구(FATF)의 의장국을 맡고 있다. 의장은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이다. 유엔 협약 및 유엔 안보리 결의 관련 금융조치를 이행하는 태스크포스(TF)인 FATF는 금융시스템을 이용한 자금세탁과 테러·대량살상무기 확산 관련 자금조달을 막는 역할을 한다. 이미 시행 중인 공중등협박목적 자금조달금지법으로 UN의 요청뿐만 아니라 미국 등 우방국의 요청만 있으면 위험인물로 지목된 개인과 단체의 금융거래를 동결하고 해당 자금의 조성과 은닉에 관련된 이들을 처벌할 수 있다.
외국환 관리법 역시 유엔과 우방국과의 긴밀한 정보교류와 공조 속에 시행되고 있다. 외국환 관리법의 하위 지침인 '국제평화 및 안전유지 등의 의무이행을 위한 지급 및 영수 허가지침'에 따르면 유엔 결의로 제재를 결정한 개인이나 단체 외에도 미국 대통령령(Executive Order), 유럽연합이사회(The Council of the European Union)가 지명한 개인 및 단체에 대해서 기획재정부가 금융제재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지난 3월, 기획재정부는 IS 대원 27명을 포함해 669명을 금융제재 대상자에 포함하고 수시로 업데이트하고 있다.
오히려 우방국과 과도하고 근시안적인 협력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란제재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2010년 9월 이명박 정부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미국의 제재요청을 받아들여 102개 단체와 24명의 개인을 금융제재 대상자로 지정하였다. 여기에는 이란과 교역하는 우리 기업들의 결재은행인 이란 국영 멜라트 은행도 포함되어 있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1929호는 이란의 40개 단체와 1명의 개인을 제재대상으로 지정하였고, "결의안의 어떠한 조항도 국가들이 이 결의안 범주를 넘어선 조치나 행동을 취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의 이란 제재는 미국 국내법에 따른 것으로 유엔 안보리 결의에는 위배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한국 정부는 당시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배하면서까지 미국의 요청에 따르면서 결과적으로 이란과의 교역 단절에 따른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 셈이다.
우방국과의 잘못된 국제 공조 중 최악의 사례는 이라크 전쟁 파병이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이라크 후세인이 핵을 개발하고 있고, 테러세력과 연관되어 있다'는 미국의 일방적인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군을 파견했다. 한국은 당시 영국 다음으로 많은 세계 3위 규모, 36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점령 직후 이라크에 핵 프로그램이 없었고, 후세인 정권이 테러집단과는 관련이 없었다는 사실이 재확인했다. 미국 정부조차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9·11 사건을 예측하지 못한 데 이어 두 번째의 치명적인 '정보 실패'였던 셈이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이라크 불법점령 이후 이라크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불러 모으는 '지하드'의 성지가 되어버렸다. 이라크 내부 저항세력의 끈질긴 게릴라전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희생당했다. 특히 관타나모 수용소(미국령 쿠바), 바그람 기지 수용소(아프간),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이라크) 등 해외 수용시설에서 미군이 '적 전투원(enemy combatant)'으로 의심된다는 이유로 증거도 없이 수감된 민간인을 고문·학대했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결국 미국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은 전 세계에 테러리즘을 확산하는 자양분이 되고 말았다. '파리 테러'를 주도한 IS도 이즈음 이라크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2편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허핑턴포스트, 참여연대 홈페이지 게재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