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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상이 왜로 떠난 자리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 휴대전화로 찍은 탓에 사진이 좋지 못합니다.
박제상이 왜로 떠난 자리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 휴대전화로 찍은 탓에 사진이 좋지 못합니다. ⓒ 정만진

'신라충신 박제상공 사왜시발선처'라는 글자들이 검게 새겨져 있는 빗돌이 있다. 도로명 주소로 밝히면 울산광역시 북구 동해안로 1455-6(정자동)의 얕은 언덕 위 지점이다. 그런데 정자항이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을 어렵사리 찾아 올라가 보면 빗돌에 대한 설명은 없고 '유포석보(柳浦石堡)' 안내판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유포석보는 유포(정자의 옛이름)에 있는 돌로 된 보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의 보(堡)는 군대가 주둔하는 진(鎭)의 보조 방어 시설이다. 최전방에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외적 침입시 인근 주민을 대피시키고, 유사시 전투를 하는 소규모 성 역할을 했다. 또한, 보 주변에는 봉수가 설치되어 즉시 신호나 포성 같은 소리를 통해 주변의 주민과 인근 지역 및 내지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곳에 1998년 울산광역시 기념물 17호로 등록된 문화재인 유포석보가 설치된 것은 정자항 일대가 군사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조선왕조실록>은 1450년(문종 원년) 이곳에 목책성(木柵城)이 설치되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5년 뒤인 1455년(세조 1) 본격적으로 돌성 축성이 추진되어 기존의 목책으로부터 5리 떨어져 있는 곳에 성을 쌓기로 정해졌고, 1459년(세조 5) 완공되었다.

이곳은 왜구 방어를 위한 군사 요충지였다. 그래서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의 지휘 아래 울산과 경주의 병사 3백 명이 3번 교대로 주둔하면서 수비했다. 보의 전체 둘레는 755m 정도이며, 구릉 기슭의 낮은 평지와 계곡을 안으로 삼고 그 주위를 좁게 쌓았다. 현재 가장 잘 남아 있는 동문(東門) 근처 성벽의 높이는 220cm 정도이다.

 보의 흔적. 사진 오른쪽 멀리 박제상비가 작게 보인다.
보의 흔적. 사진 오른쪽 멀리 박제상비가 작게 보인다. ⓒ 정만진

유포석보가 조선 초기에 축성되었다고 해서 정자항 일원이 그 시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유포석보 안내판 앞의 박제상 빗돌은 바로 그 사실을 말하기 위해 세워졌다. '신라충신 박제상공 사왜시발선처(使倭時發船處)'는 신라충신 박제상이 왜(倭)국에 사(使)신으로 갈 때[時] 배[船]를 출발(發)한 곳[處]이라는 뜻이다.

박제상은 418년(신라 눌지왕 2) 정자항(당시 이름 율포)에서 왜국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 해에 죽는다. '동생들을 데려와 달라'는 눌지왕의 부탁을 받고 고구려로 들어가 왕제 보해를 구출해낸 뒤 다시 왜에 볼모로 잡혀 있는 또 다른 왕제 미해를 구출하러 떠났다가 마침내 그곳에서 처형 당한다. 세종대왕이 그를 '신라 천년 최고의 충신'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박제상이 죽는 장면보다 그가 율포항에서 왜국으로 떠나는 장면이 더 극적이다. 극적이라는 말은 연극적이라는 말의 줄임말이다. 즉, 극적이라는 말은 현실적이지 아니한, 비현실적인, 가공한, 인위적인, 허구적인... 등의 의미를 내포한다. 박제상이 율포에서 왜국으로 떠나는 당시의 모습이 상식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박제상이 왜국으로 떠나는 모습. (이 사진은 울산 치술령 아래 박제상기념관에 걸린 동판을 촬영한 것으로, 실제 그림과는 구도 등이 다릅니다.)
박제상이 왜국으로 떠나는 모습. (이 사진은 울산 치술령 아래 박제상기념관에 걸린 동판을 촬영한 것으로, 실제 그림과는 구도 등이 다릅니다.) ⓒ 박제상기념관

박제상은 고구려에서 돌아와 눌지왕에게 '보해 왕제를 데리고 왔다'고 보고한 후 집에도 들르지 않고 왜국을 향해 출발한다. 이는 김유신이 백제군과 전쟁 후 서라벌로 돌아왔다가 가족들도 만나보지 아니한 채 다시 전쟁터로 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박제상과 김유신을 몰인정하다고 쉽게 비난할 일은 아니다. 죽음을 앞둔 적지로 떠나는 남편으로서는 '사별할지도 모르는 이별의 아픔을 아내에게 떠안길 수는 없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는 일이다.

남편 박제상이 왜국으로 가기 위해 율포 바닷가로 갔다는 소문을 들은 아내 김씨는 부랴부랴 동해 해안까지 달려간다. 하지만 이미 남편은 배 위에 오른 뒤였다. 아내는 남편을 향해 울부짖는다. 이제 가면 살아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어찌 울부짖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남편의 배는 멈추지 않고 바다를 가로질러 멀리 사라져버린다. '살아서 나를 만날 생각은 하지 마시오. 미안하오' 하고 남편이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내의 눈물이 멈춰질 리는 없다.

남편이 왜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오던 길에 벌지지(지금의 경주 남산 통일전 인근의 망덕사터 옆 남천 일원)에 닿았을 때 충격으로 다리가 마비되기까지 했다. 실제 박제상은 죽어서야 신라로 돌아왔다. 그렇게 박제상이 떠난 곳이 지금의 정자항이다. 그래서 작은 빗돌이 세워져 죽은 박제상과 뒷날 치술령 망부석이 되는 그의 아내를 기리고 있는 것이다.

 정자항
정자항 ⓒ 정만진

정자항은 싱싱한 회로 이름난 곳이다. 비록 울산광역시 정자항이지만 대구경북 사람들도 그곳을 그리 멀다하지 않고 즐겨 찾는다. 하지만 정자항에 가서 회만 먹고 돌아온다면 어찌 역사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자항에 갔으면 응당 '북구 동해안로 1445' 율포석보를 꼭 찾을 일이다. 그곳에 세워져 있는 박제상비를 손으로 한 번 쓰다듬어 보고, 나라와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죽은 박제상에 대해 잠깐 묵념도 하고, 혹은 '사랑하는 배우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아야지' 하고 다짐도 해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정자항은 대구경북 지역이 아니지만 내륙 도시인 대구의 시민들이 정서적으로 가까워하는 곳이므로 [방학맞이 대구경북 역사여행]의 답사지에 넣습니다.



#박제상#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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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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