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가지 광장은 아직도 젊은이들의 열기로 가득하다. 공연을 보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앉은 젊은이, 셀카를 찍으며 추억을 만드는 젊은이, 후스 동상 앞에 앉아 역사를 음미하는 젊은이, 두 발 세그웨이, 세 발 자전거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광장에서 추억을 만들어간다. 그 광장에 서서히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제 야간 풍경이 만들어진다. 우리는 이곳 구시가지 광장에서부터 카를 다리까지 가면서 프라하 야경을 즐기려 한다.
나는 시간이 있어 잠시 광장 한쪽에 있는 아트 갤러리에 들른다. 그림이 있고 조각품이 있다. 체코 미술하면 우리는 알퐁스 무하(Alfons Mucha: 1860-1939)를 떠올린다. 그는 청년양식을 대표하는 작가로 전 유럽에 이름을 남겼다. 모라비아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죽었지만, 그의 활동무대가 빈, 뮌헨, 파리 등 유럽 예술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그림들은 구상성이 두드러진다. 아마도 프라하 예술 아카데미를 졸업한 사람들의 작품인 것 같다. 이 학교는 1799년 황제의 칙령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그림이 동시대의 낭만적인, 애국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또 자연풍경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1896년부터는 조각, 건축, 그래픽이 예술 아카데미로 들어왔고, 이를 통해 예술의 개념이 확장되었다.
이곳에는 또 관광용 마차와 승용차가 운행을 한다. 마차는 두 마리 말이 끄는 네 바퀴 짜리다. 승용차는 오픈카로 영화에서나 보던 멋진 차다. 캬바레 프라하를 선전하는 리무진 승용차도 보인다. 이곳 광장에서는 또 시티투어 버스가 출발한다. 그런 측면에서 구시가지 광장은 프라하 관광 1번지다. 광장 주변에는 명품, 보석, 기념품 등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이곳에 불이 들어오자 분위기가 더욱 살아난다.
해가 넘어가면서 하늘은 오히려 파랗게 변한다. 그래서 해 넘어간 다음 야경 사진이 참 좋다. 틴 교회의 검은 벽이 조명을 받아 하얗게 보이고, 그 앞 고딕 양식의 아케이드, 르네상스 양식의 지붕이 분홍색과 주황색을 띄고 있다. 이곳에는 카페, 레스토랑 등이 들어가 있다. 구 시청사 역시 낮에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그것은 거무튀튀한 벽이 밝은 회색으로 빛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문시계 역시 노란 황금빛이 조명에 훨씬 더 반짝인다. 광장 가장자리에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은 천막을 치고 의자를 설치해 노천카페를 만들었다. 여름에는 이곳에 앉아 먹는 음식과 차맛이 더 좋을 수 밖에 없다. 광장과 건물이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카를 다리 쪽으로 이동한다. 달은 보름이 되기 직전이다.
카를 4세 광장에서 바라보는 풍경
카를 4세 광장은 여전히 인파로 붐빈다. 이곳에서 우리는 1시간 정도 자유시간을 얻는다. 1시간이라면 프라하 성까지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카를 다리와 블타바강을 따라가며 야경을 즐기기로 한다. 블타바강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중 '블타바'로 유명하다. 그것은 블타바가 체코에서 가장 크고 긴 강으로 체코의 젖줄이기 때문이다.
블타바강은 체코와 독일의 국경인 보헤미아 삼림지대와 바이에른 삼림지대에서 발원한다. 중간에 체스키 크룸로프와 체스케 부데요비체를 지나며 아름다운 도시를 형성한다. 이 두 도시는 체코와 오스트리아 국경 지방에 위치한다. 특히 체스키 크룸로프는 강이 도시를 S자로 한 바퀴를 돌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 우리는 프라하 관광을 끝내고 체스키 크룸로프로 갈 것이다.
체스키 크룸로프와 체스케 부데요비체에서 강은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프라하를 향해 간다. 그러므로 블타바는 프라하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관통한다. 블타바가 프라하를 관통하는 동안 모두 16개 정도의 다리를 지난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카를 다리다. 카를 다리는 강 동쪽의 구시가(Stare mesto)와 강 서쪽의 말라 스트라나 지역(Malá strana)과 성 지역(Hradčany)을 연결한다.
카를 다리 동쪽 광장에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낮보다 기온이 낮아져 다니기에도 더 좋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블타바강은 낮보다 더 파랗게 보인다. 다리를 받치고 있는 아치형 다릿발에도 불이 들어와 있다. 왕궁과 성, 성 비트 성당, 성 미쿨라셰 교회 등이 조명으로 밝게 빛나고, 그 불빛이 블타강에 비쳐 흔들거린다. 야경은 그 자체보다 강물에 비칠 때 더 아름답다.
카를 다리를 왕복하며 성을 바라보다
이제 낮에 한 번 건넜던 카를 다리로 들어선다. 초상화가들은 모두 철수했지만, 거리의 악사들은 여전히 음악을 연주한다. 밤에는 역시 시각보다는 청각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 사로잡는 것 같다. 낮에 보았던 30개 조각상도 그대로 있지만, 어둠 속에 빛을 잃었다. 그나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과 네포묵 청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이 가장 오래되고 또 상징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제 카를 다리에서 가지 못하는 성 지역을 살펴본다. 그곳에는 성, 왕궁, 성당, 교회가 복합건물처럼 연결되고 있다. 이것이 넓은 의미에서 흐라드(Hrad)라 불리는 성채다. 이곳에 있는 대표적인 건물이 구 왕궁, 성 비트 성당, 성 이르지 교회다. 그리고 성 안의 일부 건물은 역사박물관, 왕궁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 외곽으로는 문과 탑이 있어 내․외부를 연결한다.
그 중 밤에도 뚜렷한 것이 성 비트 성당(Katedrála sv. Víta)이다. 이 성당은 1060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처음 지어졌다. 그 후 1344년부터 카를 4세의 명령으로 고딕 양식으로 다시 지어졌고, 1560년대 현재의 모습으로 거의 완성되었다. 성 비트 성당은 프라하 주교좌 성당이고, 새로운 왕이 취임하는 대관식 교회다. 그래서 이곳에는 바츨라프 왕관이 보관되어 있다.
또 이곳에는 신성로마황제와 보헤미아 왕들이 잠들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카를 4세 황제, 바츨라프 4세, 페르디난트 1세 황제, 루돌프 2세 황제 등이다. 성당의 길이가 124m, 폭이 60m, 높이가 33m나 되어 체코에서 가장 크고 넓다. 탑의 높이가 99m나 되어 웅장하기까지 하다. 내부는 고딕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제단과 장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알퐁스 무하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유명하다.
성채 밖으로는 대주교궁과 벨베데르궁이 있다. 대주교궁은 프라하 대주교의 거처로 마련된 건물이다. 벨베데르궁은 정원이 잘 갖춰진 왕의 여름 별궁이다. 이곳의 일부는 현재 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카를 다리를 떠난다. 낮에 블타바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들어왔던 것처럼 블타바강을 따라 마네스 다리 쪽으로 내려간다.
그 유명한 카프카 자취는 보지 못하고...프라하 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있다. 릴케(Rainer Maris Rilke: 1875-1926)와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다. 이들은 프라하에서 태어난 보헤미아인이다. 그렇지만 혈통상 유대인이고, 문학작품 창작에는 독일어를 사용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주류가 아니고 비주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시와 소설은 현대(Das Moderne)를 대표하는 주류문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릴케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는 프라하, 뮌헨, 베를린에서 철학, 예술사, 문학사를 공부하고,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며 문학적 자극을 받았다. 그는 루 살로메(Lou Andreas-Salomé)와 함께 러시아로 여행해 톨스토이를 만났다. 1901년 조각가 베스트호프(Clara Westhoff)와 결혼한 다음 파리로 가 1905/06년 로댕의 비서로 일했다. 그 결과 나온 시가 '사물시(Dinggedicht)'다.
사물시란 관찰을 통해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시다. 릴케는 관찰의 대상인 동식물을 통해 삶의 의미, 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동시에 새로운 언어표현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했다. 1911/12년에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근방 두이노성에 머물기도 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스위스로 이주, 그곳에서 마지막 생애를 보냈다. 이때 나온 작품이 유명한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친 소네트>다.
카프카는 평생을 프라하에서 살다 간 아웃사이더였다. 그는 1915/16년 성지역인 황금소로(Zlatá Ulička)) 22번지에서 작품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나온 작품이 단편소설 <소송>, <심판>, <변신>이다. 이들은 모두 그의 사후 발표되었다. 이들은 모두 자전적인 소설로 현대인의 고독과 소외, 좌절과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작품은 상징과 비유로 가득하다.
<소송>에서 은행원 요셉 카는 어느 날 알지도 못하는 이유로 투옥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는 아침에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이 독충으로 변한 걸 발견한다. 1922년까지 카프카는 자신이 겪은 삶의 고통을 이처럼 소설로 풀어냈다.
그러나 병이 악화되어 회사를 퇴직하고 요양원을 전전하며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 1924년 세상을 떠난다. 그는 프라하 동쪽 지즈코프에 있는 유대인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히브리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내면을 사랑한 이 사람에게 고뇌는 일상이었고, 글쓰기는 구원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한 형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