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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는 헤라클레스와 더불어 그리스를 대표하는 영웅이다. 신분을 증명하는 칼과 가죽신이 없었다면 아이게우스 왕의 아내인 메데이아에 독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윤기는 이 대목에서 <달마도>를 꺼낸다. 험상궂은 달마대사가 등장하는 그림말이다. <달마도>를 보면 대사의 지팡이에 신발 한 짝이 걸려있는 것이 보통이다. 신발의 전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유럽의 옛 동화 <신데렐라>, 우리나라 고전소설 <콩쥐팥쥐>에서도 되풀이된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신화를 해석하면서 거기에 갇히지 않는다. 신화 바깥의 현실과 이어준다. 신발 이야기를 하면서 이윤기는 "우리가 이력서라 부르는 것은 '신발(履,신 이)'을 끌고 온 역사(歷, 지낼 역(력))의 기록(書,쓸 서)"이라고 적었다. 우리의 신발이 온전한지, 혹시 한 짝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묻는다. 신화는 언제 발생한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아득한 선사시대 사이에 신화가 있다는 사실이다. "신화는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인지도 모른다"는 문장이 마음에 퐁당, 물음표를 던진다.' - <우리시대의 밀리언셀러는 어떻게 탄생했는가>에서.

'워낙 많이 팔린 책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일 것이다.' (아마도) 누구든 이처럼 쉽게 지레짐작할 수 있는 제목이라 설명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우리시대의 밀리언셀러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북오션 펴냄)에서 만나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반갑다. 출간 당시인 2000년대 초, 나를 사로잡은 책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밀리언셀러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책표지.
<우리 시대의 밀리언셀러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책표지. ⓒ 북오션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3권까지 나왔다. 신화 붐을 일으켰다. 여파로 초등학생용 만화 시리즈까지 출간되었고, 워낙 많이 팔린 것으로 안다. 그러니 소개할 부분도 워낙 많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나도 특히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와 '미궁'과 '신발' 이야기로 책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더욱 반갑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나이 백성들의 희생을 막고자 미노스의 미궁 속 괴물을 죽인 테세우스가 아테나이로 가는 동안 물리쳐야만 했던 온갖 도둑들 중 하나. 나그네를 집 안으로 불러들여 침대에 눕혀 침대보다 크면 잘라서 죽이고, 작으면 늘려서 죽였다는 악명 높은 도둑이다.

이윤기는 '프로크루스테스' 이야기로 융통성 없는 인간을 가리키는 말인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를 명쾌하게 해석한다. "자신의 생각에 남의 생각을 뜯어고치려는 버르장머리,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횡포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유래 한다"면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그 신화가 더욱 매력 있게 읽혔던 것은 프로크루스테스가 자신이 나그네들을 죽인 그 방법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테세우스가 다른 방법으로 프로크루스테스를 죽였다면 이 신화는 그리 특별하게 읽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은 2년 후쯤 화재로 당시 밑줄 그으며 읽었던 책은 잃었으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그 후 한동안 깊은 여운을 남겼고,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자칫하면 우리 누구나 프로크루스테스와 같은 도둑이 될 수 있다는 것. 말과 행동을 돌아보게 했다. 남의 입장을 더 헤아리는 노력도 하게 했다. 번역가로 주로 만났던 이윤기라는 작가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됐다. 이러니 책으로나마 다시 만나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반가울 밖에! 

'이 책은 원래 2000년 3월 웅진에서 출간된 전집 '밀레니엄 논술 명작 시리즈 35권'의 부록으로 집필을 의뢰받은 것이었다. 부록 제목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신화를 이해하는 열 가지 열쇠'. 이윤기(1947~2010)가 출판사로 원고를 보냈는데, 편집부원들이 돌려 읽으며 감탄했다. 부록이란 본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덤이다. 그런데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본문보다 재미있고 쓸모도 많았다. "단행본으로 출간하자"는 웅진 내부의 목소리로 이 부록은 180도 운명이 바뀐다. 해당 전집 판매가 종료된 그해 6월 단행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신화>는 당대 최고의 번역가이자 소설가, 신화연구가인 이윤기가 우리 상상력으로 해석한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점에서 단숨에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윤기는 신화 속 복잡한 계보와 고유명사의 장벽을 가뿐히 넘어갔다. 페이지마다 펼쳐지는 화려한 도판도 매력적이었다. 인문 분야 1위를 달리며 출간 9개월 만에 18만부가 팔렸다. 단권으로 끝날 계획이었는데 반응이 좋아 2권, 3권을 추가 계약했다. 2002년 7월에 1권만 50만부를 돌파했다. 마침내 2003년, 1~2권 합쳐 누적판매 100만부를 넘겼다.' - <우리시대의 밀리언셀러는 어떻게 탄생했는가>에서.

<우리시대의 밀리언셀러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는 이처럼 100만부 이상 팔린 책들이라 사람들에게 워낙 유명한 책이나 아마도 출판인들이나 알 수 있을 그런 밀리언셀러들 그에 얽힌 사연들을 풍성하게 들려준다.

책을 통해 만나는 밀리언셀러들은 <미생>, <정글만리>, <IQ84>,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아프니까 청춘이다>, <칼의 노래> 등 20권. 이들 책들의 출간에 얽힌 이야기부터 밀리언셀러가 되기까지, 내용과 저자 등, 많은 이야기들을 풀고 있다.

특히 세월호를 비롯한 땅콩 회향사건 등 유독 사건이 많았던 2014년에 밀리언셀러가 된 <미생>을 통해 샐러리맨들의 삶과 852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문제를, 무상급식 논쟁과 안철수 서울시장 출마설 등이 관심사였던 2011년 밀리언셀러가 된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통해 '5포 세대'로 표현되는 청춘들의 고뇌와 멘토가 사라진 시대를, 2012년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는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청년들과 감정노동자와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잊고 사는 휴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등 사회 문제와도 연관지어 풀고 있어 피부에 훨씬 와 닿는다.

저자는 말한다. "밀리언셀러는 사회와 시대를 읽는 렌즈다. 밀리언셀러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보인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고 욕망하는지, 어떤 것에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분노하는지가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 변화의 거대한 흐름과 문화변동의 양상이 보인다"고.

책을 그리 읽지 않는다는 우리 사회, 그럼에도 100만부 이상이나 팔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한 책들, 그 책들은 어떤 책들이며, 어떻게 독자를 사로잡았을까? 책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경우 김난도 서울대 교수가 초고에 붙인 제목은 '젊은 그대들에게'였다.(…) 김훈 소설 <칼의 노래>도 제목을 잘 뽑은 책으로 꼽힌다. 작가가 처음 가져온 제목은 '광화문 그 사내'였다.(…) 2000년 출간돼 150만부 팔린 강헌구의 <아들아 머뭇거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는 출판사가 오래 고민하고 붙인 제목이다. 당초 저자가 제안한 제목은 '비전세포'(…)삼성전자에서 20년간 일한 전옥표의 <이기는 습관> 역시 저자가 처음 붙인 제목은 '돈바꼭질(돈이 되는 숨바꼭질)'과 '삼성의 CS는 무엇이 다른가'였다. - <우리 시대의 밀리언셀러는 어떻게 탄생했는가>에서.

이처럼 책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 요소라는 책 제목에 대한 이야기나 책에 붙이는 인지,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작가, 유명 작가들의 선인세, 번역의 세계, 대형 서점 매대 1주일 관찰기 등 책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풍성한 것도 이 책을 쉽게 놓지 못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 모든 주제마다 본문과 같은 분량 가까이 들려주고 있으니 이런 정보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우리 시대의 밀리언셀러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박돈규) | 북오션 | 2015-11-20 | 15,000원



우리 시대의 밀리언셀러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박돈규 지음, 북오션(2017)


#밀리언셀러#베스트셀러#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미생#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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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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