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담양에서 열린 남도음식문화큰잔치 때였다. 명인관의 전시음식을 둘러보는데, 출품작이 모두 얇은 비닐 랩(wrap)으로 감싸져 있었다. 음식은 나무랄 데 없이 예쁘고 맛깔스럽게 보였지만, 풍미를 느낄 수는 없었다. 아쉬웠다.
그 가운데 하나, 음식을 랩으로 감싸지 않은 채 진열해 놓은 곳이 있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형형색색의 가루와 다식(茶食)이었다. 노란색과 주황색, 연두색, 검은색 등 여러 색깔로 구색을 맞춘 다식의 재료였다. 만들어 놓은 다식도 각양각색으로 예뻤다. 음식이라기보다 예술작품에 가까웠다.
"여기는 왜, 랩으로 감싸놓지 않으셨어요?""자연의 맛과 향을 직접 느껴보시라고. 다식은 자연이거든요."이순자(74·전라남도 담양군 용면) 명인의 말이었다. 이씨는 전라남도가 2013년에 지정한 '남도음식명인'이다. 이 명인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약다식은 한 마디로 자연입니다. 자연에서 채취한 씨와 열매, 잎, 꽃을 재료로 하거든요. 산딸기부터 복분자, 정금, 꾸지뽕, 청미래덩굴, 쑥, 찔레, 양송이, 은행, 들국화, 솔잎, 천초, 오디... 재료가 수백 가지요."산과 들에 지천인 나무의 열매와 이파리가 모두 다식의 재료이고, 음식이 된다는 게 그이의 얘기였다. 이 명인은 이렇게 자연에서 얻은 갖가지 식물과 약초로 다식을 만든다. 자연의 맛과 향도 고스란히 살리고 있다.
이 명인이 산야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50여 년 전이다.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직접 음식을 만들어 내놓겠다는 순박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당시는 기름에 튀기고 볶는 것이 최고이던 때였다.
이 명인은 날마다 추월산을 헤집고 다니며 산열매와 산야초를 찾았다. 길도, 길이 아니어도 가리지 않았다. 가시에 피부가 긁히고, 나뭇가지에 살갗이 찢어지는 게 일상이었지만, 그이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안 보여요. 열매를 따고, 약초를 캐는 데만 신경을 집중하니까. 나중에 보면 옷에 가시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옷이 찢어지고,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돼 있더라고요. 독초인지 모르고 먹었다가 병원에 업혀 간 적도 여러 번 있었어요."산과 들에서 돌아온 이 명인은 채취해 온 산야초를 꽃과 잎, 뿌리, 줄기, 열매 등으로 나눠 갈무리를 한다. 자연의 상태 그대로 훼손하지 않고, 효능을 고스란히 살려내기 위한 그녀의 정성이다.
산열매와 산야초를 말리는 방법도 달리했다. 그늘이나 햇볕에 말리고, 밤이슬 맞히면서 은근히 말릴 것과 솥에다 쪄낼 것도 구분했다. 그래야 저마다의 고운 색감과 맛이 살아난다. 이렇게 말린 산야초를 데치고, 찌고, 삶고, 볶아서 고운 가루로 만든다. 여기에다 볶은 찹쌀가루와 꿀을 섞어서 다식을 빚는다. 대추와 잣, 호박씨, 살구씨를 고명으로 올리기도 한다.
다식은 고소하고, 쌉쌀하고, 새콤하면서도 달착지근하고, 떫은 것 같으면서도 입맛을 자극하는 등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맛을 낸다. 색깔도 자연 그대로 오묘하다. 약리 효능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이 명인이 만드는 건 다식 뿐 아니다. 산야초를 이용한 장아찌와 과일깍두기, 매실고추장, 김치도 담근다. 복분자, 꾸지뽕 등을 이용한 잼도 만든다. 고추씨와 고춧가루, 천일염 등을 더해서 풍미를 살려낸다. 잼 고유의 맛이 살아있다는 평을 받는 것도 이런 연유다. 전통의 방식에다 그이만의 비법과 손맛으로 만들어진 음식이 수백 가지에 이른다.
"지금까지 돈에 기대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자존심 지키며 살 것이고요. 다만 이런 음식들이 보존되고 이어져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죠. 갈수록 힘이 부치기도 하고요. 명인들의 음식 만드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두면 좋겠는데. 행정에서 이런 일을 해주면 안 될까요?"다식과 자연 예찬을 가없이 하는 이 명인의 소망이다. 남도음식명인으로 지정만 해놓고 관심을 갖지 않는 행정기관에 대한 서운함이기도 하다. 명인의 이마에 드러난 주름 골이 유난히 선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