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기(1936-1997). 언뜻 생소한 이름이다. 그러나 잡지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 인문지리지 <한국의 발견> 발행인이라고 하면 기억하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한창기는 이 잡지로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맞선 뚝심의 언론인이었다.
잡지 <뿌리깊은나무>는 낡고 오래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하지만 편집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한글전용 가로쓰기를 했다. 한국 최초였다. 당시 출판계는 한글과 한자를 함께 세로로 쓰는 편집이 정형화 돼 있던 때여서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다.
한창기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되살리는 일에도 앞장섰다. 음식을 담는 그릇에서부터 노래 가락까지 잊혀져가는 우리의 고유문화를 찾아내고 알렸다. 놋그릇, 다기 등을 만들어 보급도 했다. 남도의 판소리와 귀한 가락들을 되살려 내 '천재 귀명창'이란 별칭을 얻었다.
한창기는 또 문화사업가였다. 민화 전시, 판소리 음악회 등을 열며 이것들을 문화상품으로 만들었다. 동양에서 처음으로 브리태니커 지사를 설립하고 세상에서 제일 비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가장 많이 팔기도 했다. 이는 세일즈 세계의 전설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한창기는 '꼬막의 고장'으로 알려진 전라남도 보성 벌교의 고읍리 지곡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자주 징징댔다고 '앵보'라는 별명이 붙었다. '앵보'는 그의 필명으로도 쓰였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신문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전통과 예술 그리고 꾸밈없는 언어가 보듬은 가치를 확신했다.
1970년대에 출판문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월간 <배움나무>를 시작으로 1976년부터 월간 <뿌리깊은나무>를 발행했다. 내용은 물론 표지에도 거칠고 투박한 농부의 손을 담았다. 그는 늘 낡고 오래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그러나 <뿌리깊은나무>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을 당했다. 계급의식을 조장하고 사회불안을 조성한다는 이유였다.
한창기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84년에 월간 <샘이깊은물>을 펴냈다. 다시 출판 허가를 받기 위해 여성지를 표방했다. 여성들의 한복 차림과 전통 밥상, 민중들의 사는 이야기를 그렸다. 여성지의 차원을 넘어 사람다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1997년까지 발행됐다.
그는 이어 종합 인문지리지 <한국의발견>을 11권으로 펴냈다. 이 책은 서울시, 부산시와 9개 도를 각 한 권씩 엮었다. 마을과 산하의 모습을 단순 나열하기보다 지형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굴절되고, 그 삶은 다시 우리 강토를 어떻게 가꿔 왔는지를 다뤘다.
<뿌리깊은나무 민중자서전>을 20권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민중자서전은 우리의 전통문화 속에서 우리 문화의 원형을 찾고, 민중들의 구술을 통해 그들 삶의 정수를 뽑아냈다는 평을 받았다.
한창기가 1973년부터 1987년까지 100회에 걸쳐 이끌어 낸 판소리 다섯마당 완창 공연은 우리 문화사의 신화가 됐다. 공연장은 서울 성북동의 그의 집이었다. 집을 판소리 공연장이자 굿판으로 만든 셈이다.
그는 판소리를 녹음하면서 내역과 가사를 채록하고 영어로도 출판을 했다. <뿌리깊은나무 판소리전집>, <뿌리깊은나무 팔도소리전집>, <뿌리깊은나무 한반도의슬픈소리>, <해남강강술래>, <뿌리깊은나무 판소리다섯마당>, <뿌리깊은나무 조선소리선집> 등을 펴내며 여러 산조와 민요, 강강술래 등을 회생시켰다.
차(茶)와 다기, 옹기와 반상기 등 최고 명품도 지어냈다. 한국 브리태니커 대표이사, 재단법인 언어교육 이사장, 한글문화협회 회원, 한글박물관회 이사 등을 지냈다.
한창기가 남기고 간 책과 그가 수집한 골동품은 순천 낙안마을에 전시돼 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 앞에 순천시가 세운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이 그곳이다. 2011년 11월에 문을 연 박물관에는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 <한국의발견> 등 그가 펴낸 잡지와 책, 그리고 그가 수집한 유물 등 65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낡고 투박하지만 우리의 삶속에 녹아있는 유물들이다.
한창기가 매료됐던 백경 김무규(1908-1994)의 한옥도 복원돼 있다. 1922년 구례읍 산성리에 지어진 한옥을 2006년에 이곳으로 옮겨서 다시 지었다. 사랑채, 안채, 문간채, 별채 등 여덟 채로 이뤄져 있다. 생전에 한옥을 사랑했던 한창기의 마음을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앵보 한창기가 태어난 지 80주년을 맞아 그의 꼿꼿한 삶을 압축한 융합 공연이 준비되고 있다. 순천의 풍류그룹 '퓨전국악 잽이'(대표 김경선)의 '한창기-80년 만의 귀향'이 그것이다. '뿌리깊은나무 한창기 선생 다시보기 장르융합 공연'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연출은 순천 출신의 박인규 전 KBS 프로듀서가 맡았다. 전남문화예술재단이 지원한다.
공연은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 문화가 어떻게 왜곡되고 말살됐는지를 보여준다. 이어 한창기의 연대기를 영상과 음악으로 소개한다. 한창기의 모습을 편집한 영상을 배경으로 새롭게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샘이깊은물> 창간호 표지에 실렸던 미인도 차림을 한 춤꾼이 등장해 한창기의 철학을 춤으로 보여준다. 전통을 지향한 꽃상여와 상여소리도 재현한다.
퓨전국악 잽이를 비롯 보성소리 명창 윤진철, 춤패 '바람' 대표 강주미 등이 출연한다. 별량 상여소리에는 서화석 등 뒤소리꾼들이, 씻김굿에는 박은하, 이은숙, 김선경 등이 참여한다. 12월 29일 오후 6시 순천대학교 우석홀, 12월 30일 오후 4시 고흥문화회관 김연수실에서 공연된다.
'한창기-80년 만의 귀향' 공연을 돕고 있는 강상헌 우리글진흥원장은 "한창기 선생은 우리 전통의 생활과 문화가 낡고, 추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받던 시절에도 늘 깐깐하게, 그러면서도 설렘을 갖고 미지의 세상을 그리워하며 살았다"면서 "우리가 한창기 선생을 잃거나,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강 원장은 이어 "한창기 선생을 아는 일은 우리 현대사에서 우리 고유의 문화가 어떤 곡절을 겪었는지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한창기 다시 보기, 한창기 제대로 보기가 절실한 요즘이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