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8월 15일, 처음으로 수도권 지하철이 개통됐다. 당시엔 변변한 기술력이 없어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전동차를 운행할 수밖에 없었다. 사십년이 훌쩍 지난 지금, 지하철의 풍경은 놀랄 만큼 달라졌다. 1호선에 불과했던 지하철은 9호선까지 확장되었다. 그물망처럼 이어진 복잡한 지하철 노선도를 볼 때마다, 어두컴컴한 지하 세계를 밝히는 수많은 전구들이 떠올랐다.
지하철은 시대의 삶이 담겨있는 개방적인 공간이다. 한 장의 티켓만 있다면, 마법처럼 스르르 열리는 지하철의 자동문을 넘나들 수 있다. 물건을 파는 상인부터 도움을 호소하는 사람들까지, 비좁은 지하철의 통로를 오가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났다.
지하철의 노란 안전선 앞에서 삶의 운행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방지책으로 투명한 안전 유리문이 세워졌다. 유리문을 지날 때마다 철로 위로 뛰어들고 싶은 암담한 삶이 생각났다.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저 유리문으론 참담한 절망까지 막아낼 순 없을 것이었다.
출퇴근 시간대의 지하철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빽빽한 성냥갑 같은 지하철을 탄 사람들은 구겨진 신문지처럼 일그러졌다. 숨 막히는 지하철에 또 다시 발을 밀어 넣어야 했다. 서로의 발등을 찍어가며 각진 어깨의 모서리들이 수없이 부딪혔다. 야윈 성냥개비처럼 몸을 움츠려야만 출퇴근의 전쟁터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윤필의 <지하철도의 밤>은 어떤 지하철의 풍경을 그려낼까. 금발을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한 여인의 표지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그 옆모습은 친숙했다. 어렸을 적 일요일의 달달한 늦잠을 포기하며 보았던 만화영화의 한 장면이 그 위로 겹쳐졌다. 그녀는 <은하철도 999>의 여주인공인 '메텔'과 비슷했다.
지하철에서 만난 의문의 여성, 넬라
1996년 고등학교 2학년인 홍석규. 지하철에서 만난 노란 생머리의 여인에게 시선을 빼앗긴 평범한 남학생이었다. 석규는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가고, 지하철을 타고 학원에 갔다. 가끔 오락실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대한민국 '고삐리'의 일상은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는 지하철처럼 팍팍했다. 2호선의 순환열차를 타는 석규는 빡빡한 스케줄을 매일 반복했다. 왜 복잡한 레일이 필요한지 잘 모르면서도 그냥 하라는 대로 해야만 했다.
그런 석규에게 넬라는 신기루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 2호선을 맴돌고 있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것들이 석규의 마음 속에서 꿈틀꿈틀 솟아났다. 누군가를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소년의 마음은 지상에 내려앉은 별처럼 반짝였다.
넬라는 환승을 하지 않으면서도 늘 환승 구간과 가까운 칸에 앉아 있었다. 그곳이 직장인 것처럼 그 자리를 지켰다. 지하철에서 쓰러진 의식불명의 남자를 향해 주저 없이 달려가 도와준 적도 있었다. 거지라고 사람들이 놀리는 맹인 아저씨와 정답게 얘기를 주고 받았다. 마치 지하철을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가족인양 거리낌이 없었다.
넬라와 친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넬라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석규의 마음은 가벼워졌다. 진짜로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을 만난 듯 했다. 석규는 은밀한 왕따로 친구 없이 외롭게 학교를 다녔다. 석규를 향해 엄마는 항상 불만족스러운 성적표만 내밀었다. 그것 말고 다른 할 말들이 석규의 마음속을 짓눌렀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 학교의 종착역이 대학이라면,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보고 싶었다.
<지하철도의 밤>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이 만화 속 풍경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지하철을 묘사하고 있다. 지하철의 막차를 탈 때면, 텅 빈 지하철은 꼭 쓸쓸하게 버려진 외로운 짐승 같았다.
삭막한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가는 한 마리 외로운 전갈이 지하의 어둠을 갉아 먹는 듯 했다. 땅 속의 칠흙 같은 어둠 한가운데를 달려가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떠올렸다. 신속하고 빠르지만 않다면,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이 시커먼 암흑뿐인 지하철을 탈 이유가 없었다.
멈출 것 같지 않을 지하철도 위로 어둠이 수북이 내려앉았다. 달리지 않는다면, 지하철도 레일도 모두 고철덩어리에 불과했다. 거대한 도시들을 이어주는 지하철도의 촘촘한 그물망을 통해 우리가 낚아챌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날쌘 도시의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 자문해본다.
"석규야, 너의 시간을 살아"1996년 12월 31일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를 잇는 노쇠한 당산철교가 끊어졌다. 당분간 2호선 지하철은 순환되지 않을 것이다. 뚝 끊겨버린 당산철교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삶의 허망함'을 세워놓았다. 낡은 철교는 언제든지 철거될 수 있었다. 2호선의 동그라미도 언제든 뭉개질 수 있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국민 소득 1만 달러의 시대'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내걸었던 1996년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대입에 낙방한 석규는 군대에 갔다.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를 건너지 못했던 그 사이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1999년 11월 22일 당산철교가 재개통됐다.
세상은 변했다. 군복무를 마친 석규는 다시 지하철을 탔다. 어두운 차창 밖으로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석규는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승차권이 있다. 그걸 가진 사람들은 사회의 중심으로 갈 수 있다. 그 표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진짜 승차권을 갖고 지하철을 탄다. 고장난 비디오테이프가 구간반복 하듯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2016년 지하철의 풍경은 어떤가. 고개 숙여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한 무리의 사람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똑같은 자세를 취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싸늘해졌다. 석규는 그 시절의 넬라를 떠올렸다. 넬라가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 차 창 밖으로 보름달처럼 환하게 빛났다.
"석규야! 너의 시간을 살아."우리는 지금 어떤 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도시의 리듬을 벗어날 수 없는 슬픈 삐에로가 혹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까. 한밤중에 깨어나 어두운 유리창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본다면, 은밀한 자신만의 이야기에 오롯이 귀 기울일 수 있을지.
이 책의 제목에 홀딱 빠져 처음 책장을 넘겼을 때,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요즘 만화가 그려내는 삶의 단면들이 어느 소설보다도 리얼하지 않나. 윤태호의 <미생>이나 최규석의 <송곳>이 그랬다. 도시의 일상이 담겨 있는 지하철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만으로도 이 만화에 거는 기대는 컸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진다고 했던가. 미리부터 부풀려진 나의 기대감이 책장을 넘기는데 적잖은 장애가 되었다. 다소 밋밋한 사건 전개가 아쉽지만, 1996년이 그리운 사람들에게 이 책은 편안한 승차감을 안겨주는 타임머신이 돼줄 것이다.
노스탤지어에 젖어 보는 것도 좋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변하지 않는 삶의 본질적인 물음을 찾아보면 어떨까. 그건 분명 여전히 응답받지 못하고 있는 시대의 진실을 곱씹어보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지하철도의 밤>, 윤필 저, 창비 1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