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초년생 시절에는 일에 대한 욕심이 많았어요.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자격증을 따고 이직을 했을뿐더러 중요한 일에서 배제될까봐 손을 번쩍 들곤 했죠.
벌써 13년 전의 일입니다. 결혼을 앞둔 해에 이직하기 전 회사에서 커다란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죠. 프로젝트에서 담당할 포지션을 정하는 자리에서 제 앞으로 올 포지션을 남자 부사수에게 양보하면 어떠냐는 제안을 받고 발끈했었습니다.
야간대학원을 다니고 결혼을 앞뒀으니 바쁘지 않겠냐는 이유였는데요. 대학원이야 휴학하면 되고, 결혼이 일과 무슨 상관이냐며 강하게 해당 포지션을 원한 제게 결국 일이 주어졌죠. 대학원은 휴학하고 졸업을 1년 미뤘으며,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첫 출근날 12시가 넘어 퇴근을 했을 정도로 강행군이었는데…. 그때는 일에 욕심을 부리고 개인의 일상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어요(만약 제가 남자였더라도 결혼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로 포지션 양보를 제안받았을까는 아직도 궁금합니다).
선배맘들을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봤는데...
출산 후 14개월 동안 휴직했다가 복직하게 된 부서에서는 일 때문에 토가 나올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든든한 친정엄마라는 육아 지원군이 있어 가능했던 일인데요. 오전 7시에 집을 나서서 오후 11시 넘어 집에 도착하는 일이 일상이고, 때로는 다음날 새벽 1~2시 퇴근, 주말 출근도 비일비재했죠. 어느 해 12월에는 아홉 번의 주말 중 일곱 번을 평일처럼 출근해서 근무한 적도 있었습니다. 결국 쌍둥이 남매의 육아를 오롯이 전담하시던 친정엄마 건강이 안 좋아지시고 나서야 전 다시 가족 간호와 육아로 10개월간 휴직하게 됐어요.
제가 다니는 회사는 규모가 좀 큰 편이라 복귀할 때 원래 있던 부서에 재배치되는 경우가 거의 드문데도 열심히 일했던 이전 모습에 대한 회사 쪽의 기대감 때문인지 휴직 전 부서에서 강하게 끌어줘 원래 자리로 복귀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한번 경험했던 힘든 상황에 저 스스로 몸이 움츠러들더군요. 가뜩이나 친정엄마가 항암치료를 시작하시면서부터 저는 어떻게 하면 많은 일을 부여받지 않고 숨어서 지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워킹맘이 돼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제안하고 싶지만 나서서 말하면 그 일이 내게 떨어질까 봐 속으로 꾸욱 눌러야 하는 느낌을 몇 번 받다 보니 이젠 회의 시간에도 무감각해지고 있어요.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아이를 핑계로 회사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은 선배맘들을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봤던 제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죠. 저는 공과 사를 구별하며, 두 가지 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중심이 바뀌다그런데 요즈음 제 생활의 중심은 아이들에게 쏠려있습니다. 쌍둥이이고 3월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는 큰 변화를 겪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해보지만 어쨌거나 일과 육아 중 육아 쪽으로 중심이 기울어져있는 건 사실이에요. 언젠가부터 적어도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집에 도착하려고 사무실에서 오후 8시엔 퇴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회식을 강요당하지 않을뿐더러 제 할 일만 딱 하고 퇴근하게 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사무실에 덜 오래 머문다는 것은 일을 덜 한다는 것으로 여겨져요. 그만큼 조직에서 인적자원으로서의 가치를 덜 인정받는다는 얘기와 다름이 없는데요. 처음부터 무능했다면, 일 욕심이 없었다면 모를까 하루하루 사무실에서의 존재감이 조금씩 옅어지는 느낌을 체감하는 게 얼마나 속이 쓰린지…. 동료들은, 남편들은 알까요?
중요한 일의 중심에서 성공적으로 사업을 수행하고 치하를 받으며 치열하게 보낸 경험이 있었던 만큼 중요한 일에 배제되고 승진 포기자 대열에 합류했음이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의 상실감. 일 잘하는 직원에서 별 볼 일 없는 직원으로 변해 자괴감에 빠지기까지는 1년, 아니 반년도 채 안 걸린 것 같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왕년에 나는 이랬었다'는 존재감으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얼굴에 철판을 깐 듯 그냥 뻔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한 부서에 오래 있어서, 한 업무를 대체인력 없이 오래 해낸 까닭에 저의 이른 퇴근을 콕 집어 지적하는 선배가 없기는 했죠. 하지만,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저를 찾던 시절을 생각하면 현안에서 열외가 된 느낌, 점점 잊히는 느낌에 '대강 이렇게 다니다가 나이가 들면 퇴직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루 말할 수 없이 서글퍼지더군요.
한직으로 밀려난 나, 오히려 감사할 타이밍인가요?
연말과 연초에 희망퇴직과 승진으로 인해 조직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데, 언젠가부터 회사에서의 시간이 느려지고 지금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맴돌고만 있는 것 같아 더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3일 SBS스페셜 <엄마의 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남편이 원하는 '일하는 아내'란 돈을 벌면서도 육아와 집안일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것이더군요. 즉 일이 많지 않은 회사에 다니는 거죠. 방송에서 아내가 일을 위해 혹은 자기계발을 위해 공부를 더 하기를 원하자, 육아가 오롯이 남편 몫으로 남겨질까 봐(장모가 도와주는데도 불구하고) 아내를 '나쁜 엄마' '나쁜 아내' '나쁜 딸'로 정의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부부싸움을 한 집이 많았더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저의 퇴근이 빨라지자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아이들, 친정엄마, 남편입니다. 결혼해서 아이의 엄마가 되면 공부를 잘했든 못 했든,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든 '엄마 > 아내 > 며느리(딸)'의 역할을 더 기대하게 마련인가 봅니다. 일이나 육아 어느 쪽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보니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은 무리고, 아이들이 커 감에 따라 육아에 메이는 시간도 줄어든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점점 더 회사에서 '월급도둑'이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점점 힘들어집니다.
지금. 한직으로 밀려난 저의 상황이 육아에 있어서는 오히려 감사할 타이밍인 걸까요?
내 '자부심'은 언제 되찾을 수 있는 걸까우선순위에 맞게 양손에 든 삶의 짐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배워가는 시기도 있는 거라고, 이런 경험이 긴 인생을 봤을 때 도움이 된다고 누군가는 말합니다. 요즘 시대에 굵고 짧은 것보다는 가늘고 긴 게 좋다는 농담도 덧붙여서 말이죠. 혹자는 이런 시기일수록 자기계발에 힘쓰며 칼을 가는 시간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도 합니다.
비교적 덜 바쁜 회사 일로 일시적인 휴직으로 인해 아이들과 공유할 추억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그로 인해 단단해진 아이들과의 관계가 저를 위로해주긴 합니다. 휴직하기 직전의 바쁜 상태를 계속 유지했더라면 몸이 상해 퇴사하거나, 친정엄마가 지금보다 훨씬 더 아프셨거나, 아이들의 정서적·학습적으로 구멍이 났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와 똑같은 모습의 워킹맘으로 자라날 딸을 위해서라도 억지로 직장에서 버티고 싶은데, 딸을 키우느라 어느덧 상실해버린 일에 대한 자부심은 대체 언제쯤 되찾을 수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네이버 개인블로그(http://blog.naver.com/nyyii)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