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번에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그동안 유럽여행에서 가보지 못했던 룩셈부르크(Luxembourg)를 다녀오기로 하였다. 룩셈부르크는 아주 작은 나라여서 솔직히 큰 기대를 가지고 방문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차가 룩셈부르크역에 도착하면서부터 룩셈부르크는 아주 깨끗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역 밖으로 나서면서 느껴지는 쾌적한 공기는 첫 느낌부터 상쾌함을 느끼게 했다.
역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받은 지도를 들고 룩셈부르크의 구시가를 찾아 나섰다. 구시가까지 가는 길의 건물들은 화려하지 않으나 심플하면서도 세련됐다. 거리는 정돈되어 있으며 정갈하고 깨끗하며 조용하다. 구시가로 들어서자마자 오랜 중세 건물들과 절벽에 버텨 선 요새건물이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나를 맞이했다. 나는 이 아름다운 도시가 왜 관광도시로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 아름다운 도시가 왜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나는 구시가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다름 광장(Place d'Armes)을 가장 먼저 찾아가기로 했다. 지도를 보고 있으면 다름 광장 찾아가는 길이 꽤 복잡해 보였지만 직접 걸어가 보니 구시가가 넓지 않아서 아주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요새 절벽에 맞닿은 시메이 거리(Rue Chimay) 남단에서 약 250m 정도 걸어서 북쪽으로 올라가자 룩셈부르크 시티의 중심 광장, 다름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 이름의 '아름(arme)'은 프랑스어로 무기라는 뜻이다. 과거에 룩셈부르크를 방어했던 군대가 이 광장을 연병장으로 사용해서 무기의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히틀러가 이 중앙광장에 무기를 모두 집결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무기의 광장' 주변은 도로와 건물들이 광장을 중심으로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고 룩셈부르크 시내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 무기의 광장 안으로 들어섰다.
다름 광장은 '룩셈부르크의 응접실'로 불릴 정도로 번화한 곳이다. 룩셈부르크를 여행하는 여행자 모두가 추천하는 중심광장으로 오후 시간이 되자 생동감이 넘치기 시작했다. 다름 광장에서는 전시회, 집회 등 여러 행사가 열리고, 주말마다 다양한 소품 등 앤티크한 가정용품들을 거래하는 벼룩시장이 개최된다. 나는 연말연시를 맞아 광장의 이곳저곳에 들어선 프리마켓의 가게들을 구경하기로 했다.
다름 광장의 동쪽 끝단에는 이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룩셈부르크 시의 시티 센터로 이용되고 있는 세르클 뮤니씨플(Cercle Municipal) 건물이다. 건물 발코니 위쪽의 띠 모양의 작은 벽인 프리즈(frieze)에는 룩셈부르크 시의 헌장이 제정될 당시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시민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광장 바로 옆에 시민들의 문화행사를 위한 멋진 건물을 세워 놓은 것이 참으로 호감이 간다. 윤택한 나라의 살림이 시민들의 삶에도 잘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져서 고풍스럽게 보이는 이 시티 센터 건물에 사용된 석재들을 자세히 보니 석재들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다. 룩셈부르크 건축물 역사상으로는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1904년~1909년에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이다. 구한말에 서울시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들과 비슷한 나이의 건물이다. 서울의 구한말 건물들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이곳에서는 백 년 역사의 건축물은 젊은 축에 들어간다. 수많은 중세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구시가와 광장 주변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부럽기만 하다.
외국여행 중 맘에 드는 물건 바로 사야 하는 이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프리마켓 가게들 지붕에 걸린 노란 조명에 하나둘씩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주변이 어두워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광장 안으로 들어와서 겨울 밤을 즐겁게 맞이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옛 장터에서 풍성한 먹거리들을 팔듯이 소시지나 햄버거, 커피, 빵들을 파는 가게들이 많고 먹거리를 파는 가게들 앞에는 사람들이 이미 몰리고 있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광장 안은 많은 인파로 흥겨운 분위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광장의 이곳저곳을 사진 찍고 있으니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나에게 다가와 장난을 건다.
"오! 사진! 사진을 많이 찍네요. 사진 잘 찍으세요?"그러면서 내 사진기를 둘러본다.
"룩셈부르크 사진을 찍을 거면 내 사진도 찍어주세요. 나도 룩셈부르크에 사니까요."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성격도 쾌활하게 장난을 친다. V자를 그리는 룩셈부르크 여학생의 사진을 찍어주며 유쾌하게 함께 웃었다. 젊은 날의 여학생들 4명은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광장의 활기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어린 여학생들이 추천해준 인형가게에 가서 룩셈부르크의 인형을 구경했다. 룩셈부르크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목각 병정인형들이 줄을 맞추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18세기에 독일 뉘른베르크(Nürnberg)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해 요새도 유럽 전역에서 인기 있는 병정인형이다.
이 병정인형들은 겨울에 인기 있는 뮤지컬 <호두까기 인형>에 항상 나올 정도로 겨울을 장식하는 장난감 병정들이다. 겨울철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용이나 겨울 행사장의 장식용으로도 많이 이용된다.
검은 모자를 쓰고 똑같이 검은 콧수염을 기른 병정인형들이 묘하게 유럽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몇 군데 가게를 더 둘러보고 이 병정인형을 사려고 했는데 결국은 못 사고 말았다. 역시 외국여행 중에는 사고 싶은 물건이 있는 곳이나 다시 둘러보고 싶은 장소를 한 번 지나쳐 버리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광장의 서쪽 중앙에는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밴드스탠드(bandstand), 즉 무대가 자리 잡고 있다. 추운 겨울을 맞이하여 눈사람 인형과 목각병정인형들이 무대의 양쪽을 지키고 서 있다. 연중 여름 축제를 비롯한 다양한 이벤트가 개최되고, 단독 연주와 오케스트라 등 뮤지션들의 연주가 진행되는 무대이다.
이 무대의 대형 스피커를 통해 유럽의 겨울밤을 풍성하게 하는 음악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룩셈부르크 시민들은 광장의 스탠드에 기대어 맥주와 소시지 등을 먹고 마시며, 혹은 광장 주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서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나라 햄버거 패티 2배의 룩셈부르크 버거
광장의 서쪽 끝, 어두운 겨울밤 하늘 위로 높이 솟은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룩셈부르크의 국민 시인인 에드몬드 드 라 퐁텐느(Edmond de la Fontaine, 1823년~1891년)와 룩셈부르크의 국가를 작사한 시인 미셸 렌츠(Michel Lentz, 1820년~1893년)를 위한 기념비이다.
왼편의 남성 석상은 오른쪽 어깨에 망치를 걸어 메고 있고 여성 석상은 손으로 부지런히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망치를 든 사람은 철을 제련하는 대장장이이고, 이 대장장이는 룩셈부르크를 부자나라로 일으킨 철강산업을 상징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 석상은 작은 국토 면적에도 불구하고 부국을 일구어낸 룩셈부르크인들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돌로 만든 기념비 위 꼭대기에 청동으로 만든 사자상이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사자는 대공(Grand Duch)이 다스리는 룩셈부르크의 영지를 의미한다. 룩셈부르크의 정식 명칭은 룩셈부르크 대공국(Grand Duch Luxembourg)이니 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공의 이미지를 기념비 제일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왕이나 대공이 없는 나라에서는 국민들이 기념비의 주인공이지만 이 기념비는 대공이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민국'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느낌의 기념비이다.
광장의 저녁시간에 가장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은 어린이들의 놀이기구이다. 어린 아이들이 탄 장난감 스포츠카와 오토바이가 회전목마 같이 돌아가고 있다. 룩셈부르크에서도 젊은 엄마, 아빠들은 신나 하는 어린 딸과 아들을 돌보며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 작은 놀이지만 다름 광장의 분위기를 마치 테마파크처럼 흥겹게 만들고 있다.
이곳에도 우리나라 시골 장터에나 있는 장난감 뽑기 가게가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컨베이어 벨트 같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작은 물길 위에 고리가 달린 플라스틱 오리들이 지나가면 낚싯대를 가진 사람이 오리 장난감을 낚아채는데, 낚아챈 오리 개수만큼 정해진 가격대의 장난감을 받아가는 것이다. 부모와 함께 온 한 어린이가 갓난 동생은 옆에 앉히고 아예 가게의 좌판 위에 올라가서 오리를 낚느라고 여념이 없다.
광장 내에서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게는 수제 햄버거 가게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서 가게 안에 햄버거 빵이 가득 쌓여 있을 정도로 성업 중이다. 어깨가 떡 벌어진 튼튼하게 생긴 아가씨가 햄버거 빵에 쇠고기 패티를 담아주고 있다.
비싼 룩셈부르크 물가를 고려하면 햄버거 가격도 아주 싼 편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다가 패티와 양상추가 가득 들어간 햄버거 한 개를 받아들었다. 햄버거 빵으로는 빵이 조금 딱딱한 것이 불편하지만 그 안에 들어간 고기는 우리나라 햄버거 패티의 2배는 될 정로 굵고 고기도 싱싱하다. 추운 날의 따뜻한 햄버거 한 개가 여행의 피곤을 한 번에 날려보낸다.
광장 안에 모인 사람들은 소시지와 함께 맥주도 마시고 차도 마시면서 지인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국민소득이 높다는 이 나라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차분하게 이야기를 즐기고 있었다. 오히려 작은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더 분위기가 따뜻한 것 같다.
이 광장은 룩셈부르크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가장 잘 품고 있었다. 직장 일을 끝내고 이렇게 자유롭게 한가한 저녁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 나는 광장 중앙 좌판의 천막 아래에서 룩셈부르크 시민들과 함께 햄버거를 먹으며 겨울밤을 바라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약 500 편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