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스펙'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만약 원시 사회에서의 스펙을 찾는다면, 아마도 건강한 육체가 아닐까. 현대 사회에서의 스펙이란 딱히 한 가지로 단정 짓기가 어렵다. 시대의 가치는 다양해졌다. 그에 따라 개인이 갖춰야 할 스펙의 종류도 늘어났다. 학력, 외국어, 자격증, 상장, 봉사, 경력까지 웬만한 사회인도 갖추기 어려운 것들을 미리 따놓아야 했다.
그래서일까. 책을 볼 때도 먼저 겉표지부터 살핀다. 작은 책날개 안에 숨겨진 작가의 경력을 훑어본다. 어떤 상이라도 받았는지, 어떤 평론가가 추천했는지 따져본다. 이 방만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나려면, 정보를 해석할 자기만의 잣대는 필요하다. 그러나 형식적인 권위에 의존해 책의 가치를 판단하지는 않는지, 뒤돌아보게 된다.
유명 작가의 추천은 없지만, 오랜만에 만져보는 전율
여기, 한 권의 소설집이 있다. 권위 있는 평론가의 해설도 없고, 그 흔한 유명 작가의 추천 글귀 하나 없는 아주 솔직담백한 책. 책머리의 문장에 찌릿찌릿 가슴 한 조각이 떨려왔다. 문장 속에 녹아든 짭쪼롬한 소금기에 혀끝까지 얼얼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전율이었다.
소설가 5인이 뭉쳤다. 양진채(조선일보), 이경희(실천문학), 정태언(문학사상), 조현(동아일보), 허택(문학사상). 그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였다. 2008년에 등단한 결코 젊지 않은 소설가들.
5인의 소설가들에게 2008년은 꿈이 현실로 다가온 감동의 순간이었다. 수백 혹은 수천 대 1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한 것과 다름없었다. 신인 소설가라는 새 배지를 가슴에 단 그들은 얼떨떨했다. 젊지 않은 신인이었고, 갑작스러운 등단이었다.
그래도 써야만 했다. "박카스를 마시며 썼고, 줄기차게 커피를 홀짝이며 썼고, 술에 취해 썼고, 꿈에서도 자판기를 두들겼다." 이전과는 다른 소설을 구사하기 위해, 신인다운 새로운 시선을 담아내기 위해 홀딱 밤을 새웠다. 그러나 쓰는 행위를 반복할수록 이상하게 그들의 이름은 독자들에게서 멀어져갔다.
가만히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격려했다. 소설가의 첫 배지를 달았던 2008년을 배경으로 소설을 써보자는 진지한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의기투합은 신선했다. 출판문화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제작 지원금을 받아 책을 출판할 수 있게 됐다.
단독으로 개인 소설집을 낼 때보다 마음이 더 쓰였다. 자신의 작품이 동료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치열하게 썼다. 그들은 자주 모였다. 서로의 작품에 날카로운 칼날을 대어가며 혹독한 시간들을 보냈다.
이 시대 평범한 사람들의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5인의 중편소설집 <선택>은 그렇게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들이 녹여내는 중편 소설의 무게는 달랐다. 화려한 문장에 집착하는 요즘 소설과는 달리,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가볍지 않은 스토리가 있었다.
양진채의 '플러싱의 숨 쉬는 돌'에선 중년 남자의 가슴 속을 굴러다니는 두 개의 돌이 등장한다. 한때 미국에서 유행했던 페트락(pet-rock)을 가지고 귀국했던 삼촌. 광화문 촛불 집회 현장에서 다시 만난 그녀. 두 개의 돌이 그려내는 기억의 곡선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엔 결코 씻어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살아 숨 쉬는 자신만의 돌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묵직한 가슴을 만나게 된다.
이경희의 '달의 무덤'은 태안반도 기름유출 사고로 술렁거리는 섬사람들을 그려내고 있다. 사고 피해 보상 문제로, 서울로 향하는 '시위원정대'까지 꾸려졌다. 잊고 있었던 막달이의 죽음을 부각시키면서, 보상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거대한 자본 앞에서 억지 눈물을 쥐어짜는 섬 사람들. 그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간 시커먼 기름띠는 대체 누가 유포한 것일까.
정태언의 '성벽 앞에서-어느 소설가 G의 하루'는 꼭 그들의 자전소설 같다. 소설집을 내기 위해 출판사 사장과의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G는 재건된 숭례문 앞을 서성거렸다. G는 저 성벽의 돌덩이를 들어보고 싶었다. 전설 속의 아기장수라면 능히 저 돌을 들어 올릴 것이었다. 어떤 힘을 발휘해야 자기만의 성벽을 갖춘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마음 다잡고 자신만의 '화두'에 몰입할런지, 단단한 성벽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조현의 '선택'은 기발하다. 800미터 계주를 하듯 STPI의 시물레이션의 장면들이 바톤을 이어받으며 빠르게 재생됐다. 인간의 기억을 단기적으로 통제하는 STPI 공법. 주사액처럼 주입되는 가상현실과 의식이 통제하는 실제현실은 어떻게 구별될까. 가상과 실제가 공존하는 인간의 뇌구조에서, 그 경계선은 불분명했다.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체험자들의 독백이었다. 흔들어 깨워 줄 그 누군가가 필요한 건 소설 세계에서만이 아닐 것이다.
허택의 '대사증후군'은 세계 금융 위기에 내몰려진 한 가장의 비화를 담고 있다. 2008년 그는 혈당 지수 300을 오가는 대사증후군 응급환자가 됐다. 소설의 단락마다 붙여진 제목엔 혈당지수와 혈압, 병명을 기록한 연도 별 증상이 기록돼 있다. 소설은 한 인간의 육체적 몰락이 어떤 삶의 조건들을 거쳐 왔는지 리얼하게 보여줬다. 젊었을 적 와리바시 같았던 남자는 기름진 뱃살에 둘러진 악어가죽 벨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는 마음속으로 절절이 외쳤다.
"아들의 눈 속에서 허기가 서려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만든 아들의 허기였다. 어쩔 수 없었다. 나만 원망하라고 속으로 외쳤다. 못난 애비 때문에 허기지게 살아간다고... 제발 나를 닮지 말고 허기를 지혜롭게 극복하라고. 몸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책장을 덮으면서 나의 2008년이 떠올랐다. 그 무렵 방송통신대학교에 들어가 머리를 비틀어가며 영미소설을 들여다봤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축제인 양 아이들과 손잡고 촛불 집회가 열리는 광화문을 활기차게 걸어 다녔던 것도. 촛불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아이들의 눈빛 속에 담겨질 세상이 그렇게 따뜻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의 느낌도 그랬다. 그건 5인의 소설가들이 내린 '선택'이었지만, 우리 모두가 내려야 할 '선택'인지도 몰랐다. 이를 악물고 버둥거리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의 이치는 누구라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런 세상이 거대한 성벽처럼 느껴질 때마다, 가슴 속엔 절망의 기름띠가 둘러졌다. 그 시커먼 기름덩어리들을 무엇으로 닦아낼지 막막했다. 수없이 꿈과 현실의 경계선을 넘나들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서로 상반된 말들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러는 동안 병증 하나는 달고 살아야 하는 나이가 돼버렸다. 돌처럼 딱딱해진 무언가를 가슴에 묻어둬야 했다.
그래도 아직 우리의 '선택'은 끝나지 않았다. 이 한 권의 소설책이 전하는 은밀한 메시지였다. 선택 받지 못했다고,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 소설을 실을 지면을 스스로 찾아낸 5인의 소설가들이 속삭이는 삶의 진실이었다.
5인의 소설가가 엮어낸 한 권의 소설책. 그들은 함께 보듬었던 어깨를 아직 풀지 않았다고 했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친구가 옆에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들은 자칭 '암중모색'이라 했지만, 원래 모색이란 깜깜한 한밤중에나 가능한 게 아닐까. '색다른 기획, 새로운 시도'라는 꼬리표가 어울리는 이 소설집이 출판시장의 변화에 작은 물꼬를 터준 것은 자명했다. 멀리서 그들의 '암중모색'을 응원한다.
덧붙이는 글 | <선택> 양진채, 이경희, 정태언, 조현, 허택 / 강 / 값 1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