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토박이인 A(43)씨는 1997년 IMF 위기가 닥치자 다니던 대학을 중퇴해야 했다. 이후 PC방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던 그는 먹고살기 위해 '수행기사'가 됐다. 수행기사란 기업 회장이나 임원의 차량을 운전하는 직업이다. 12년 동안 수행기사로 일해온 그는 최근 몸담고 있던 '대표 주류기업'에서 스스로 나왔다.
A씨는 "수행기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세상에 미련이 없다"라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가 7개월간 수행기사로 근무한 '대표 주류기업'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주말근무 거의 없다고 하더니 한달에 평균 3일밖에 못 쉬어 A씨는 지난 2014년 구인.구직 사이트에서 '대표 주류기업'을 자처하는 (주)무학(아래 '무학')의 정규직 수행기사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무학은 순한 소주 '좋은데이'를 히트시킨 경남 향토기업으로 매출이 1조 원대에 이르는 주류기업이다. 그는 서류전형을 통과한 뒤 면접을 보러 갔다. 그를 면접하는 자리에서 상무, 팀장 등 면접관들은 이렇게 말했다.
"본사가 마산이기에 회장님은 서울에 2-3일 정도만 계시니까 그때만 수행하면 된다. 주말 근무는 한달에 기껏해야 한두 번 정도다.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주말근무, 보초, 대기는 거의 없으니 따로 수당은 없다."연봉에 퇴직금이 포함된다는 말이 좀 걸리긴 했지만 A씨로서는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면접관들은 "회장님이 안 계실 때는 사무실 마케팅 업무를 보라"라며 "우리는 기사가 아닌 직원을 뽑는다, 기사라는 고정관념을 버려라"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같은 해 4월부터 최재호(56) 무학 회장의 수행기사로 일하면서 그가 직접 겪은 일들은 면접관들의 말과 전혀 달랐다.
'마케팅팀 주임'으로 발령난 A씨는 출근한 첫날인 2014년 4월 1일(차량운행일지 기준) 오전 8시 30분에 출근해 다음날 새벽 1시 45분에 퇴근했다. 4월 2일에도 8시에 출근해 다음날 새벽 1시에 퇴근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면접관들은 "주말근무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한달에 평균 3일밖에 쉬지 못했다. 4월과 5월에는 각각 하루와 이틀만 쉬고 최회장을 수행했다.
A씨는 14일 <오마이뉴스>와 만난 자리에서 "부모님 제사가 6월과 8월에 있었는데 제삿날 1주일 전에 회장님에게 말씀드렸다"라며 "하지만 부모님 제삿날에도 운전시켰다, 무학에 근무하는 동안 부모님 제사를 한번도 챙기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회사 간부들에게 이러한 사정을 호소했지만 "당신이 하는 일이 운전기사인데 당연히 참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A씨는 최 회장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과 딸까지도 수행했다. 심지어 최 회장 서울 자택의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일까지 맡아서 처리했다. 그는 "쓰레기 분리수거는 제가 거의 도맡아서 했다"라며 "'내가 왜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라고 토로했다. 그는 "청담동 애견센터에 맡긴 개를 찾아오기도 했고, 회사에 있는 생수를 회장님 집에 배달하기도 했다"라고 덧붙였다.
휴일근무수당 등 안 주다가 퇴사 직후 1118만 원 지급하지만 근무시간 외 수당이나 휴일근무 수당 등은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 A씨가 문제를 제기했지만 간부들은 되려 "회사 방침이 원래 그렇다, 다른 회사와 비교하지 마라"라고 그를 타박했다. 결국 퇴사하면서 그가 "연장근로수당, 휴일근무수당 등 못 받은 것을 임금체불로 노동부에 제소하겠다"라고 하자 그때서야 1118만여 원을 지급했다(2014년 11월).
무학쪽은 A씨에게 미지급 수당을 주면서 '합의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이 합의서에는 '회사를 상대로 근로계약 및 임금체불 등에 관한 일체의 진정, 고소 및 어떠한 민원도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또한 A씨를 면접하는 자리에서 "금방 그만둘 수 있으니 3개월간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그 이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주겠다"라고 약속했지만, 이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입사한 직후에도 회사는 '3개월 뒤에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겠다'고 했다"라며 "하지만 나중에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해서 기가 차더라"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A씨가 2세 경영인인 최재호 회장에게 인간적으로 대우받은 것도 아니었다. 욕설은 다반사였다. "출근 첫날부터 폭언했다"라는 A씨는 "회장님은 저랑 대화를 많이 나누는 분은 아닌데 자기가 얘기할 때 '야 인마', '야 새끼야'라고 욕했다"라며 "술에 취했을 때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쌍욕을 퍼부었다"라고 주장했다.
A씨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골프장클럽 하우스에서 '이 새끼가 정신나간 새끼네'라고 욕하기도 했다"라며 "듣고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경상도 사투리로 욕했다"라고 전했다. 그는 최 회장으로부터 "니네들은 인생의 패배자들이다, 니들이 못났으니까 운전기사나 하고 있다, 잘나고 성공했으면 내 밑에서 운전기사 하겠냐?"라는 모멸적인 훈시까지 들어야 했다고 한다.
A씨는 "이렇게 욕먹으면서 여기에 근무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스트레스가 하도 심해 요로결석이 생겨서 수술까지 받았다"라고 말했다.
A씨는 최 회장을 가리켜 "제가 모신 분들 가운데 가장 악질이다"라고 표현했다. 그는 "젊은 벤처기업 사장의 수행기사로 일한 적이 있는데 카이스트와 서울대를 나온 그 사장이 저를 벌레수준으로 보긴 했지만 고생한 만큼 돈(수당)은 줬다"라며 "하지만 최 회장은 쌍욕하고, 운전에 방해될 정도로 툭툭치고, 부려 먹을 만큼 다 부려 먹고도 돈(수당)을 안줬다"라고 꼬집었다.
A씨는 "그 벤처기업 사장은 웬만하면 휴일에는 쉬라면서 저를 부르지 않았다"라며 "하지만 최 회장에게는 배려라는 것이 없었다, 직원이 힘들고 괴로운 것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저는 최 회장이 필요할 때 써먹는 도구에 불과했다"라고 토로했다.
결국 A씨는 지난 2014년 10월 19일(차량운행일지 기준) 근무를 마지막으로 무학에서 퇴사했다. 그날 그는 새벽 6시에 출근해 최재호 회장을 모시고 골프장에 갔다가 오후 4시에 퇴근했다. 퇴직금이 포함된 연봉 3400만 원짜리 계약직 수행기사는 '대표 주류기업'의 갑질 앞에서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밥줄을 잘라내야 했다.
"회장님이 폭언할 분은 아니다... 회사에 뭘 바라고 있어"하지만 유광형 마케팅팀 차장은 15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먼저 "수당을 미지급한 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중에) 전부 다 지급됐다"라며 "그 친구가 주장하는 것이 일리도 있지만 억지가 좀 있다"라고 말했다.
유 차장은 "그 친구가 늦게까지 일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부모님 제삿날까지 운전시키지는 않았던 것 같다"라며 "그날은 그 친구가 휴가를 써서 다른 친구가 운전했던 것으로 안다"라고 해명했다.
이어 유 차장은 "그 친구가 공식 채용 공고를 통해서 들어온 게 아니라 회장님 지인을 통해 자기가 열심히 일하겠다고 해서 들어온 것이다"라며 "그런데 아주 이상하게 근무시간 8시간이 다 지나면 무조건 불법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유 차장은 "A씨가 자기가 (작성)해야 할 출퇴근 관리부를 전혀 안 했다"라며 "저희는 출근할 때 지문을 찍고 하는데 그 친구는 7개월간 근무하면서 10번도 안 찍었다"라고 비난했다. 그는 "회장님이 안 계실 때 쉰 것은 유야무야 넘어가고, 조금 더 일한 것은 부풀려서 얘기했다"라고 주장했다.
유 차장은 "처음 면접할 때 제가 있었는데 수습기간이 끝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당연한데 내부적으로 무조건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다만 '3개월 뒤에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가 이를 뒤집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다"라고 해명했다.
또한 유 차장은 최 회장의 폭언 등과 관련해 "저희 회장님이 그러시는 분은 아니다"라며 "경상도 분이니까 '야 인마' 할 수 있는데 이것도 친한 사람한테나 한다"라고 일축했다.
유 차장은 "회장님이 3일은 서울에서 근무하고, 마산(창원)에도 가시고 (서울과 마산을) 왔다갔다 한다"라며 "이 친구는 마산(창원)까지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 근무하면서 좀 다른 일을 한 것 같은데 맨날 청소는 아닌 것 같다, 거기 가정부도 있다"라고 말했다.
유 차장은 "회장님 사모님도 등기이사이고, 따님도 등기이사여서 다 회사와 관련된 분이다"라며 "회장님 쉴 때는 사모님이나 다른 임원들 다 수행한다, '회장님 혼자만 수행하는 게 아니다'고 분명히 얘기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수행기사가 어떻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만 일할 수 있느냐?"라며 "토요일, 일요일, 빨간 날도 일할 수 있지만 그것은 변형근로고 해서 다른 날에 쉰다"라고 말했다.
유 차장은 "그 친구는 회사에 뭘 좀 바라고 계속 이렇게 하고 있다"라며 "회사에 뭘 바라고 있는데 저희가 응하지 않으니까 계속 언론에 제보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회사 관계자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명확하게 나오기 때문에 수사를 의뢰한 상태다"라며 "(수사를 의뢰한) 기관은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회사가 고소를 진행중인 걸로 알고 있다"라고 전했다.
최재호 회장, 지난해 '윤리경영' 부문 대상 받아
무학은 지난 1929년 경남 마산 소재의 소화주류공업사가 전신인 종합주류 제조업체다. 대표적 향토기업으로 경남·부산·울산 소주시장 부동의 '점유율 1위'다. 저도주(도수가 낮은 소주)로 이름을 알렸고, 지난해 순한 소주인 '좋은데이'가 전국적인 인기를 끌면서 롯데·진로에 이어 주류업계 3위(시장점유율)로 올라섰다. 초대 회장은 최위승 명예회장이며 장남 최재호 회장이 대를 이어 경영을 맡고 있다.
하지만 무학은 과거 무허가 소주 제조·이물질 등으로 논란을 빚었다. 지난 2011년 여름 미개봉 소주에서 담배꽁초와 이쑤시개 등이 발견돼 '쓰레기 소주'로 불렸고, 이후엔 파리가 발견돼 '이물질 소주'로 불렸다. 지난 2010년엔 폐수 50톤을 인근 농경지로 불법 유출해 과징금 처분을, 2013년에는 주세법 위반 혐의로 울산공장 1개월 영업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최재호 회장은 1961년 1월 경남 출생으로 경남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이후 대웅제약 기획실과 무학 기획실장을 거쳐 지난 1994년 대표이사에 올랐고, 지난 2008년 무학 회장으로 취임했다. 경남사회복지협의회 회장, 경남자원봉사센터 이사장 등을 지냈고, 현재 경남메세나협회 회장, 경남 미래교육재단 이사, 사회공헌재단 '좋은데이나눔재단'의 이사장 등을 겸하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 2008년 9월 사회복지의 날을 기념해 이명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았으며, 지난해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2015 한국의 최고경영인상'에서 윤리경영 부문 대상을 받기도 했다. 무학이 홍보하는 기업 이념은 "주류·음료 사업과 미래산업 육성을 통해 고객과 무학 가족에게 풍요로운 삶의 질을 제공한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