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를 안내하는 책에는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에서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la)까지 남은 거리를 783km로 소개하고 있다. 또 어떤 책에선 그보다 더 짧게 쓰고 있기도 하고. 그런데 론세스바예스에서 숙박을 하고 실제 마을을 빠져나가려고 보니 아직 790km나 남았단다.
헉! 어제 내가 이미 걸었다고 믿었던 7km는 어디로 간 거니?
'앞으로 얼마가 남았다'는 표지가 때론 힘이 되기도 하지만, 그게 너무 까마득할 땐 약간 절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산티아고까지의 거리를 생각하기엔 너무나 이른 시점. 오늘 걸을 수비리(Zubiri)까지의 거리, 23km만 생각하기로 한다.
해발 952m의 론세스바예스에서 해발 528m의 수비리로 내려가는 것이니 편할 거라는 기대도 일찌감치 접는다. 높이를 단순 적용하면 내려가는 것이지만, 오늘도 고개를 두 개나 넘어야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책에 '친절히' 소개돼 있다.
론세스바예스를 떠나 가장 먼저 도착한 마을 부르게테(Burguete). 이곳이 바스크 지방인 지라, 입구 표지판엔 바스크 지명인 오리츠(Auritz)도 병기돼 있다.
부르게테 마을에 딱 들어서면, 헤밍웨이란 이름이 순례자를 먼저 반긴다. 마을이 정말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것과 거의 동시에 말이다.
헤밍웨이가 천국으로 묘사한 마을 부르게테
부르게테 마을 입구에는 헤밍웨이가 묵었던 호스텔이 있는데, 헤밍웨이가 묵었던 곳,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마을이란 건 이곳 사람들에겐 대단한 자랑거리다. 헤밍웨이는 부르게테를 천국으로 묘사하는 편지를 친구인 작가 피츠제럴드에게 보냈을 정도로 이 마을을 사랑했다고 하니, 마을 사람들이 자랑을 하고 또 해도 모자라지 싶다.
헤밍웨이는 부르게테에 머물면서 그의 대표작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집필했다고 한다. 순례길은 마을 옆으로 정말 '맑게' 흐르고 있는 우로비 강을 건너도록 나 있다. 길을 걸으며 헤밍웨이가 이 때묻지 않은 물가에서 송어낚시를 즐기면서 영감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는데, 실제 헤밍웨이가 이 우로비 강에서 송어낚시를 즐겨 했다고 한다.
부르게테에서 헤밍웨이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물론 좋겠지만, 순례길을 걷는다면 16세기에 짓기 시작했다는 '바리의 산 니콜라스 성당(Iglesia de San Nicolas de Bari)'도 지나는 길에 있으니 빼먹지 말고 들러보자.
너무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서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성당이 문을 열지 않았는데, 외관만 보더라도 교구 성당의 위엄이 느껴졌으며 바로크 양식으로 만들어진 정문은 정말 아름다웠다. 성당 앞마당엔 누구나 편히 쉬어갈 수 있는 예쁜 나무 탁자와 의자도 있으니, 꼭 성당 문이 열려있지 않아도 물 한 모금 마시며 쉬었다 가기 좋다.
우린 성당 앞마당에서 콜라를 마시고 쉬면서 말을 타고 순례길에 나선 아저씨들을 만났다.
"부엔 카미노(Buen Camino)~" 서로 서로 좋은 순례길, 뜻 깊은 순례길 되라고 힘차고 즐겁게 인사를 나눴다.
두 번째로 도착한 마을은 에스피날(Espinal). 피레네 산맥의 전형적인 마을이라고 하는데, 오밀조밀 모여 있는 산골 집들이 피레네의 풍경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듯하다.
피레네 산맥의 전형적인 마을 에스피날
산도 집도, 물도 하늘도, 동물도 사람도, 공기도 새소리도, 모두 조화를 이루고 있는 느낌. 피레네 산맥을 넘고 피레네 곳곳의 마을 속을 걸을 때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다. 카미노를 걷는 내내 그랬다. 길을 걷는 내내 참 좋았던 건 그 길 따라 있는 것들이 뭐 하나 튀지 않고, 뭐 하나 특별히 강하지 않고, 참 잘 어우러지며 있어야 할 자리에 제 소리를 내며 제 냄새를 풍기며 있다는 거였다.
800km가 넘는 길을 걷는데, 그것도 남의 나라 땅을 걷는데, 길은 잃지 않을까?
걱정이 될 수도 있다. 마을도 지나고 산도 넘고 계곡도 따라서, 때때로 사유지까지 지나고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를 건너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산티아고로 가는 프랑스 길에선 길을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순례자가 길을 헷갈릴 틈도 주지 않고 '노란 화살표'가 시시때때로 발길 닿는 곳마다 길을 알려준다.
순례를 상징하는 빗살 모양의 가리비 형상이 그려진 표지석도 길이 갈라지는 곳곳에서 순례자가 가야 할 길을 알려준다. 그리고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누구나 어디서나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닌, 성 야고보가 묻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한 중세부터 걷고 걸어 닦여진 참 오래고 힘겨운 순례 길이란 걸 매순간 잊지 않게 알려준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노란 가리비를 따라 론세스바예스에서 9km를 걸어서 도착한 오늘의 깔딱 고개는, 해발 930m의 메스키리츠 봉 (Alto de Mezkiritz)이다.
거친 숨을 내쉬며 정상에 이르니, 성 모자상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여기에 새겨진 문구는 '여기에서 론세스바예스의 성모님께 구원을 기도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순례를 나서는 이들이 바라는 건, 성취감이나 경험이나 힐링(치유, Healing) 같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삶의 구원, 영혼의 구원일까. 잠시 성 모자상 앞에서 성호를 긋고 기도를 드린다.
*메스키리츠 봉을 지나 수비리 마을까지 이르는 순례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