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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점거 이후 경찰에 연행되는 알바노조 조합원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점거 이후 경찰에 연행되는 알바노조 조합원
ⓒ 알바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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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해지자.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알바노조의 조합원 57명이 서울 고용노동청 민원실에서 연행당했을 때, 나는 조금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근로감독관의 업무태만과 편파적 중재에 대한 민원을 하러 간 자리였다.

민원인의 전원연행.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려울 일도 아니었다. 정당까지 해산시켰던 나라다. 집회가 합법일 수 없는 정부였다. 그에 비해 6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을 경찰서로 끌고 가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으리라. 정부의 정책에 항의하는 이들이 시원하게 치워지는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분명 장관이었다.

그렇다. 분명 장관이었다. 알바노조가 만나고자 했던 사람은 고용노동부의 장관이었다. 그는 고용노동부의 장관이었지만 알바노동자의 목소리를 듣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 재벌과 기업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한 노동 개악 지침을 발표했다. 알바노조의 조합원들이 끌려나가고 있던, 그 시각이었다.

더욱더 쉬워진 해고. 취업규칙도 노조의 동의 없이 바꿀 수 있는 세상. 노동 개악을 반대했던 이들은 알바노조가 그랬듯 경찰에 끌려가거나, 출석요구서를 받아야 했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그랬던 것처럼.

분노의 역치값은 올라간다

세월호 유가족 "진실을 위해 끝까지 함께 해달라"  세월호 유가족이 지난해 11월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이준석 선장과 승무원 등 최종판결에 대한 입장발표 기자회견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세월호 유가족 "진실을 위해 끝까지 함께 해달라" 세월호 유가족이 지난해 11월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이준석 선장과 승무원 등 최종판결에 대한 입장발표 기자회견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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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랄만한 일이지만, 놀랍지 않다. 화가 날 만한 일이지만 화가 나지 않는다. 실망할만한 일이지만 실망스럽지 않다. 지난 몇 년간 놀람과 분노와 실망에 실컷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그 별의 별일들에 너무 쉽게 익숙해진 탓이다. 이젠 집회에 참가한 누가 죽는다고 해도, 심지어 그 죽음을 누군가 '잘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리 놀라울 것 같지 않다. 이미 비슷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져 왔다.

그런 일들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곧, 둔감해진다는 것이다.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낯설거나, 무섭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미 겪어 본 일이기 때문이다. 그 별일들을 겪고도 별일 없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여건이 점차 악화되고, 사회적 부조리가 극대화되어도 반응할 수 없다. 어떤 자극에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어떤 폭력에도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역치'라는 것이 있다. 생물이 반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극 값. 헬조선시대의 시민이 반응할 수 있는 역치 값은 나날이 높아만 지고 있다. 문제는 그 별일들이, 우리 삶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정말 별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길들인 '별일들'

살인진압 진상규명 요구하며 거리행진 벌이는 용산참사 유가족 용산참사 유가족과 시민들이 2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용산참사 현장 남일당 터에서 '용산참사 7주기 추모대회'를 마친 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거리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이날 이들은 "당시 살인진압의 책임자였던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참사에 대한 사죄는 커녕 내년 총선 출마를 선언했다"고 규탄했다.
▲ 살인진압 진상규명 요구하며 거리행진 벌이는 용산참사 유가족 용산참사 유가족과 시민들이 2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용산참사 현장 남일당 터에서 '용산참사 7주기 추모대회'를 마친 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거리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이날 이들은 "당시 살인진압의 책임자였던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참사에 대한 사죄는 커녕 내년 총선 출마를 선언했다"고 규탄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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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동안 수십 개의 별일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별일들이 너무 많아서, 웬만한 별일에는 "그 정도면 별일 아냐"라는 말이 날아들었다. 7년 전, 이맘때쯤 망루 위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던 이들이 화재로 인해 사망했다. 해고당한 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함께 살자'며 방법을 강구했지만, 돌아온 것은 테이저건과 트라우마였다.

진작에 폐기되었어야 할 어떤 노후 원전에서는 부실 부품을 사용한 사실이 드러났고, 어떤 배에 탑승했던 이들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된 지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우리가 믿어왔던 시스템이 붕괴되었음을 확인했지만, 그 후로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진상을 투명하게 밝힐 것을 요구했던 유가족들만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됐을 뿐.

어떤 전염병은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또 공포로 몰고 갔지만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감금이 아니면 '살려야 한다'는 허망한 밀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집회에 참여했던 한 시민이 경찰의 물대포 조준사격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 벌써 두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별일들은 이렇게, 우리를 길들였다.

냄비 속 개구리, 서서히 죽어갈 순 없다

 '헬조선 뒤집는 민중총궐기 경남지역 청년.학생 단체 일동'은 지난해 11월 11일 오후 경남도청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헬조선을 뒤집자. 민중총궐기 청년학생 선언'을 발표했다.
 '헬조선 뒤집는 민중총궐기 경남지역 청년.학생 단체 일동'은 지난해 11월 11일 오후 경남도청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헬조선을 뒤집자. 민중총궐기 청년학생 선언'을 발표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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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하인즈만이라는 과학자는 한 가지 재밌는 실험을 했다. 그는 개구리를 냄비 속에 넣고, 섭씨 21도였던 물의 온도를 37.5도까지 천천히 올렸다. 90분이라는 시간에 걸친 실험 끝에, 개구리는 냄비 속에서 죽고 말았다. 물의 온도에 반응하지 못했으니까.

냄비 속의 온도는, 이 헬조선의 지옥 불로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물이 얼마나 뜨거워지는지,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서서히 죽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냄비 밖으로 어떻게든 뛰어올라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분노한다. 정부의 모든 폭력, 사회의 모든 부조리에 분노한다. 계속해서 분노하고, 계속해서, 실망하고, 계속해서 놀랄 것이다. 그 분노와 실망과 놀람이 국가를 압도할 때까지.

개구리 한 마리가 냄비 밖으로 튀어 올랐을 때 다시 그를 냄비 속으로 처넣기야 쉽다. 냄비 속의 모든 개구리가 밖으로 튀어 오르려고 한다면 어떨까. 다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냄비의 물이 엎질러져 이 지옥 불마저 꺼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알바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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