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생(妓生)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과 애틋한 사랑을 나눴던 천관녀(千官女)가 대표적이다. 고려 공민왕에게는 연쌍비(燕雙飛)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에게는 칠점선(七點仙)이 있었다. 바람둥이 양녕대군에게는 얼굴이 가무잡잡한 어리(於里)가 있었고, 제24대 왕 헌종에게는 반월(半月)이란 초승달 같은 기생이 있었다.
기생제도는 조선 시대에 가장 발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기생은 직책에 따라 이름도 갖가지로 불리었다. 등급(1패, 2패, 3패)도 있었다. 1패는 기예가 뛰어난 궁중 여악(女樂)으로 어전에서 가무를 하는 1급 기생. 2패는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는 급이 낮은 기생으로 '은군자'(隱君子) 또는 '은근짜'라 하였다. 3패는 술좌석에서 품위 있는 가무는 못하고 잡가나 부르면서 내놓고 매음하는 창기(유녀)를 가리켰다.
TV 사극에 등장하는 의녀(醫女)와 침선비(針線婢) 또한 직제상 관기(官妓)였다. 의녀는 약방기생, 침선비는 상방기생, 가무(歌舞)에 종사하는 기녀는 일명 기생이라 하였다. 기생은 비록 팔천(八賤·노비, 기생, 백정, 광대, 공장, 무당, 승려, 상여꾼)에 속했지만, 상대하는 계층이 사신이나 양반 사대부였으므로 가무 이외에 시·서화를 배워야 했다. 말씨와 교양도 갖춰야 했다.
조선 기생들은 광무 11년(1907) 관기제도 폐지로 자유의 몸이 된다. 하지만 국가에 소속된 공인 예술가로서 '관기'라는 개념이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은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 시행령' 제정 이후로 전해진다. 이는 궁중음악 계승자인 조선 관기들을 없애려는 일제의 치밀한 계략에 의한 것으로 그 후 경시청(일본 경찰)에서 기생들을 관리하였다.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지방 기생들이 상경 러시를 이룬다. 궁중요리사 안순환은 관기들을 데리고 고급요릿집(명월관)을 개업한다. 수라상을 차리던 상궁 나인들도 그를 따라간다. 서울에는 한성, 광교, 다동 등의 기생조합이 생긴다. 기생조합은 1914년 일제에 의해 권번(券番)으로 바뀐다. 권번은 검번(檢番), 권반(券班), 오키야(置屋) 등으로 불렸다.
옛날 신문에서 만난 군산의 기생들
군산(群山)은 조선 시대 옥구현과 임피현을 합한 지역을 말한다. 조선 이전에는 만경강 넘어까지 담당했던 회미현(지금의 회현면 지역)도 존재했으나 태종 3년(1403) 옥구에 병합된다. 이러한 행정구역 변천은 고려 시대까지 세 명의 현감이 군산 지역을 다스렸고, 더불어 고을 수령의 수청(守廳)을 들었던 관기(官妓)도 그만큼 많았음을 시사한다.
군산의 권번은 1915년경 처음 설치된 것으로 전해진다. 1930년대 이전에는 조합(組合), 치옥(置屋) 등의 명칭을 혼용하였다. 조선 시대 기생들은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일제 탄압 속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예술관도 확립되고 직업관도 뚜렷해진다. 의식과 활동 면에서도 이전 기생들과 차이를 보였다.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보성권번(普成券番), 군산권번(群山券番), 소화권번(昭和券番) 등 세 개 권번이 존재하였다. 보성권번은 개복정(군산극장 뒤편), 군산권번은 선양동 부근, 소화권번은 동영정(신영동 시장골목)에 있었다. 식민 통치수단의 하나로 설립된 권번은 주식회사의 효시가 되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교육과 공연이 기획될 수 있었다.
당시 기생들은 조합 운영과 처우개선 등에 자신들의 의지를 행동으로 나타냈다. 1930년대 초에는 권번을 주식회사로 바꾸는 등 조직적인 자치활동도 펼쳤다. 기생들의 다양한 사회활동은 그들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잦은 자선공연과 봉사활동, 토산품 장려 및 단연(금연)운동 등이 그것이다.
군산 보성예기치옥 기생 10여 명은 1923년 2월 어느 날 군산 세심관(洗心館)에서 토산품 장려 및 단연회(斷煙會)를 조직하고 새로 만드는 의복은 토산품 이외는 사용치 않기로 의견을 모은다. 만약 사용자가 있으면 그 물품을 몰수하여 공공사업에 보충하기로 정한다. 단연 역시 담배를 피우거나 휴대하고 있으면 벌금(임원 5원, 회원 1원)을 물리고 벌금이 모이면 유익한 곳에 쓰기로 결의한다.
1923년 2월, 군산교육후원회가 주최하는 연주회(6일~8일)가 군산부 강호정(군산시 죽성동)에 있는 군산좌(군산극장)에서 열렸다. 신파극도 선보였던 연주회는 운영비 문제로 어려움에 처한 북간도 대성중학교 돕기 자선공연이었다. 이에 군산의 보성 예기치옥과 군산 예기치옥 등 17개 단체가 후원하였고, 이들은 성금을 모아 전달하였다.
1926년 1월 29일, 30일 양일간 신·구극 공연이 군산좌에서 열렸다. 당시 신문은 '조합원들을 위문하기 위한 이번 공연은 명성이 자자한 보성권번과 군산권번 예기들이 동정(同情) 출연하였으며 시작 전부터 군산에서 전례가 없는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하였다. 신문은 개인 다수와 정미소, 노동조합 등에서 기부금도 들어왔다고 덧붙인다.
1927년 4월 8일 오전 7시 55분 월남 이상재 선생 영구(靈柩)가 열차 편으로 군산역에 도착한다. 그날 영결식에 참여한 단체는 80여 개(외지 포함). 신문은 기차역 광장은 추모 인파로 교통이 끊기고, 영결식장으로 향하는 연도는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전한다. 조문객은 2만여 명. 조기(弔旗) 300개, 조문(弔文) 50장에 달하였다. 부의금(총 458원 50전) 명단에는 보성권번 예기들이 낸 20원도 들어 있었다.
위 기사들이 말하듯 군산의 기생들은 다양한 예술 활동과 더불어 각종 캠페인, 사회 저명인사 장례식 참여, 체육단체 회관 건립기금 모금을 위한 영화상영 우정 출연, 조선인학교 교사(校舍) 신축비용 지원, 이충무공 묘소 추모 성금, 자선사업 등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한다. 권번을 비하하고 멸시하는 개인과 단체에 집단으로 대처하거나, 법적 대응도 불사하는 등 주권행사도 활발히 펼쳤다.
중요한 대목은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면서 전통 문화예술이 사멸될 위기에 처했을 때, 명맥을 유지 보존하는 데 기생들이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잦은 공연과 1932년 4월 21일(목요일) 경성방송국에 군산 소화권번 소속 예기 김유앵(金柳鶯)이 출연하여 '단가'를 비롯해 '심청가', '춘향전' 등 남도소리를 들려준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전쟁과 불황 속에서도 호황 누렸던 군산 소화권번
군산 소화권번(4년제)은 1928년 설립된다. 1932~1933년 소속 예기는 23명. 1930년대 중반 주식회사 체제로 바뀐다. 당시 소화권번은 동기(童妓)들에게 예의범절(걸음걸이, 말하는 법, 옷 입는 법, 앉음새 등)과 전통 기예를 가르치고 스케줄(요정 놀음, 극장공연, 화대 계산 등)을 관리해주는 일종의 예기 매니지먼트 회사였다.
1930년대 들어 군산은 매년 불경기였음에도 소화권번은 호황을 누렸다. 예기 23명이 1932년 한 해 동안 올린 화대는 1만 1983원. 당시 권번에서는 화대를 '놀음차' 또는 '해옷값'이라 하였다. 기생이 가무로 흥을 돋워주는 대가로 받는 출연료였던 것. 화대는 요릿집 주인이 손님에게 청구하여 받았다. 만약 받지 못하면 권번을 통해 기생에게 갚아줘야 했다. 다음에 손님이 찾으면 또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에는 예기 24명에 화대는 3만 2740원이었다. 1938년에는 39명으로 늘었으나 화대는 2만 4000원에 그친다. 전년보다 1만 원 가량 감소한 것. 1938년 한 해에 화대를 많이 올리고 표창받은 소화권번 예기는 장향옥(1등: 2733원 50전), 김농주(2등: 2233원 50전), 이농옥(3등: 2157원 50전), 전봉옥(4등: 1840원 50전), 최소도(5등: 1429원 50전) 등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총동원령을 내린 1938년. 소화권번은 그해 1월 23일~24일 양일간 시국봉사 특별연주회를 개최한다. 연주회에 출연한 예기들은 행사비용을 제한 수입금 163원 22전을 국방비로 낸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소설 <탁류> 주인공 초봉이 월급이 20원이었고, 서울 유명백화점 숍걸 계봉이는 30원, 정주사가 300원으로 방과 부엌이 딸린 가게를 꾸몄다는 대목을 참고하면 163원의 당시 가치를 짐작할 수 있겠다.
1938년 이후에는 매월 3일을 예기들 집회일로 정하고 좌담회를 열어 소질향상과 영업개선을 토의하였다. 그해 8월 3일에는 군산경찰서 보안주임이 참석하여 시국 인식을 강조하는 집회를 개최한다. 보안주임은 개정된 영업규약에 관해 설명하였다. 그는 영업시간 엄수와 귀금속품 사용금지를 강조하였고, 전시체제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문답식 시험도 치렀다.
권번과 인력거, 1950년대 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광복(1945)을 전후해 군산에는 명월관, 만수장, 동양관(근화각), 천수각 등의 요정이 있었다. 그때는 고급요릿집도 갑종(1급) 허가증이 있어야 권번을 통해 기생을 부를 수 있었다. 건물 규모가 아무리 커도 2급 요릿집은 기생을 부를 수 없었던 것. 화교가 운영하는 중화요릿집 동해루, 쌍성루 등에도 기생을 부를 수 있는 갑종 허가증이 걸려 있었다.
일제 식민통치 수단의 하나로 등장했던 권번은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지는 1942년 다시 일제의 강압정책으로 해체된다. 그러나 군산의 권번은 광복 후에도 계속 운영되다가 한국전쟁(1950~1953)과 함께 문을 내린다. 기생들이 요정으로 놀음 나갈 때 자가용처럼 이용했던 인력거도 비슷한 시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군산 명월관은 1960년대 후반까지 장구와 가야금 소리가 향나무가 심어진 정원 담장을 넘어 들려왔다. 요리상에는 궁중 요리 상징인 신선로가 빠지지 않았다. 과일은 물론 호두, 잣, 은행 등 견과류와 마른오징어 하나도 예쁘게 손질해서 올렸다. 이처럼 근래까지 음식의 맛과 품위가 뛰어났던 것도 100년 전 안순환을 따라갔던 수라간 상궁과 나인들 솜씨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 황미연, <전라북도 권번의 운영과 기생의 활동을 통한 식민지 근대성 연구>(전북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0), <기생 이야기 일제시대의 대중스타>(신현규), 옛날신문(1920~1930년대), 장금도 명인 구술.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와 매거진군산 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