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의 니가타행은 그렇게 빈손만은 아니었다.
판이 점점 커지고 있다. 깊은 소용돌이로 향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1억2천만명이 넘는 일본이라는 국가 극우 보수 통치자와 그 떨거지들 미망(迷妄)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양식 있는 지식인들과 정치인을 포함한 시민 세력 간 정면충돌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미키는 기차 창밖을 바라보며 골똘해진다.
…몇 년 전 나를 사로잡은 드라마가 생각난다. 미국 워싱턴 DC에서 벌어지는 정치의 어두운 면을 그린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 정치인과 정치세력의 음모와 언론 조작은 기본이고. 부정부패는 물론 스캔들을 양념 삼아 서로 처절하게 싸우는 정치판을 실사(實寫)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 드라마는 적을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는 전쟁터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적에게 총구를 겨누는 전쟁 영화와는 달라. 오로지 권력에 다가가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된 인간의 추악함을 그렸지. 그러나 전쟁보다 더 치열해. 워낙 실감나게 묘사해 큰 인기를 끌었고.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미국의 드라마는 <하우스 오브 카드>에서 시작해서 <하우스 오브 카드>로 끝난다"고 했을 만큼 극찬했지.
주인공인 상원의원 프랜시스(프랭크) 언더우드. 내가 예전에 너무나 재밌게 봤던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The Usual Suspect)>와 연결이 돼. 마지막 반전으로 전율을 느끼게 한 '카이저 소세'로 나온 배우 케빈 스페이시. 그가 프랭크를 실제 인물처럼 연기한 것이 인상적이었어. 어쩌면 프랭크는 다케우치와 겹치는 모습이 있어. 하지만 프랭크와 그 세력은 단지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위해 정적들을 철저히 솎아내기 위해서만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그 대상에 한정된 소소한 음모와 책략을 쓴다는 얘기야.
그러나 다케우치와 그 무리들은 '대일본 영광 재현'이라는 허무맹랑한 목표를 위해 눈이 먼 무모한 자들이야. 어쩌면 명분뿐이고 자신들 영광을 위해서일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다케우치 파(派)의 대상은 정적에 제한되지 않아. 자국민은 물론 다른 국가의 수많은 불특정다수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데 아무런 죄책감이 없어. 그 끝을 알 수 없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리고 사악하기까지 한 거대한 음모 클러스터야.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그 '하우스 오브 카드'로 들어가는 수밖에. 어차피 그 제목처럼 다케우치나 나의 노력이 카드로 쌓아 올려 만든 집처럼 불안하고, 금방 무너져 내릴 집일지언정 나는 K를 구하기 위해서, 내 애기에게 아빠를 돌려주기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됐어….
도쿄로 돌아오는 길에 미키는 이렇게 마음을 굳힌다.
"갈수록 자민당 세력을 등에 업은 극우 보수 집단 움직임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의회에서는 민주당을 포함한 야당은 수적 열세에 힘겨워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언론 쪽도 이젠 정부 여당 측 권력에 고삐를 잡혀 더 이상 바라볼 것은 없는 게 현실입니다. 전국에서 꿈틀대고 있는 국민적 저항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모임에서 가장 젊은 전일본공동체본부 김원택 도쿄 지부장의 냉정한 설명이다. 미야자와 회장이 일주일 전에 주선해 야마구치 곤다 민주당 의원, 그리고 스텔라 아버지 엔도 아키라 전일공동체본부 명예본부장이 함께 자리한 두 번째 회합이다. 첫 모임에서 일본의 극우화와 호전적인 움직임에 대해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데에 뜻을 모았다. 아울러 정치권은 곤다 의원이, 경제계와 문화계는 미야자와 회장이, 그리고 시민-사회계는 전일공동체본부 측이 맡아서 세력을 규합하는 동시에 대안을 마련하자고 다짐했다.
이어 열린 이번 둘째 모임에서는 각각 현 상황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는 자리다. 앞서 정치권과 경제-문화계 얘기가 나온 다음에 마지막으로 김원택이 전체 현상을 종합하는 동시에 전국적인 '국민 전선' 조직을 조심스럽게 화제로 올린다.
"당 지역 사무소에서 긴급 보고를 받았습니다. 공산당, 사민당은 물론 공동체본부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는 얘기요. 우리 민주당에서는 현재 이를 극비리에 진행 중에 있습니다. 김 지부장, 언제 이를 공식화 할 예정인가요?"
곤다 의원이 가급적 빨리 활동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물었다. 어떤 굳건한 비밀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사람이 알게 되듯, 그들 움직임을 정부 여당 쪽에서 알아내는 것은 시간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 간토-간사이-주부-주고쿠 지방은 민주당과 다른 야당을 포함해 공동체본부 연합 기구를 거의 조직한 단계입니다. 이제 출범만 남아 있다는 얘기죠. 전국 젊은이와 학생 조직인 '실즈'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와서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아울러 온라인 쪽에서도 여론 형성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고요. 그 외 홋카이도-시코쿠-도호쿠-규슈 지방은 한창 진행 중입니다. 일단 민주당에서 추진 중인 실종자 백서 발표를 시발점으로 연합 기구는 바로 공식적인 활동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김원택 지부장이 이른바 국민 전선에 해당하는 연합 기구 설립에 대한 경과 사항을 설명했다.
"김 지부장, 진행에 들어가는 자금은 내가 책임지고 지원해 드리겠소. 나중에 내 사무실로 한번 찾아오세요. 뜻있는 일에 돈을 쓰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기꺼이 해야 할 일이니까요."
무슨 일을 하든, 특히 일종의 거사(擧事)에는 돈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을 잘 아는 미야자와 회장이 흔쾌히 큰돈을 내놓겠다고 나섰다. 자신 필생의 업으로 삼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진 눈빛이다.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엔도 아키라 공동체 명예본부장이 공치사가 아닌 진심어린 감사를 전한다.
"미야자와 회장님께서 이렇게 발 벗고 나서주시니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모든 분들이 각 분야에서 열심히 참여해 주시는 것 자체가 감격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틀린 길만은 아니었다는 위로를 삼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이번 일은 반드시 일본 역사에 남을 사건, 아니 민중들이 들고 일어난 의거(義擧)로 기록될 것이라고 감히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이는 가히 우리 일본인들 마음과 몸이 참여하는 시민 혁명인 것입니다."
곤다 의원은 오랜 친구 엔도 본부장의 말에 추억을 되새기며 감격한다.
"역시 엔도 아키라, 아직도 그 패기와 열정은 여전하구만. 나도 중의원에서 힘닿는 대로 거대 여당에 맞서 보겠네. 일본에서도 일종의 '시민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미나미 의원 회유 건도 바로 진전이 있을 것으로 보네."
모임 마무리로 말 그대로 '밥 한번' 먹는다. 끼리끼리 모여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식구'가 되는 과정이다. 밥과 함께 술도 이어진다. 취기가 오르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대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꿈 같은 이야기와 토론이 쏟아진다. 그렇게 또 다른 역사는 밤에 이뤄졌다.
K는 요즘 자꾸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꾼다. 좋은 꿈이 아니라 나쁜 꿈이다. 깊은 함정에서 죽을힘을 다해 기어올랐다가 거의 빠져나오는 순간,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혹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 고전 영화 <샤이닝(The Shining)>에서 미쳐가는 소설가 아버지 잭 토렌스(잭 니콜슨) 살의를 피해 도망치는 어린 아들 대니(대니 로이드)처럼 무작정 미로를 달리며 죽음으로부터 달아나는. 그래서인지 잠에서 깨어나면 식은땀투성이가 되곤 하는 게 최근 그의 일상이다.
동북수용소에서 미키를 만났을 때만 해도 곧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이 가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혼슈 북방이라는 것 이외에 어느 곳인지도 모르는 지금 수용소로 옮겨진 다음 문득 문득, 아니 늘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어쩌면 이유 없이 갇혀 있는 기간이 길어지는 것과 함께 헤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사채 이자처럼 불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미키도, 조슈아도 볼 수 없다면?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곧 죽음이다.'
"서울 K, 소장님이 찾는다. 신속하게 움직이도록."
방장인 나가노(長野)가 지시한다. 물론 이곳에도 이른바 수형번호가 있지만 대체로 출신 지방을 일컬어 부른다. 부르는 사람은 물론 불리는 사람까지. 수형번호라…. 그것은 분명히 범죄 피의자로서 구속됐거나 판결을 받아 죄과를 치루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만큼 꼭 들어맞는 말도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50대 중반 방장은, 마치 철저하게 절차를 따지는 하급 공무원이나 업무상 사무적일 수밖에 없는 회계담당 직원처럼 차갑게 명령한다.
K는 수갑을 찬 채로 간수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갈라놓은 1만 볼트 고압 전기 철책선을 넘는다. 다만 수용소와 몇 미터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공간이다. 관사라고 하기는 그렇다. 하지만 수용소에 딸려 있는 소장 숙소는 별천지다. 수용소가 지옥이라면 소장 숙소는 천국이다. 우선 냄새부터 다르다. 땀 냄새와 숫내만 풍기는 원초적인 수용소와는 달리 샴푸, 화장품 같은 향내가 나는 곳이 인공적인 소장 숙소라는 게 단박에 느껴진다. 물론 수용소에서 여자라고는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었지만, K는 본능적으로 여성을 느낀다.
K가 이처럼 민감해진 것은 수용소 생활에서 비롯된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1시 취침시간까지 밥 먹는 시간 1시간 남짓 나머지 시간은 쉴 새 없는 노동이 이어진다. 그렇다고 중노동은 아니다. 산에 가서 풀을 벤다든지, 소위 군대에서 '연병장(練兵場)'이라고 하는 운동장 잔돌을 솎아낸다든지, 장마철이 다 지났는데도 수용소 주변 배수구를 만든다든지 청소하게 하는 등 참으로 자질구레하다. 그러나 피수용자들에게 잠시라도 딴생각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수용소 측 음흉한 속셈에는 안성맞춤 방안이다.
그래서인지 공상과 상상을 일삼는 K에게 그만한 고문이 없다. 특히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그의 강박 때문이다. 그만큼 모든 욕구에 대해 차꼬가 채워진 K에게 다만 잠시라도 엉뚱한 생각을 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의 오감은 물론 육감까지 한꺼번에 스멀스멀 기어 나와 사람과 주변에 대해 살펴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