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가족정책산업사회의 쇠퇴는 남녀의 성별분업에 기반을 둔 전통적 패러다임에 맞춘 가족정책의 틀을 벗어나야 할 당위성을 제공한다. 전반적으로 사회변화 추세는 정형화된 틀에 맞춰 살았던 표준화 사회로부터 벗어나, 점차 다양한 경로와 변화의 삶을 거쳐나가는 유동성이 일반화된 사회, 즉 비정형화된 삶이 보편이 되는 사회가 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한편으로는 개인이 자유롭게 원하는 방식에 따라 선택하여 살아갈 수 있게도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애에 걸쳐 여러 유형의 위험에 노출 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완전고용에 기반을 둔 노동시장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으며, 한 직장에 입사하여 정년을 맞이하는 '정규직' 노동자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근래 들어 직장 진입과 생계를 고민하는 세대는 여러 직장과 직종을 옮겨 다니며, 일을 위해서 국내 곳곳은 물론 다른 나라도 언제든 가야 하는 글로벌 사회에 부응할 수 있는 노동자로 변모해야 한다.
가족 안의 삶도 다양하고 유연해지고 있다. 결혼은 더 이상 강제된 사회규범이나 제도적 규율이 아니다. 원하지 않으면 결혼을 하지 않고, 불행한 결혼보다는 이혼을 통해 새로운 삶을 찾아보려는, 근대 시민사회의 '개인화' 가치를 수용하는 개인이 늘어나고 있다.
이로 인해 청년시절 연애·결혼으로 시작되어 죽음으로 해체되던 정형화된 틀에 따른 가족구조도 사라졌다. 근래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일정 시기에 얽매이지 않고 결혼하고, 결혼관계를 해체하며, 혼자 살다가, 다시 결혼관계로 들어가는 등 표준 혹은 정규 패턴에서 벗어나고 있다.
생애주기의 비정형성도 예외는 아니다. 청년기가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해 결혼을 하고, 가족을 형성하던 일반적 패턴도 약해졌다. 아동과 청소년의 교육기간은 길어지고 직장을 얻는 기회가 줄어들면서 가족으로부터 독립은 지연되거나 지체되고 있다.
부모와 함께 살거나, 함께 살지는 않더라도 부모로부터 생활 지원을 받는 반독립·반의존형 1인가구도 일반화되고 있다. 또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부모 부양이라는 사회적 규범이 사라지면서, 노인세대가 구성하는 가족의 삶도 다양한 양상으로 변화하고 있다. 혼자 생활해나가는 노인 가구 비율은 늘었지만, 새로운 배우자를 맞거나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과 어울려 공동생활 또는 유사가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노인세대로 다변화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 생애에 걸친 비정형화의 일반화는 기존 산업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적 환경에 맞는, 즉 질적으로 다른 사회를 떠받치고 유지시켜 나갈 새로운 가족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근대 산업사회의 출현은 일과 가족을 공·사 영역으로 구분하면서 생산(노동시장)-재생산(가족) 기능을 분리시켰다. 이 속에서 남성-시장, 여성-가족으로 이원화된 성별분업 구조는 근대 산업사회를 받치는 하나의 이념형으로 자리를 잡았다. 생산 단위로서 노동시장은 가족내 (여성의)무급노동을 통한 재생산 행위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가족은 (남성의)시장노동을 통한 소득 이전에 의해 꾸려졌다.
이에 따라 전통적 가족정책은 가족이 수행하는 기능 유지, 사회정책은 노동시장에 의한 생산 기능의 정상적 작동을 목적으로 했다. 따라서 전통적 가족정책은 (정상)가족의 해체를 예방하고, 문제가 생긴 가족에게만 최소한도로 개입하여 지원을 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는 불안정 고용 증대로, ▲ 소득안정화와 개인화에 기반을 둔 자아실현의 욕구 증대, ▲ 가족구조의 유동성 강화와 가족결속의 시계열적 단절, ▲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 남녀 맞벌이의 표준화 등으로 전통적 가족정책의 물적 토대를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송다영·정선영, 2013)
다변화 시대에 실재하는 다차원적 가족위험들은 전통적 (핵)가족 기반 가족정책을 넘어서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것은 가족 안에서 이루어졌던 부양·돌봄의 책임을 가족에서 가족+사회로 분담하는 '탈가족화', 돌봄을 여성에서 남녀가 함께 돌보는 '탈성별화' 등 새로운 가족 정책의 패러다임으로 전환을 통해 비로소 해결된다.
이제 가족정책과 사회정책은 각각 공·사 영역으로 분리되었던 전통적 패러다임을 넘어,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 연결되면서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사회 변화에 역행하여 '보수화'하는 가족정책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가족정책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상, 또는 향후 미래사회에서 강화될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변화를 예측하고 이에 대비하지 못하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지속되고 있는 노동시장, 가족구조, 인구구조에서의 근본적 변화를 담보하지 못한 채, 전통적 방식과 기존의 패러다임에 갇혀 새로운 사회적 위험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윤홍식·송다영·김인숙, 2010). 저출산·고령화에 수반되어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회적 위협에 대한 우려로, 가족 정책의 가짓수나 재정 규모가 상당히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전히 '남성=생계부양', '여성=가족돌봄'이라는 가족가치에 갇혀 있는 경향이 강하다.
현행 가족정책의 기본 원칙과 방향을 담은 제2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은 '가족가치의 확산'을 핵심적 의제로 하면서 보수화하는 가족정책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가족가치를 '가족을 중히 여기는 가치'라고 해석할 때, 가족을 형성하지 못한 청년세대나 사실혼 관계에 있는 소외계층, 소위 효행으로서 부모를 모시지 못하는 중장년 그룹 모두 문제 그룹이 될 수밖에 없다. 제2차 기본계획은 '가족 돌봄의 사회화'를 중심 기치로 했던 1차 기본계획에 비해서도 오히려 퇴보한 인상을 보인다.
또한 현재 정부의 가족정책은 출산장려금, 보육료 제공, 양육수당과 같이 현금 지원을 통해 가족의 경제적 부담을 완화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탈가족화, 탈성별화가 가능하게 하는 믿고 안심할 만한 수준의 국공립 돌봄시설 확충, 서비스 질 확보 등과 같은 사회적 인프라 문제는 도외시한 채 그저 가족들에게 경제적 비용을 지불해주는 방식을 고착, 강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남성이 노동시장에서 소득활동을 통해 가족(가족을 돌보는 여성)을 경제적으로 부양했던 방식을 국가가 보완적으로 대행해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즉 남성에 의한 부양을 보완하는 국가에 의한 부양인 것이다.
가족정책을 전반적 사회위험을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정책적 전망 속에 놓지 않고, 인구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저출산 정책 혹은 가족기능 유지 정책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만 5세 이하 아동이 있는 가구를 대상으로 전면 확대된 양육수당은 가족에 의한 돌봄 전통을 지속시키고, 성역할 고정관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보수화 가족정책 기조를 여실히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탈가족화·탈성별화를 아우르는 가족정책가족정책은 (핵)가족가치에 기반을 둔 보수적, 전통적 방식으로 회귀하기 보다는, 미래사회의 위험과 유동성을 준비하고 대응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탈가족화, 탈성별화, 계층·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통합적 가족정책이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복합적인 신사회 위험에 처한 한국 사회를 돌봄과 상생이 가능한 지속가능한 사회로 전환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살아남기 위하여 과잉 노동을 감수하고 경쟁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녀 모두가 함께 일하고, 함께 돌보는 보편적양육자 모델(Fraser, 1994)로의 전환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가족정책을 통해 우리는 계층간, 성별간, 세대간, 가족 형태간 차별과 배제를 넘어서 평등과 통합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글을 쓴 송다영님은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