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문시아리 언덕으로 향하는 산책길에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바람만 씽씽 불고 있다. 해가 뜨려면 시간이 조금 남아 있다. 바람을 피해 게걸음으로 산언덕 꼭대기를 향해 걸었다. 나보다 한 발짝 일찍 나선 사람이 있다. 산언덕 꼭대기에서 한 중년사내가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에 잠겨 있다. 그 옆에 검은 개도 보인다. 히말라야 설산을 배경으로 까마득한 절벽 위에 앉아 있는 사내의 모습이 마치 무협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히말라야 설산 너머에서 조금씩 빛을 뿜어내고 있다. 마치 성자들에게서 뿜어져 나온다는 발광체 같다. 나는 중년사내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앉아 호흡을 고른다. 바람이 거세지만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마음이 차분해 진다. 어제 등산을 하고 나서 숙소에 틀어박혀 마사지를 한 덕분인지 무릎 통증도 한결 나아졌다. 반가부좌를 틀고 있어도 무릎이 크게 아프지 않다. 매일 아침 가벼운 산책과 명상이 큰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운기조식(運氣調息) 법으로 무릎에 기운을 불어넣는다. 운기조식이라 하면 뜬 구름 잡는 무협지나 무협영화를 떠올릴 수 있다. 운기란 기운을 온몸에 운행시키는, 기의 순환을 잘 되게 하는 것이고 조식이란 숨을 고르는 것이다. 말하자면 들숨을 날숨을 고르게 하여 몸에 기운이 잘 돌게 하는 것이다. 우리 몸을 움직이게 하는 기운을 잘 운행 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기운, 기(氣)라는 말은 특별할 것이 없다. 기는 무협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기분이 좋다', '기운이 세다', '기가 막힌다', '기를 쓴다'. 할 때 쓰이는 바로 그 '기'다. 기는 생명의 근본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기의 작용으로 형성되어 살아가고 있다. 기운 없이는 살 수 없다. 생명이 다할 때에는 기의 작용도 끝나는 것이다.
몸에서 기가 빠져나가면 그만큼 기를 보충해야 한다. 내가 무릎을 다쳤다는 것은 그만큼 기운이 빠져 나갔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 운기조식을 하는 것은 그 필요 이상으로 빠져나간 기운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마음작용도 마찬가지다. 기분이 좋다는 것은 그만큼 기운이 왕성하다는 것이다.
내 주변의 펼쳐져 있는 히말라야의 기운들, 대자연에는 맑은 기운이 있다. 혼잡한 도시에서 머무를 때의 기분과 히말라야 주변에서 머무를 때의 기분이 다르고, 도시의 풍경 사진과 히말라야 주변에서 찍은 풍경 사진이 다르다. 히말라야 주변에서 찍은 사진이 훨씬 더 맑게 나온다. 히말라야 주변은 그만큼 도시보다 대자연의 맑은 기운이 왕성하기 때문이다.
나는 반가부좌를 틀고 히말라야 설산과 마주 앉아 그 맑은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운기조식, 호흡을 통해 그 맑은 기운을 단전에 집중시킨다. 단전에 모은 기운을 기가 쇠락한 무릎으로 보낸다. 생명을 살리는 하늘과 땅, 대자연의 맑은 기운은 자식을 대하는 어머니의 손길과 다름없다. 어머니의 손길이 자식의 배탈을 낫게 하듯이 호흡과 명상을 통해 대자연의 기운을 끌어 모아 무릎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으면 평소 고르지 못한 호흡이 수월해지고 내쉬고 들이쉬는 한 호흡이 길어진다. 얼마쯤 지났을까. 사방팔방의 소리들이 예민하게 들려온다. 어디선가 거친 소리가 들려온다. 히말라야 설산이 녹아내려 흐르는 물소리일까, 아니면 언덕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일까. 그 거친 소리와 함께 분노심을 털어내지 못한 내가 보인다.
내 등 뒤로는 까마득한 절벽이다. 어린 시절 절벽 아래로 날아다니는 꿈을 꾸곤 했는데 내가 앉아 있는 자리가 바로 그 절벽 위처럼 다가온다. 분노심에서 벗어나 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고 싶다 생각하는 함께 순간, 아찔한 현실감이 온몸을 휘감아 온다. 살포시 내려져 있던 눈꺼풀을 치켜세운다.
눈앞에 힌두교의 시바 신이 거쳐 한다는 히말라야 설산이 보인다. 파괴와 생성의 신, 시바. 나는 내 마음속에 자리한 분노심을 파괴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현실을 바라본다. 여전히 내 의식 깊숙한 곳에 분노심이 자리하고 있다. 그 분노심이 어느 순간 솟구쳐 올라 내 평온한 의식을 깨뜨렸던 것이다.
개와 함께 명상에 잠겨 있던 중년사내는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운동복 차림의 청년이 명상에 잠겨 있다. 히말라야 설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이곳 언덕에서는 문시아리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문시아리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이곳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을 하거나 수시로 가족들과 함께 산책을 한다.
내가 부스스 일어서 주변을 어슬렁거리자 앉아 있던 청년이 일어서 인사를 한다.
"나마스테""나마스테""어디서 오셨습니까?""한국입니다.""아, 태권도의 나라 한국!"청년의 영어 실력은 나보다 한수 위였다. 문시아리가 고향인 그는 알모라에 자리한 종합격투기 도장의 사범이라고 한다. 어머니 생일을 기해 고향집에 잠시 머물고 있다는 그는 태권도보다는 중국무술을 더 좋아했다.
"그럼, 브루스 리를 아십니까?""물론입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소룡 뿐만 아니라 이연걸도 좋아합니다.""태권도를 어떻게 생각 합니까?""태권도는 실전에 약합니다."
그는 내게 온몸을 앞뒤로 회전시켜 뛰어넘는 텀블링과 더불어 몇 가지 발차기를 선보였다. 그의 몸은 날렵했고 발차기는 파괴력이 있었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격투기 연습뿐만 아니라 명상을 한다고 한다. 깊은 명상을 통해 기운을 모으게 되면 몸이 훨씬 더 유연해 지고 발차기도 강력해 진다고 말한다.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기운은 격투기 선수는 몸을 단련시키는데 쓰고,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학업정진에, 수행자들은 자비심을 베푸는 데 쓸 것이다. 하지만 명상을 통해 얻어진 기운은 선과 악을 가리지 않는다. 누가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다르다.
탐욕스러운 종교인, 자본가, 독재자들도 제 나름 명상을 하기도 한다. 그 기운을 사이비 종교인들은 사원이나 교회 건물을 늘려 나가는데 쓸 것이고,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은 좀 더 자본을 축적하는데 쓸 것이다. 또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한국의 독재자가 그렇듯이 그 기운을 누군가를 억압하기 위해 쓸 것이다.
숙소로 돌아와 노트북을 꺼내 놓고 사진과 원고를 정리하다가 느지막이 오후 산책을 나섰다. 마을 사람들이 언덕 곳곳에 삼삼오오 흩어져 산책을 즐기고 있다. 개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 혹은 지팡이를 짚고 홀로 묵상하듯 걷고 있는 노인, 숄을 걸친 아줌마들이 한가롭게 언덕을 거닐고 있다. 아침과는 달리 바람도 없다. 평화롭고 고요하다. 명상이 따로 없다. 히말라야 설산과 사람들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목초지에 풀어 놓은 소처럼 언덕을 어슬렁거리다가 내려서는데 몇 마리의 소를 몰고 가는 소녀가 보였다. 소 한 마리가 무리에서 벗어나 해찰을 부리자 강제로 끌고 가지 않고 기다린다. 앞서 걷던 다른 소들도 멀뚱멀뚱 기다리고 있다. 해찰 부리는 소는 펄쩍펄쩍 뛰면서 소녀를 애태운다. 소녀가 더 이상 참지 못했는지 회초리로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몰아가자 그제서 다른 소들 곁으로 간다. 소녀는 작은 협곡을 지나 저 만치 산길을 따라 소를 몰아간다.
소녀가 저 멀리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십우도(十牛圖)와 임순례 감독의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이 영화는 소를 팔기 위해 집을 나선 주인공이 소와 함께 여행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과거의 아픔을 털어내고 마음을 치유하는 영화다. 불교에서 견성(見性)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심우도'(尋牛圖), 혹은 십우도(十牛圖)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십우도는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린 선화(禪畫), 선(禪)의 수행단계를 소와 비유한 그림이다. 그 '수행 과정'을 10단계로 나눠 알기 쉽게 그림으로 설명한 십우도(十牛圖)의 소는 수행자의 모습이다. 여러 선사들이 십우도에 관해 근본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십우도의 첫 번째는 소를 찾아 나서는 심우(尋牛). 두 번째는 소의 발자국을 보는 견적(見跡). 세 번째는 소를 발견하는 견우(見牛). 네 번째는 소를 붙잡는 득우(得牛). 다섯 번째는 소를 길들이는 과정인 목우(牧牛). 여섯 번째는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우귀가(騎牛歸家). 일곱 번째 단계는 집에 도착해 소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는 도가망우(到家忘牛). 일곱 번째는 사람도 소도 다 잊어버리는 단계에 이르는 인우구망(人牛俱忘). 여덟 번째는 본래의 자기의 참모습, 근본으로 돌아가는 반본환원(返本還源).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단계는 시정으로 나와 속인들을 교화하는 입정수수 (立廛收受)을 그리고 있다. 나는 이 열 번째 단계의 '교화'를 산속에 앉아 부처님의 설법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속세에 나가되, 속세에 물들지 않고 고통 받는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나는 십우도에서 말하는 도망쳐 나온 소였고 살아온 나날들을 뒤돌아보다가 분노심으로 가득한 나를 발견하여 목우(牧牛), 소를 길들이 듯 그 분노를 길들이기 위해 무릎까지 다쳐가며 천방지축 인도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탐욕스러운 자본과 거리를 둔 소박한 삶을 통해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내는 그 소박한 삶에 지쳐 있었다. 그녀는 끊임없이 화를 냈다. 나는 그녀의 분노를 다스려 보겠다고 발버둥 쳤다. 그 과정에서 내 안에 분노가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 분노에 잡아먹혀 어느 순간부터 내가 분노하고 있었다.
그녀의 화를 다스리는 것은 고사하고 내 안에서 날뛰는 분노의 '소' 조차 다스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 분노심으로 날 뛰는 소를 길들이지 못하면 스스로를 병들게 하고 가족은 물론이고 내 주변을 병들게 할 것이었다. 내가 아침저녁으로 명상을 하는 이유는 그 분노심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숙소로 돌아서는 길목에서 또 한 마리의 소와 마주쳤다. 마을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어이, 거기서 뭐하는 겨?"라고 말을 걸자 고개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직 뿔도 여물지 않은 송아지다. 다들 가축들을 몰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데 녀석은 왜 여기에 방치해 놓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송아지가 서 있는 곳에서 문시아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송아지 옆에 앉아 마을을 내려 다 본다. 이맘때면 히말라야 산맥으로 둘러 쌓여있는 문시아리는 거대한 대자연의 음악당으로 다가온다. 저 멀리 힌두사원에서 우리의 대금 같은 악기 소리가 아주 낮고 부드럽게 울려 퍼지고 그 음악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재잘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가 마치 희미한 안개처럼 스멀스멀 언덕 위로 올라온다.
웃고 떠들어가며 신나게 노는 소리, 거기에 굵은 톤의 어른들 목소리가 뒤섞여 있다. 아이들의 웃음꽃 만발한 마을에는 너그러운 어른들이 있기 마련이다. 내 어릴 적 시골 마을의 저녁 풍경과 닮아 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한국의 시골에서는 이 평화로운 소리를 듣기 힘들다. 한국의 시골마을에는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아이들이 있다 해도 대부분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 모바일 게임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그도 아니면 부모에게 붙들려 개갈 안 나는 학습지 앞에 코를 박고 있거나 학원에서 골머리 싸매고 숫자 놀이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언덕을 내려서 마을로 들어서자 숙소 근처에서 조무래기 아이들이 숨바꼭질 같은 놀이를 하고 있었다. 칸칸이 들어찬 쪽방에 사는 아이들이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겠다며 사진기를 들어보이자 와아하 웃어가며 고개를 돌린다. 어떤 녀석은 아예 얼굴을 벽에 파묻는다. 모두가 사진기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 어린 아이 하나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언니 오빠들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안 찍을게! 자 봐라! 사진기 없다!"나는 분신처럼 어께에 둘러매고 다니는 천 가방에 사진기를 넣고 빈손을 보여준다. 내 손에 사진기가 없는 것을 확인한 아이들은 다시 내 주변으로 몰려들어 힐끔힐끔 쳐다본다. 이 때다 싶어 나는 다시 사진기를 꺼낸다. 아이들은 다시 와아하 도망치며 고개를 돌린다. 아이들과 나는 그렇게 몇 차례에 걸쳐 '사진 찍기 놀이'를 했다.
속소로 돌아 와니 정전이다. 숙소 베란다로 나서면 종종 마주 치는 아이들이 있다. 숙소 옆 건물에 사는 아이들이다. 친동생인지 이웃집 동생들인지 알 수 없지만 자신보다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이층 난간에 걸터앉아 책을 읽어 주거나 숙제를 봐주는 착한 언니가 있다. 늘 이층 난간에서 마주치곤 했는데 오늘은 계단 아래 송아지와 함께 있다.
들에 풀어 놓았던 송아지를 몰고 이제 마악 집으로 돌아 온 모양이다. 내가 사진기를 꺼내들자 부끄러운 듯 까르르 웃어가며 송아지 뒤로 숨는다. 웃음소리가 해맑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에 가만히 귀기울이고 있다 보면 깊은 명상 속에 잠겨 있을 때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세상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면 구태여 명상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싶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자체가 세상의 맑은 기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