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3일, 아침에 잠깐 흐리더니 어느새 대지가 흠뻑 젖었다. 겨울비 내리는 날엔 마음도 착 가라앉고 고요해진다. 이런 날엔 뭔가 달달한 게 먹고 싶어진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옛날 음식 추억의 음식이 새록새록 그리워진다.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주던 젠제이(팥수제비) 생각도 나고 부침개 생각도 난다.
뭐라도 있을까 싶어 냉장고도 열어보고 이리 저리 둘러보다가 누렁호박을 발견했다. 무시로 들락거리는 거실 식탁 밑에 두 개의 누렁호박이 포개져 있었다. 지난 가을 시골에서 가져 온 호박이다. 언제 시간이 날 때 호박죽이라도 해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서 놔둔 것인데 아직 모셔놓고만 있었다. 이걸로 부침개라도 만들어먹을까. 뒤늦게 꿀단지나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나는 반가워서 포개놓은 것 중에 위에 것을 번쩍 들어올렸다.
맛보다는 추억이 새록새록
먼지 앉은 누렁 호박을 흐르는 물에 헹구고 도마 위에서 칼로 반으로 잘랐다. 잘라진 누렁 호박 안에는 호박씨가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호박 안에서 호박을 품은 씨앗들이, 가능성과 신비로움이 숨어 있었다. 딱딱한 껍질로 싸고 있는 그 안에.
씨를 빼내고 껍질 벗기기 좋을 만큼의 크기로 잘라서 호박 껍질을 벗기고 채칼로 채썰기를 하였다. 슥삭슥삭 몇 분 사이에 채썰기가 다 끝났다. 채로 썰어놓은 누렁호박색이 주황색 빛이다. 색이 이다지도 곱다니. 요즘 사람들은 호박전을 만들 때 계란도 넣고 이것저것 재료들을 넣기도 한다만 호박맛 그대로를 살린 것이 제일 낫다고 생각한다.
채를 썬 호박에 밀가루 그리고 소량의 소금으로 반죽을 하고나서 프라이팬을 가스불 위에 올리고 기름을 두르고 호박부침개를 만든다.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호박부침개가 군침 돌게 한다.
어린 시절, 외갓집에 가면 명절 때면 마당에 걸어놓은 가마솥 두껑 위에서 누렁호박 부침개가 만들어지고 많이 해서 단 번에 먹지 못한 호박부침개들을 산데미에(넓고 동그란 소쿠리) 담아 처마 끝에서 고들고들 말려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땐 고들고들 마른 부침개조차 맛있었다. 연하디 연한 애호박을 부침개 만들어 먹으면 입안에서 살살 녹는 듯한 맛도 좋지만, 누렁 호박 역시 출출할 땐 달기만 하다. 이런 종류의 음식은 맛으로 먹는다기보다는 추억으로 먹는 것 같다.
누렁 호박은 시골 부모님한테서 왔다. 고향의 양지바른 밭에서 왔다. 바람과 햇빛과 비와 농부의 손길 닿은 보람으로 자란 그곳에서 왔다. 부모님이 사랑하는 밭, 심고 거두고 심고 거두기를 중단하지 않는 밭, 시금치, 마늘, 상추, 고추, 배추, 무, 유자, 감, 밤, 고구마, 파…. 심으면 심는 대로 잘도 거두는 화수분 같은 밭에서 왔다. 그 밭의 소산으로 흩어져 사는 자식들을 즐거이 주고 또 주는 그곳에서 왔다. 흙에서 왔다.
한 개의 호박이 여기 오기까지는 밭에 심겨지고 바람과 햇볕과 비를 맞고 날이 가고 달이 가고 밤이 오고 낮이 오고 숱한 시간들이 있었다. 그 시간의 결정체가 여러 손을 거쳐 여기 와서 내 손에 닿고 마침내 호박부침개가 됐다.
누렁호박은 영양도 풍부하다. 비타민 A, B가 들어있어 불면증 예방과 변비예방에도 좋고 부종도 가라앉히고 당뇨나 비만, 위장병, 신경통, 빈혈 등을 예방하거나 치료한다니 이 얼마나 좋은가.
밖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내 손에는 방금 만든 누렁호박 부침개가, 따끈따끈한 호박부침개가 손 안에 있고 입속에 들어간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젠제이 생각, 부침개 생각이 난다. 그 중에 오늘은 누렁호박 부침개를 만들었다. 이럴 땐 여러 사람들 얼굴 떠오른다. 함께 먹으면 좋을 얼굴들 떠오른다.
비 오는 날에 호박전. 참 오랜 만에 맛보는 호박전 맛이다. 남편이 퇴근해 오면 겨울비 오는 날 저녁에 간식으로 내놔야겠다. 내일도 비가 오신다고 했던가. 내일은 비가 오시면 팥도 삶아놓았으니 팥수제비를 만들어봐야겠다. 추억을 추억하며 먹는 맛도 괜찮으니 말이다. 겨울비 아직 내리고…. 나는 누렁호박전을 호호 불어가면 먹는다. 저녁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