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잔인했다. 신문에서 본 헬조선의 현장, 말로만 듣던 금수저와 흙수저의 대립 갈등은 냉정하고 처절했다. 그만큼 해볼 만한 놀이라는 뜻이다.
<한겨레>에서 '수저게임'에 관한 기사를 읽었을 때, 재미난 놀이가 나왔구나 싶었다. 도구를 활용한 학습을 늘 고민하던 차라 수저게임도 한번 해보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우연히 한 모임에 갔다가 수저게임을 접하고 흥미를 느꼈다.
이번 명절에는 지긋지긋한 화투판도 옛말인지 드라마, 스마트폰, 롤 게임, 영화 감상 등으로 제각각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 집에서 수저게임으로 판을 한 번 벌려보았다. 우리는 두 형제 부부에 각각 자녀가 둘인데, 군대 간 조카를 제외하고 7명이 판을 벌였다.
'수저게임'이란?
일단 수저게임을 간단히 소개한다. 인원수는 사회자를 제외하고 열 명 이내. 열 명이면 가장 좋고 최소 7, 8명은 되어야 게임이 원활하다. 게임의 기본 재료는 수저 카드 열 장, 부동산과 자산 칩, 랜덤카드, 법안 자료 등으로 이루어졌다. 수저 카드 가운데 2장은 금수저, 8장은 흙수저인데 20:80의 사회를 반영한 것으로 느껴졌다. 처음부터 금수저를 받은 사람들은 집이 3채라 임대료를 받으면서 게임을 시작하고, 흙수저를 받은 사람들은 집이 없어 첫 회부터 월세로 칩을 하나씩 빼앗기면서 게임을 해야 한다. 처음 시작할 때 칩은 1인당 10개로 시작하고 칩을 14개 모으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
참가자 전원은 시작하면서 대학 공부의 길과 취업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 취업을 선택한 사람은 첫 회부터 취업의 대가로 칩을 하나씩 벌어온다. 반면 대학 공부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등록금에 허리가 휜다. 집이 없어 매회 칩을 하나씩 빼앗기는데 등록금으로도 칩을 하나씩 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대학에 간 사람은 네 바퀴를 돌고 난 5회전부터는 공부를 해서 고학력으로 취업을 하기 때문에 등록금은 내지 않고 취업 대가로 두 개의 칩을 받는다. 흙수저들도 취업이냐 대학이냐에 따라서 인생길이 달라진다.
게임의 승패는 금수저는 재산증식이면 승리, 흙수저는 모두 살아남거나 흙수저에서 은수저나 금수저로 신분이 상승하면 이긴다.
처음 한 바퀴는 게임 방법을 익히는 차원에서 자기 재산을 내거나 받는 걸로 시작한다.
그 뒤 매회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자기 재산을 밝힌다.
"나는 흙수저 주제에 대학을 선택했기 때문에 집세로 칩 하나, 등록금으로 칩 하나를 내서 총 여덟 개의 칩이 남았습니다." "저는 금수저인데 집이 세 채라 임대 수익이 둘이고 취업도 했으므로 내는 칩은 없고 집세둘에 수업료 하나로 세 개의 칩이 들어와 집 세 채에 칩이 열세 개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재산 변동 내역을 모두 밝히고 난 뒤 2회전에 들어간다.
중간에 살아남기 위해서나 재산 증식을 위해 참가자들은 전원 협의 하에 법안을 만들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금수저와 흙수저의 피말리는 머리싸움이 시작된다.
예컨대 흙수저들은 종합부동산세나 의료보호 공공주택들의 법안을 발의해서 흙수저들의 살길을 모색해야 하고 금수저들도 자기 재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법안 발의 과정에 끝없이 개입힌다. 금수저가 둘이라서 금방 재산을 털리고 평등한 세상이 오지 않겠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게임의 3회, 6회, 9회에는 금수저들이 의논해서 맘에 안 드는 삐딱한 흙수저 둘을 감옥에 보낼 수 있다. 감옥에 간 흙수저는 의결권을 상실하고 한 회 쉬고 돌아온 뒤에 실업자로 전락해서 그나마 받던 취업 수당의 칩조차 받지 못하고 집세만 계속 내야 한다.
갈수록 몸이 축나는 흙수저들은 4회전 이후 질병에 걸리면서 건강상의 위기를 맞는다. 중년 이후 의료보험료를 내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보험료로 칩을 하나 더 내는 대신 집단의 지혜를 발휘해서 무상의료 법안을 만들어내야 살 길이 열린다. 생존의 길은 여전히 막막하지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은 면하기 위한 최선이다.
4회와 9회에는 법안 발의에 열심인 사람 하나를 골라서 무작위(랜덤) 카드를 하나 뽑게 한다. 그 안에는 상상 불가의 사회적 위기를 불러올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다.
일단 개인 차원에서는 로또에 당첨되어 집 하나와 칩 다섯 개를 받거나 헬조선을 탈출할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열에 하나의 확률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작위카드는 사회적 대재앙을 불러오는 힘겨운 내용이다. 예를 들면 원자력 가스폭발로 전부 중병에 걸려 매회 2개씩 칩을 제출하거나 취업난에 빠져 모두 실직해 취업 수당을 빼앗긴다(이때 금수저가 마음에 드는 사람만 취업 기회를 준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부동산 가격 폭락이 오기도 하고 금리 폭등으로 임대수익과 임대료가 두 배로 되면 금수저와 흙수저 간 빈부 격차는 가속화한다. 남북관계 악화로 흙수저가 감옥에 가거나 때로는 고강도 세무조사로 금수저가 침 열 개를 반납하는 경우도 있다. 천재지변이나 사회변동에 따른 신분 변화 기회가 아주 가끔 주어지는 셈이다. 그 가운데는 북한의 도발로 흙수저들이 감옥에 가는 내용도 있는데 마침 미사일 발사와 사드 배치로 어수선한 터라 이 카드를 뽑고 나서 다 같이 웃었다.
가족끼리 수저게임 같이 해보니...
실제 게임을 진행해보니 참가자들이 느끼는 빈부 격차의 강도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흙수저가 살 길은 금수저에게 잘 보여 구애한 뒤 결혼에 성공하거나 흙수저끼리 단결해서 최고의 법안을 만들어 평등세계를 추구하는 길이다. 하지만 법안도 금수저의 반대나 흙수저 상호 간의 이해관계로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흙수저 가운데 머리를 잘 써 은수저라도 나오면 상황은 더 복잡하고. 공공주택 제도로 임대 손실을 줄이고, 종합부동산세로 금수저의 재산 증식을 제한하고, 공공의료 정도가 보장되어야 그나마 최소한의 생존을 이어갈 수 있었다.
금수저를 잡은 사람이 그나마 흙수저를 배려하는 마음 따스한 사람이면 빈부격차는 덜 늘어나는 방향으로 간다(어떻게 해도 빈부격차가 줄기는 쉽지 않다). 역할에 충실하게 제대로 게임을 해보면 흙수저들은 거의 10회를 버티기 전에 사망하기가 쉽다.
집안 식구들이라 그런지 금수저를 뽑은 제수씨와 작은 아들이 살살 봐주는 바람에 긴장감은 덜 했지만 집 없는 설움과 위험사회의 공포는 피할 수 없었다. '헬조선'과 '7포세대'를 이야기하며 처음 듣는 조카와 아들에게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을 가르치는 게 보람은 있으면서도 슬펐다.
게임을 마친 뒤 소감을 나누어보았다. 한 식구들이어서인지 금수저들이 아량을 베풀어 흙수저와 공생을 도모한 탓에 결론은 대부분 흙수저들이 살길을 찾았다. 아름답지만, 비현실적인 결론이었다. 그럼에도 게임을 마친 뒤 수저 간 계급 격차는 더욱 심각하게 느껴졌고 흙수저로 이 시대를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한 시간이었다.
좋은 금수저(이런 사람은 아주 드물지만) 모둠과 흙수저 모둠의 평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금수저: "금수저로 태어나니 편하다. 굳이 말을 많이 할 필요도 없고 게임이 즐겁다. 금수저로서 종부세의 위력을 실감했다." 흙수저: "흙수저 가운데 그나마 은수저로 신분이 상승했다. 신분상승의 욕구와 재미를 실감했다. 복지혜택이 있어 좋았다, 좋은 법안 발의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착한 금수저 이웃은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흙수저는 안분지족도 행복의 방편, 금수저를 바라볼 필요 없다. 비교하며 살지 말자!(너무 배부른 소리라 지탄받음)""살기 위해 일찍 결혼을 택해서 살림을 합쳤다. 가진 것 없으면 결혼을 잘해야 한다. 금수저의 작은 양보가 공동에게 큰 혜택 돌아감을 경험했다. 흙수저라도 대학은 꼭 가야 한다." 전체의 결론은 "더불어 잘 사는 데는 법안 발의가 중요하다. 서로 배려하는 것이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이었다.
이런 게임이 나올 정도로 출생부터 빈부격차를 심각하게 느껴야 하는 사회가 안타깝다. 현대판 카스트라 해도 틀리지 않을, 헬조선의 빈부격차와 흙수저의 현실은 요즘 날마다 신문에 연재되는 2030의 주거 문제·취업 현실과 맞물려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2016년 대한민국의 적나라한 현실을 느낄 수 있는 수저게임은 어른부터 중·고등학생까지 누구에게나 할 것 없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현실 공부가 되리라 싶었다.
"수저게임은 '양극화 사회' 개선을 위한 도구"
지난해 말에 보았던 SBS <너를 노린다>라는 드라마가 떠올랐다. 드라마 말미에 학자금 대부업 기획에 뛰어든 금수저 염기호(권율 분)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0.1%의 존재이고, 나머지 99%는 노예이고 0.9%가 거기에 기생하는 존재다. 0.1%의 상류층이 아닌 이상, 학벌사회 안팎을 가로지르는 복잡한 구별 짓기는 모두 0.9%가 되려는 발버둥이다"라고 말한다. 0.1%까지는 몰라도 20% 안에만이라도 들었으면 하는 신분상승의 욕구는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흙수저들의 감출 수 없는, 그러나 이루기 힘든 욕망이다.
학벌뿐만 아니라 재산의 측면에서도 위의 말은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금수저들이 돈만 아는 벌레는 아니다. 흙수저들 또한 신분상승 욕구를 쉽게 버리지 못하지만, 협동하는 마음으로 차별에 같이 분노하며 세상을 같이 바꾸어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지인을 통해 수저게임 개발자인 최서윤 월간잉여 편집장과 연락이 닿아 수저 게임을 만든 취지와 보람이나 사용 결과에 대한 피드백을 들어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수저계급론에는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지 않고 계급적 격차가 벌어지는 현실에 대한 자조가 묻어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수저계급을 통해 '불행배틀(누가 더 불행하거나 가난한지 겨룬 뒤, 제일 박복한 이가 관심과 발언권을 독점하는 경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한국은 또 다른 신분제 사회가 됐습니다. 계층 이동은 (거의) 고착화됐고, 현재 90%의 국민이 흙수저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제일 흙수저인지' 가리는 경쟁이 중요할까요?
수저게임은 수저계급론이 공통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돕고 연대 의식으로 나가는 것을 이끄는 담론으로 기능하기를 바라며 기획, 제작되었습니다.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토론하고 협의하는 능력을 갖춘 '시민'의 탄생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표정을 보며 대화할 수 있는 보드게임이라는 미디어를 떠올린 이유입니다.
수저게임을 통해 토론 과정에 심도 있게 개입해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구조를 바꾸는 체험을 유도하고 그것에서 쾌감이 파생되는 것을 의도합니다. 게임을 통해 '흙수저라도'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에 요구하는 방법을 학습합니다. 즉, 수저게임은 게임 참여자들의 토론 능력과 협상 능력 향상을 돕기 위한 학습 교육 게임이며 양극화 사회를 개선할 구조적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문화를 확산하는 캠페인을 벌이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수저게임이 대화거리가 부족하고 분위기가 어색하기에 서로를 향한 불필요한 오지랖을 부려 생채기를 만드는 명절 친척 모임에 활용되어도 좋겠습니다. 기회의 불평등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수저게임과 함께라면 어색한 분위기도, '엄마친구 딸·아들'과 비교하며 갈구는 친지들의 질문을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수저게임이 중·고등학교 클럽 활동이나 대학교 MT에서 활용되는 것은 어떨까요? 이미 시행된 고등학교에서의 게임에서 아이들은 게임에 몰입하고 재미를 느꼈으며, 모두가 함께 사는 결론을 도출해냈습니다. 이런 흐름이 사회적으로 더 크게 확산되고, 정치인들도 이런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한국이 나아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생존을 위할 치열한 전쟁 영화, <헝거 게임>의 명대사 "확률의 신이 언제나 당신 편이기를..."이란 말이 떠올랐다. 확률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극한의 환경에 내몰린 주인공과 달리 헬조선에서는 확률의 신에게도 기댈 수 없는 절벽이 기다리고 있다. 수저게임을 통해 확률 없는 세계의 신은 누구인가를 생각한다. 차라리 불법적인 차별을 없애기 위해 정의와 평등을 향한 모두의 분노와 저항에 몸을 맡기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