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정부가 개성공단 폐쇄 조치를 취하면서 한반도는 급랭 상태에 들어갔다. 금강산 관광조차 끊긴 이래 그나마 아슬하게 남북을 이어온 실낱같은 남북관계는 한 치 앞을 모르는 블랙홀에 빠져들었다. 남북교육협력이 활발하던 참여정부 시절을 돌이켜보면 격세지감을 아니 느낄 수 없고, 사드 배치와 맞물린 정치군사적 위기는 신냉전의 우려를 더한다. 나는 한때 자유왕래는 아니지만 관광이나 행사 차원으로 개성을 오간 경력이 있다. 개성공단 폐쇄의 위기 속에서 개성공단 폐쇄에 반대하고 더 나아가 개성 관광이 재개되는 날을 기원하며 개성을 돌아오고 난 후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기자 말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이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석양에 지나는 객이 홀로 눈물 겨워 하노라(원천석)2008년 1월, 세 번째 개성을 다녀오면서, 빌어먹을(!) 이 시조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분단 60년 세월. 전쟁과 냉전, 615와 6자 회담의 험난한 과정을 다 넘어 북한과 미국 사이에도 새로운 기류가 동터오는 지금, 개성을 다녀오는 소회가 고려왕조의 멸망을 탄식하는 노객의 시조라니...
겨울의 한가운데라서 그랬을까? 만월대 추초(秋草)는 간데없었으되, 유수한 흥망성쇠의 조국 현실과 오백년의 왕업이 한 줄기 피리 소리에 얽히면서 눈시울이 붉어진 것은.
개성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2005년 전교조 통일위 사무국장 직책으로 남북교육자 대표회의를 위한 실무자로 한 번, 대표자 회담 실무집행자로 한 번, 도합 두 번 개성을 방문했다.
처음엔 실무협의차 갔기 때문에 개성 자남산 여관에서 회의와 식사만 하고 돌아왔다. 두 번째는 대표들 방문이었기 때문에 교총을 포함한 남측 교육자 대표들과 함께 자남산 여관 바로 앞의 선죽교와 고려박물관을 둘러보고 왔지만, 가슴에 담고 머리로 정리할 여유는 없었다.
이번 개성방문은 그동안 남북통일교육연구회 회원으로 간간이 연수에 참여하고 통일교육에 대한 정보를 교류한 몫으로 주어졌다. 연구회 각종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게 연구회가 주관하는 개성탐방에 합류하는 행운을 가져다 준 셈이다(비용은 반만 부담해서 9만 원).
그동안 화해평화통일모임이라는 카페를 만들어 통일교육 활동을 해온 선배 교사들 몇 분과 통일교육연구회원들 몇 명 그리고 지리교사 모임의 북녘지리를 연구하는 교사 몇 분이서 길동무가 되었다. 특히 지리교사 모임의 '북지모' 선생님들은 교과 속에서 긴 호흡으로 통일을 꿈꾸면서 준비하는 모임이라 참가자들에게 훈훈한 느낌을 더해주었다.
새벽 5시 반 종합운동장 출발. 네 시부터 일어나 설쳐대다 계란 두 개를 부쳐 시금치국에 먹고서 5시경 집을 나섰다. 압구정 현대아파트에서 다른 일행을 태우고 올림픽대로를 지나 가양대교 건너 통일로를 따라가다 보니 8시경. 임진각 지나 도라산역 부근 남측 남북출입사무소(CIQ) 도착.
주의사항 설명 듣고 외국(!)으로 나가는 수속을 밟고 버스에 오르니 바로 민간통제선을 지나 군사분계선 안에 들어선다. 남북 2km의 비무장지대를 지나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하는 데 고작 10여 분. 하긴 개성도 서울 중심에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불과하다. 한 시간과 60년 세월 사이의 말로 할 수 없는 거리 차이가 무슨 의미인지 새삼 가슴을 울린다.
멀리 북녘땅 기정동 마을의 깃발이 보인다. 그 건너 안개 속에 남측의 대성동 마을에 고요히 머리 숙인 태극기가 가물가물하다. 세계 제일을 외치는 북은 남측의 태극기에 대응해 높이 165m 깃대에 40평짜리 인공기를 만들어 깃발을 걸어놓았다. 지금은 기계가 강하를 하겠지만 전에는 장정 40명이 움직였다는 깃발. 무구한 세월 속에 깃발은 소리가 없다. 그리고 어떤 아우성도 없이 고요한 모습.
북측으로 들어가는 입국심사 수속을 밝고 버스에 올라타니 북측 안내원 셋이 동승한다. 마음 속으로는 한핏줄 한겨레에 대한 설렘으로 몸이 먼저 끌리지만 개성의 분위기가 금강산에 비해 어떨지 몰라 그들의 말과 안내를 기다린다.
리기창, 김정훈, 김훈 세 사람의 남자 안내자. 아직 개성 쪽은 여성 안내자 준비가 안 된 모양이다 싶었다. 마이크를 잡고 일정을 안내한 사람은 영화배우 뺨치게 잘 생긴 리 선생이었다.
북방한계선을 넘어 개성시를 지나 박연폭포까지는 5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기에 그동안 남측 관람객들을 위해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리 선생이 소개한 일정은 다음과 같다. 그러니 이번 탐길의 여정도 이 코스를 따라 움직일 것이다.
박연폭포 → 관음사 → 점심(통일관) → 숭양서원 → 선죽교 → 고려성균관(고려박물관)차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개성공단을 지나면서 이번 방문이 2000년 615공동선언과 2007년 천사선언(10.04)을 통해서 민족경제 공동번영을 위한 약속 이행에 따른 조처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100만 평 부지에 현재 23만 평의 공단이 들어서 활기찬 생산활동에 전념하고 있음을 소개한다. 개성은 송악산을 비롯 진봉산, 동물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차가 안개낀 공단을 지나 개성시내로 접어들자 개성 인민들의 주거지와 학교, 상점 등이 보이고 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이 보인다(얼어붙은 개성의 박연폭포. 말로만 듣고 글로만 보던 박연폭포를 찬 겨울에 보는 느낌은 서늘하고 상큼하다).
차가 개성 시내를 지나는 동안 입담이 끝내주는 리 선생 입에서 줄줄줄 개성에 대한 전설, 일화, 역사가 멈출 줄을 모른다. 제일 먼저 방문할 박연 폭포에 얽힌 사연부터 한 마디.
금강산 구룡폭포와 설악산 대승폭포와 더불어 3대 명폭으로 불리는 '박연(朴淵)폭포'.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松都) 삼절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 흐르는 물로 높이 37m 장관이라니 벌써 눈앞에 펼쳐질 폭포의 장관이 삼삼하다. 황진이가 머리채를 휘둘러 썼다는 시조를 멋들어지게 낭송한다. 폭포 오른쪽 위에는 황진이가 초서로 썼다는 내용의 시조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一派長川噴壑壟 (일파장천분학롱) 한 줄기 긴 물줄기가 바위에서 뿜어나와 龍秋白仞水叢叢 (용추백인수총총)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飛泉倒瀉疑銀漢 (비천도사의은한)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怒瀑橫垂宛白虹 (노폭횡수완백홍) 성난 폭포 가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 雹亂霆馳彌洞府 (박난정치미동부) 어지러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니 珠聳玉碎徹晴空(주용옥쇄철청공) 구슬 방아에 부서진 옥 허공에 치솟는다 遊人莫道廬山勝 (유인막도려산승) 나그네여, 여산을 말하지 말라 須識天磨冠海東 (수식천마관해동) 천마산이야말로 해동에서 으뜸인 것을내용도 내용이거니와 분위기 잡아 낭송하는 해설가의 목소리가 멋드러지다. 해설에 따르면 박연(朴淵)이라 함은 두 가지 어원을 지닌다. 하나는 박진사가 용녀를 따라 용궁에 다녀온 일화가 있어 박연이고, 다른 하나는 바가지 모양을 한 연못이라 하여 박연으로 불리운다.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위에 놓인 연못인데 금강산 구룡폭포로 치자면 상팔담에 해당하는 곳이다.
차창 밖을 보니 옆으로 길게 늘어선 송악산이 보인다. 높이 400여m의 송악산은 그 형상이 머리채를 풀어헤치고 누워 있는 여인을 닮았다. 배가 불룩 튀어나와 임신한 여성상인데 머리채가 풀어진 그 곳에 고려 왕궁인 만월대가 있었다.
942년 거란족이 비단 50필을 선물하고 수교를 요청하러 왔지만, 발해를 멸망시킨 민족의 적이기에 거란 사신은 유배시키고 낙타를 죽였다는 데서 유래한 낙타교를 지나 통일거리를 지난다. 그 길을 따라가면 개성 평양간 도로가 이어진다니 마음은 한 달음에 평양까지도 달려갈 듯하다.
강감찬 장군의 집터와 우물이 있다는 곳을 지나고 만월대 왕궁 서문인 오정문을 지나 해선리 마을을 넘는다. 해선리(解線里)는 한국전쟁 전에 38선이었던 곳으로 전쟁 중에 북측 땅이 되면서 선이 풀려 이런 이름이 지어졌다. 그리고 멀리 만수산이 보인다. 만수산? 어디서 많이 듣던 산이었는데. 아 이방원이 떠오른다. 드렁칡과 함께 다가오는 시조 한 수, 하여가(何如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이방원)역성혁명을 꿈꾸던 이성계의 뜻을 받아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던 시의 주인공 만수산을 지난다. 만수산 중턱에 41세 왕위에 올라 재위 26년간 나라를 다스리고 67세를 일기로 떠난 왕건 왕릉이 있다니 느낌이 더욱 묘하다.
관광객 중 하나가 고려 인삼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이번에는 인삼에 대한 설화며 효능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온다. 온화한 기후와 특이한 토질, 과학 영농으로 지금도 인삼하면 개성 인삼을 빼놓을 수가 없다.
다시 박연으로 돌아가보자. 개성 시내 거리를 지나 정명사 고개를 넘는다. 오르며 5리, 내려가며 5리라는 곳이란다. 몇 분 더 나아가니 시원한 풍광을 자랑하는 박연폭포가 기다리고 있다. 차안에서 1차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운지 리 선생이 자청하여 '아내의 노래'를 불러준다. 남측 손님들을 흥겹게 해주려는 배려가 고맙고 조금은 안쓰럽다.
살펴주는 그 눈길 떠날 새 없고젖어 있는 그 눈길 마를 새 없네사랑없이 잠시도 못사는 마음저를 위해 바친 건 하나 없어라아내여 아내여 그대는 나의 길동무~ 웃는 그 얼굴내 잘못도 저보고 용서하라네살뜰히도 반기는 그대 말 속에~ 그 진정 나는 알았네아내여 아내여 그대는 나의 길동무(아내의 노래)'여성은 꽃이라네'나 '도시처녀 시집가네' 등 북쪽의 여성 주제 노래를 들으면 우리로서는 봉건시대를 떠오르게 한다. 우리와 체제와 문화, 역사가 다른 북으로서는 우리가 봉건 혹은 전통으로 여기는 노래 주제를 그대로 담아 부르고 있다.
노래를 들을 때는 그런저런 생각에 감흥이 크지 않더니만 정작 지금 가사를 옮겨 적다 보니 가슴이 뭉클하다.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하는 남측 노래와는 정서나 분위기가 다르지만 아내를 동무 혹은 동지로 여기며 부르는 노래가 낯설음 때문인지, 혁명기가 떠올라서인지 사뭇 가슴을 부여잡는다.
박연폭포에서 잠시 쉬며 사진을 찍는 사이 일행이 다 사라졌다. 다들 사진을 찍고 일찌감치 올라간 모양이다. 차 한 잔 마시고 나무지팡이를 하나 산 뒤에 얼음 지치는 아이들을 따라 나도 얼음놀이를 하다 뒤늦게 일행을 따라갔다. 전망이 좋은 범사정에 올라 사진을 두어 장 더 찍은 뒤 가벼운 몸으로 비스듬한 산길을 오른다. 대흥산성 문을 지나 뒤로 돌아가니 자그마한 연못 - 박연이 자리잡고 있다. 상팔담처럼 멋지거나 깊은 곳은 아니지만 이 작은 연못이 거대한 폭포로 이어진다 생각하니 신기함을 감출 수 없다.
돌아서 나오는 길에 보이는 자연글발. 금강산만큼 자주, 많이 보이지는 않아도 이곳 역시 인민을 교양하려는 당의 의지가 여과없이 드러나있다. 해금강 삼일포 어귀나 내금강 만폭동 계곡에서 보았던 '지원'(志遠)이라는 글발이 새겨진 바위가 여기도 예외없이 보인다. '뜻을 멀리 두라!'.
점점 어려워질 세상, 어지러운 교육 현실을 생각하니 나의 뜻의 거처가 고민스럽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입만 살아서 중구난방인 참새떼에게 물어본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리만 살아서 갈팡질팡인 책상다리에게 물어본다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난마처럼 어지러운 이 거리에서 나는 무엇이고 마침내 이르러야 할 길은 어디인가 (김남주, 사상의 거처 중)앞선 시대, 시대를 앞선 한 시인의 고뇌가 이제 평범한 대중 모두의 화두가 되었다. 다시, 민주주의의 위기가 다가오는 현실 속에서 이 역사가 가야할 길에 대한 탐색은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걸음을 재촉해 조금 더 오르니 멀리 작은 건물 몇 채와 탑이 보인다. 관음사다. 970년 지었다가 소실되어 1646년 재건되었다 한다. 대웅전 뒤쪽 문짝에 대한 전설을 차안에서 들었던 게 생각난다.
11살 운나소년이 뛰어난 솜씨로 발탁되어 사찰문을 만들어 왔다.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에 돌아가려는데 절측에서 귀가를 불허하는 바람에 '재주가 원수로다'하며 팔을 자르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문의 좌측은 완성, 오른쪽은 미완성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은 아닌 듯하다.
가까이 가보니 대웅전 창살이 아름다워 거기에 넋을 잃은 사이 문은 잊어버렸다. 남측 손님을 반가이 맞아주는 주지스님, 부지런히 안내하느라 바쁜 안내원들, 잠시 다녀가면서 한 장이라도 더 남기려 사진을 정신없이 찍어대는 관광객들. 역사의 숨결을 고즈넉이 느끼기에는 이 흥청거림이 어울리지 않지만, 분단을 넘어서 꾹꾹 밟아주고 가는 남측 객의 이 급한 발걸음이 그리 흠이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시내로 돌아오는 길 다시 상세하고 긴 설명이 이어진다. 능이 연이어 있는 마을 연능리와 72명의 고려 충신들이 벼슬을 거두고 돌아가 충절을 지키는 의미로 문을 걸어잠그고 두문불출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두문동을 멀리하고, 최대 무역항으로 예성강을 거쳐 멀리 아라비아까지 무역을 진행한 고려의 역사와 경제가 술술 흘러나오는 가운데 어느덧 시내로 접어들어 강감찬 장군의 승전보가 기록된 승전동을 지나간다.
개성 남대문을 지나 어느덧 도착한 식당 '통일관'. 여러 종류 반찬들을 소담하게 담은 11첩 반상기에 소주 한 잔 걸치니 오전의 추위가 싹 가신다. 북측 음식의 맛은 원래 담백하고도 깊은 맛이 일품인데 반찬맛이 남측과 크게 다르지 않다. 듣자 하니 남측 손님들이 다녀가면서 자극적인 음식맛을 원해 거기에 맞추다보니 별로 차이가 없어졌다고 한다. 시원한 닭국을 두 그릇이나 먹고 아리따운 북측 안내원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뒤에 거리로 나가니 멀잖은 곳에 북측 동포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번 여행은 특별히 거리의 인민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차피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상황이고, 안내원들과는 틈틈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작년 여름 내금강을 처음 갔을 때, 안내원과 워낙 친근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터라 개성에서는 딱히 안내원들하고도 더 깊고 정감어린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럴 여유도 없었고. 서부득화부진(書不得畵不盡)이라 하여 '글로도 얻을 수 없고, 그림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금강산을 비로소 마음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만나면서였다. 이 개성 역시 짧고 바쁜 시간 안에 진심으로 마음에 담아갈 수 없을 바에야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나 역사에 좀 더 빠져들고 싶었던 까닭이다.
포은 정몽주의 집터에 세운 숭양서원이 다음으로 갈 곳이다. 리 선생은 예외 없이 정몽주에 대한 소개와 함께, 만수산의 드렁칡을 거부한 너무나도 유명한 시조 '단심가'(丹心歌)를 읊어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정몽주)차에서 내려 서원으로 가니 옆에 정몽주 집터를 나타내주는 표식비가 있다. 안내원의 자세한 해설을 서원 앞에서 듣고 안으로 들어가니 단촐한 공부방 몇 개가 놓여있고 계단을 오르니 작은 방에 포은의 초상이 빛난다. 사진을 찍고 차에 오르니 다음은 단심의 비원이 서린 선죽교다. 자남산 여관에서 남북교육자 대회 때 한 번 들른 곳이라 감흥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 때문인지 일행의 관심은 다른 어디보다도 컸다.
크기로 봐서야 6m 남짓한 작은 돌다리. 사람들의 통행을 막느라 앞뒤를 다시 돌로 막았다. 옆에 명필 한석봉이 쓴, 선죽교를 알리는 작은 비가 놓여있고 조금 떨어져 마주한 곳에 영조와 고종이 세웠다는 표충비가 있다. 암수 거북이 각각 하나씩을 떠받들고 있는 비들은 그 효험을 자랑하는 탓에 관광객들이 누구나 거북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느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지막 일정은 고려 성균관으로 알려진 고려박물관. 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려 성균관. 오백년의 조선 성균관 그리고 성균관 대학교를 합쳐 이 땅에는 세 개의 성균관이 있단다. 992년 설립된 국자감을 개칭해 부르는 고려 성균관은 명실상부한 박물관이자 교육기관으로 손색이 없다. 이곳에는 고려청자와 세계최초 금속활자본을 포함 1000여 종의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밖에는 천년의 세월을 함께 한 나무들이 마당에서 인사를 하고 건물마다 고려 역사 유물이 남측 손님의 발길을 기다린다. 한쪽에는 헌화사를 비롯한 유명한 절들의 탑과 석등 등 국보급 유물들을 전시해놓아 그 규모와 의의가 남다른 곳이다. 이 곳도 두 번째 방문이라 안내원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다니며 이번에는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각종 유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특유의 유려한 설명도 놀랍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외적을 물리친 조상의 슬기를 강조하거나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슬픔이 교차하면서, 결국 우리민족끼리 자각과 단합 속에서 통일을 이루자는 의지가 듣는 이의 가슴을 더욱 뜨겁게 만든다. 정권이 바뀌면서 통일부의 미래를 알 수 없을만큼 위태롭고 특수한 우리 민족의 위기가 어디 먼 나라 먼 일일까 싶은 까닭이다.
태조 왕건은 물론 고려의 충절을 지킨 정몽주와 최영 장군을 비롯, 황진이 서경덕 등에 얽힌 일화들이 많이 남아 있고, 연암의 무덤이 개성 부근에 있다는 말이 국어교사인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호모 쿵푸스>의 저자 고미숙이 <나비와 전사>에서 언급한 바, 전사 정약용과 대비하면서 자유인의 표상으로 제시한 연암 박지원. 통일의 전사와 자유인의 초상 속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나로서는 황진이와 서화담 못지 않게 연암의 무덤이 가보고 싶어졌다. 개성의 거리로 나온 시민들과 시대의 고민없이 뛰노는 아이들 너머로 저무는 개성의 서쪽 하늘이 어두워온다.
2003년부터 통일위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만났던 북측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이름을 되뇌어본다. 마음 속으로만 통일의 염원을 빌어보는 게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가슴 속에 타오르는 통일의 불씨만큼은 꺼뜨리고 싶지 않다.
빌어먹을(!), 망국의 노객같은 눈물겨운 이 심정 가눌 길 없건마는, 분단 60여 년의 세월이 헛되지 않아 민족의 숨결 앞에 스러진 조선의 영령들이여! 이 민족 살피시어 도와주시라, 도와주시라 메아리 없는 노래 부르며 세 번째 개성 방문의 탄식을 땅에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