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에 도착하니 오후 7시가 다 되었다. 저녁을 먹고 보성역에서 열리는 매일촛불에 참석한 뒤 숙소에 왔다. 숙소 앞마당에서 올려다 본 하늘에 선명한 별들이 와르르 열려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숙소는 백남기 농민이 자주 들러 회의도 하고 막걸리도 함께 마시던 곳이다. 벽에 걸려 있는 빨간 깃발이 달린 꽹과리에 눈길이 머물렀다.
아침, 숙소 옆 잔디밭에 모여 간단한 체조와 함께 도보순례 하는 동안 다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가급적 양말을 두껍게 신고 신발은 발에 꼭 맞는 것으로, 발뒤꿈치부터 땅에 닿도록 보폭을 약간 넓혀서 걷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몇 번 연습했지만 막상 걸을 때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집 옆 너른 잔디밭을 보니 다시 벽에 걸린 꽹과리 생각이 들었다. 이곳 농부들은 아마 이 곳에서 신나게 풍물을 쳤으리라, 사진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고 마을 사람들 웃음소리가 잔디밭에 가득 울려 퍼지는 듯했다.
300명으로 출발했지만, 끝에선 구름떼가 되리라
첫 날, 날씨는 더없이 좋았다. 보성역에서 300여 명이 모여 출정식을 진행했다. 전남에서, 울산에서, 서울에서 모였다. 노동자가, 농민이, 세월호 가족들이 모였다. 17일간의 대장정에 나서는 자세와 도보순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함께 얘기했다.
이대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을 박근혜 정권에게 보여주리라. 폭력적인 권력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보성에서 서울까지 걷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정부가 백남기 농민에게 가한 살인적 만행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백남기가 되어서 알리리라, 300명으로 출발했지만 전국의 백남기가 구름떼같이 모여들어 서울을 가득 채우리라. 그래서 한 목소리로 그 날 백남기 농민이 외치고 싶었던 얘기를 목청껏 외치리라 다짐했다. 도보순례 깃발이 하늘에서 펄럭이며 우리를 응원했다.
첫날의 순례는 보성역을 출발해 노동면사무소(5Km)까지 걷고 그곳에서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명봉역까지 3.9Km를 걷고, 차량으로 화순 능주면사무소에 도착한 후 다시 화순시내까지 가는 일정으로 20Km가 조금 넘는 길이었다.
일정 중에 만난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가슴을 울컥하게 했다. 한 고등학생은 깃발을 들고 선두에서 걸었는데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선 깃대가 휘청거렸다. 그 걸 학생이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짠하다며 일행들이 바꿔서 들어주기도 했다.
아직 볼 살이 통통하고 말 시키면 부끄럼 먼저 타는 학생들이 봄방학이라며 1박2일의 일정을 함께 하겠노라고 나선 걸음을 어찌 고맙다며 웃기만 할 수 있겠는가. 좋은 것을 경험하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면 좋겠는데, 다리 아프고 발바닥 상하며 먼 길을 걷게 하였으니... 그럼에도 함께 웃으며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청년 백남기'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뻐끈했다.
가는 도중 노동면사무소, 명봉역, 능주면사무소, 하니움체육관 등에서 틈틈이 휴식을 취했다. 휴식지 곳곳마다 지역에서 마련해 준 고마운 간식과 막걸리 그리고 한자락 노래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덕분에 무거운 다리의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지역 주민들은 함께 걷지 못해 미안해하고 아프지 않게 잘 다니시라며 우리를 응원해 주셨다.
길가의 풀, 나무, 들에서도 응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농촌을 사랑하고 농업을 애지중지 돌봐 온 백남기 농민을 꼭 다시 모시고 오라는 듯했다. 화순은 유난히 메타세콰이어가 늘어선 길이 자주 이어졌다. 도심 빌딩들만 보다가 키 큰 나무들이 우거진 길과 너른 들판을 보니 가슴이 탁 트였다.
보성에서 화순까지, 친절하게 안내한 경찰
화순 시내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선전전도 함께 했다. 약국, 음식점, 동물병원, 꽃집 등 상가도 들어가고 지나는 시민과 차량에게도 선전물을 드린다. 시민들 모두 정중히 잘 받아주신다. 이웃 보성에서 농사짓던 백남기 어르신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일에 한마음으로 안타까움과 울분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어둠이 내린 화순시내에서 화순시민들에게 도보행진 이야기도 전해드리고 우리의 결의도 밝혔다. 이어 화순경찰서 앞에서 폭력경찰을 규탄하는 집회도 가졌다. 보성에서 화순까지 오는 동안 경찰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안전하게 걸을 수 있었다. 경찰의 그런 모습이야 말로 진정한 경찰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살인적 수압의 물대포를 직사로 쏘는 모습은 시민들이 믿고 의지할 경찰의 모습이 아니다. 모든 경찰이 진정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할 때에야 시민들의 박수와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첫날의 도보를 마무리했다.
도보행진은 첫 3일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3일을 걸으면 단련이 되어 일주일을 걸을 수 있게 되고 걷는 시간도 빨라진다고 한다. 첫 날 행진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니 뒤꿈치가 까진 사람,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사람, 허벅지가 아프다는 사람 등 다들 성치 않은 몸이 되고 말았다. 찜질을 하고 파스를 붙이고 크림도 바르며 치료를 했다. 남은 15박 16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몸을 잘 달래야 했다.
도보행진 중 지역을 지날 때마다 합류하는 시민들이 계신 줄 안다. 긴 행진의 길에 바르게 걷는 방법을 알고, 적용시키는 것이 중요할 듯하다. 잠시 합류하는 일정이라면 많은 짐을 가져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 간식과 물 등은 넉넉히 준비되어 있으니까 함께 한다는, 2월 27일을 함께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오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들의 걸음의 이유를 알려내고 더 많은 걸음이 2월 27일 서울에 모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압물대포라는 살인무기도 서슴없이 꺼내든 험악한 정권을 우리 농민과 노동자와 민중들이 힘을 모아 심판하는 것이 우리가 걷는 이유이다. 제대로 된 사과와 처벌을 받아내고 무너진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것, 그것이 16박 17일 우리 도보행진단이 걷는 이유인 것이다.
* 둘째날의 일정은 화순~광주인데 비소식이 있다. 비 오는 날의 도보순례와 그 이후 소식 등은 다시 전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