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한 미국 패권 질서의 변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1세기 국제정치는 미·중 관계에 달려있다고 했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패권 지위는 지속적으로 약화되었고 도전자로서 중국의 입지는 날로 강화되었다.
미국 패권을 대체할 기세였다. 서둘러야 했다. 경제위기에서 빠져나오는 아주 짧은 몇 년 동안 미국은 중국을 세계를 함께 경영할 파트너로 다루는 듯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 정도 그랬다.
급속히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국이 유일 초강국 미국의 패권 지위를 위협하는 한편 미국이 경제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미국은 도전자 중국에 대해 봉쇄와 억제를 해야 하게 되었다.
'재균형(rebalancing)' 방침에 따라 아시아를 중심으로 놓고 국가안보 정책의 틀을 다시 짰다(pivot to Asia). 정치, 경제, 안보의 수단과 자원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두기로 했다. 그물은 넓게 그리고 탄탄하게 짜야 한다.
협력외교를 강조하던 오바마의 미국은 '힘의 외교'를 내세운 네오콘 부시 정부보다도 동맹의 결속을 매우 중시한다. 유일 초강국 마지막 시절 부시 정권은 동맹국이 함께 해주면 좋고, 안되면 독자적으로라도 전쟁과 압박노선을 불사했다.
그러나 중국이 부쩍 커져 버린 새로운 현실에서 동맹은 미국의 힘을 보강하는 임무를 떠맡아야 한다. 중국 봉쇄전략의 일익을 담당하지 않으면 동맹으로서의 가치는 없어진다. 한국은 또다시 냉전기 최전선 국가로서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구조가 도래한 것이다.
두 개의 중국 포위 전선 : 남중국해와 한반도 미국과 중국은 두 개의 전선에서 대치하고 있다. 남중국해에서의 남방 전선과 동북아에서 한반도를 중심에 한 북방 전선이다. 대립의 출발은 남방 전선이다. 중국해에 항공모함 등 미국의 해군력을 깊숙이 그리고 무겁게 침투시키고 있다.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센카쿠·다이요타오 지역과 그 주변 해역에서 무력시위와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은 거의 매일 워싱턴, 도쿄, 베이징의 아침 방송 메인 뉴스가 되고 있다.
중국은 남방 전선에서 포위를 다양한 방식으로 뚫고 있다. 베트남과의 관계 회복, 태국을 통한 인도양 직접 진출, ASEAN과 외교 강화,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이란과의 전폭적인 협력관계 회복으로 나타나고 있다.
남방 전선에서 양측의 '근육 자랑'은 거의 매일 계속되고 있지만 당장 중국의 심장을 직접 노리진 않는다. 오히려 중국이 실전능력을 갖춘 군사력을 키우는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방 전선에서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앞세우고 들어오는 것은 심각한 위협이 된다.
남방 전선에서 중국과 미·일의 군사력 시위가 일종의 '어깨 싸움'이라면, 북방 전선은 주먹과 주먹, 뼈와 뼈가 부딪히는 곳이다. 강력한 동맹국을 갖지 못한 중국으로서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대치하는 것은 벅차다.
미국이 중국포위망을 남방 전선에서 북방 전선으로 넓히는 데 있어서 당연히 최전선 국가 한국이 합류해야만 했다. 지난해 한국 정부가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기반시설 투자은행(AIIB)에 가입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의 전승절 기념 열병식 행사에 시진핑 주석 옆에 서는 것에 대해 미국은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동맹의 결속 강화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지난해 겨울부터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일본과 위안부 문제로 더 이상 갈등하지 말도록 유도하였고, 한국 정부가 서둘러 위안부 문제를 '종결지은' 배경이다.
미국의 군사적 대치 전선의 확장은 2016년 들어서 중국의 금융 및 자본시장 흔들기로 이어지고 있다. 조지 소로스와 같은 헤지펀드 세력이 중국의 외환시장과 자본시장을 교란시키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있다. 군사안보상의 포위가 노골화되고 금융 자본시장에서의 공격에 노출된 중국 지도부는 갈수록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다.
지난 1월 상순과 하순 두 차례 중국을 다녀왔다. 중국 CCTV는 거의 종일 남중국해에서 미국과 일본의 군함과 전투기들이 기동하는 실제 화면과 컴퓨터 그래픽 영상을 동원하여 중국이 군사적 압박을 받는 듯한 이미지를 발신한다. 특히 1월 상순 방문 때는 북한 핵실험 직후라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B-52 전폭기 영상을 보여주기 바빴다.
한미연합훈련 자료 영상도 계속 보여준다. 북 핵실험의 위험성보다는 한·미 군사력 전개가 당장 위협인 듯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뼈와 뼈가 부딪히는 북방 전선, 즉 서해와 한반도의 육상과 공중 그리고 동해에서 미군의 전략무기 전개는 도저히 참기 어렵다. 바로 그사이에 한국의 박근혜 정권은 전방기지의 역할을 다하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탈냉전기 '압록강 전선' 구축 전략 뼈와 뼈가 부딪히는 북방 전선에서 한국은 연약한 살덩어리와 같다. 냉전 종식 이후 한국의 역대 정부는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화약고 한반도를 대륙과 해양세력이 협력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전환하는 대외전략을 구사하였다. 노태우 정부는 중국과 러시아와 수교를 이뤄냈고, 북한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남북 교류와 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를 채택하였다.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한반도 안보문제 해결의 직접 당사자로서 북한의 핵 개발을 동결시키고 항차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최대한의 외교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 10.4 합의를 통해 북한이 핵 활동을 동결하고, 관련 시설의 가동 중지와 재사용이 불능토록 했다. 핵시설이 밀집한 영변을 미국의 비확산 전문가들이 감시할 수 있게 했으며, 2008년 6월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북한이 스스로 파괴하는 초석을 깔아주었다.
북한이 처음 핵실험을 한 2006년 10월 이래 최근까지 노무현 정부는 물론 그토록 중국과 불편했던 이명박 정권조차도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대해서는 중국의 역할을 중시했다. 북한과 중국 사이에 갈등구조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이명박 정권도 북한 체제의 붕괴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붕괴에 따른 재앙을 홀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를 통한 국제 제재를 가하면서 한국과 미국은 북한을 6자회담에 나오도록 문을 열어두었다. 바로 '압록강 전선 전략'이다.
국제 제재를 통해 북한의 태도 변화를 압박하면서도 그 압박으로 인해 곧바로 남북이 군사적 대치로 들어가거나 중국이 북한의 뒤를 봐주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다. 이러한 압록강 전선 전략이 비록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개발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악화되고, 한국과의 거리를 좁히는 외교적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압록강 전선에서 휴전선으로 내려앉은 북방대치
2월 7일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발사시험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서울에서 한미 동맹결정(Alliance Decision)에 따라 사드(THAAD) 배치를 양국이 협의키로 하였다. 중국 외교부는 베이징 주재 북한 대사를 불러 미사일 발사에 '유감'을 표명한 것보다 한층 강한 표현으로 김장수 주중 한국대사를 '초치'하여 '엄중 항의'하였다.
대북 제재를 위한 국제 공조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중국이 북한보다는 한국의 행위에 더 강력한 우려를 전달하면서 북한을 고립하기 위한 압록강 전선이 흐트러졌다. 뒤이은 한국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와 북한의 즉각적인 공단 내 우리 기업 자산의 동결 및 군사통제구역 선포로 인해 한국은 또다시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첨예한 대치를 벌여야 하는 최전선 국가가 되었다.
2월 12일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중국의 '핵심이익'을 침해할 수 있는 사드 배치에 신중을 기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드가 표면적으로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에 대한 방어적 조치라고 하지만 실제로 자국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지적하였다.
하지만 같은 날 미국의 상하 양원을 통과한 대북 독자적 제재의 핵심이 '세컨더리 보이코트(second boycott)'이며, 그 대상은 북한 기업과 경제활동을 유지하는 중국 기업이다. 그 다음날인 13일 주한미군은 탄도미사일 방어자산을 추가하겠다며 느닷없이 패트리어트 부대를 들여왔다. 그리고 이번 주부터 사드 공식 협의가 시작된다.
북한의 핵시험과 장거리 로켓발사로 이어진 2016년 벽두에 중국은 미국과 한국의 경제, 군사적 제재를 받게 되는 매우 고약한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북한이 아닌 중국이 '군사적 제재' 혹은 '군사적 압력'을 받게 되었다고 인식하는 이상 '최상의 한중 관계'가 최악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될 수 있다.
중국의 공식적인 언급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박근혜 정부의 외교에 중국이 사라질 수 있다. 세컨더리 보이콧, 한미 사드 배치 협의, 최대규모의 한미 연합훈련이라는 3중 공세가 가해지고 있다. 그 이상으로 중국의 한국에 대한 보복은 다양해지고 치명적일 수 있다.
'MD 전진기지 한국'은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응징을 위해 중국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지난 한 달의 흐름을 되짚어보면 미국이 진정으로 노리는 대상이 중국인지 북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매우 불분명하다.
결과만 놓고 보면 중국포위를 위한 북방 전선이 매우 신속하게 구축되었다. 분노에 찬 한국은 부지불식간에 그 MD의 모든 구성요소를 다 들여오고 있으며, 대륙을 향한 공격루트를 깔아주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 정권이 앞장서 조직한 가장 강력한 대북제재의 틀이 본질적으로는 중국포위망의 구축이었다는 점을 되짚어 보라. 그렇게 느끼고 있고 그 대응책을 세우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라도 해봐야 한다. 적어도 윤병세 외교장관이 '끝장 결의(terminating resolution)'라며 분주히 외치고 다니는 동안 이미 동북아의 군사적 대치구도가 전혀 다른 골짜기에 들어섰음을 냉엄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후폭풍에 빠져들 것이다.
지금이라도 아주 늦은 건 아니다. 정책의 목적을 분명히 해주고 그 선을 그어 줄 필요가 있다. 그런 맥락에서 아래 다섯 가지 조치를 제안한다.
첫째, MD 전진기지로 비쳐질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정리해줘야 한다. 이를 위해 패트리어트 포대가 주기적으로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라고 밝혀야 한다. 사드 문제는 배치의 '타당성과 적합성(validity and feasibility)'을 검토해보는 것이며 당장 배치할 의도나 계획은 아니라고 밝혀줄 필요가 있다.
둘째, 중국과 공개적인 성명전을 자제해야 한다. 뮌헨에서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이 한국의 윤병세 외교장관에게 공식 우려를 전달했다. 이에 서울에서 외교부 대변인이 공개적으로 중국의 이익을 건드리지 않는다거나 중국이 간섭할 바가 아니라는 투로 맞대응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셋째, 중국이 말하는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이라는 원칙에 대해 한국 정부도 같은 입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줘야 한다. 한국도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원하며, 중국이 북한을 지금이라도 6자회담장에 데려와서 비핵화 문제를 논의할 수 있고 이란이 걸었던 길을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중국이 어렵겠지만 북한에 특사 파견 등 역할을 지속해주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넷째,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중국의 우려를 조금이라도 불식시킬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다섯째, 사드 배치 논란이 한미 동맹 자체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할 정도로 일방적인 모습을 띄는 것은 미국에게도 좋지 않다. 서울과 워싱턴 양 정부는 이에 대해 매우 섬세한 정책조정을 해야 한다.
강대국 간 전쟁은 언제 일어나는가? 구조적으로 패권 국가의 영향력과 입지가 흔들리고 도전 국가의 국력이 급속히 커지는 시기에 전쟁은 터진다.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상대방의 행위에 대한 잘못된 인식, 즉 오인(misperception)에서 비롯된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서로 오인하는 일은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모두가 패자가 되는 길은 막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박선원 시민기자는 전 청와대 안보전략비서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