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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보여주는 모양새를 서로 나눠 보고, 그 안에 담긴 뜻을 서로 헤아려 보고, 그 안에서 내 세계를 그려보고, 그로부터 지적 유희를 즐기고, 그것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그런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그 안에는 주류도 없고, 패거리도 없는 그런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재미있게 말하자면, 이 땅에 숨겨진 고수를 찾아서 놀이를 하자는 것이다.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한 세상 멋지게 놀 수 있는 이 땅의 고수를 찾는 놀이다. 2016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2 최영진 편 '공생(共生)을 묻다'가  2월 19일부터 29일까지 전시된다. - 기자 말

사진가 최영진은 20년 가량 작업한 것들을 2000년대 초부터 꾸준히 전시와 책으로 내고 있다. 처음 세 딸과 부인을 소재로 한 '네 여자'를 필두로 갯벌, 밤, 새만금, 서해안, 대공(大空) 등을 소재로 하여 생태와 자연을 말하는 작업을 해왔고, 지금은 서해안, 섬, 새만금을 동시에 작업하면서 산에 대한 작업도 같이 하고 있다.

섬과 바다, 간척지와 땅, 산과 도시 그리고 문명이 엮는 장대한 서사시를 때로는 바다의 시선으로 때로는 땅의 시선으로 때로는 산의 시선으로 보는 작업들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도시와 문명의 주인공의 입장에서 바다를 보고, 산을 보아 왔다. 그때 산과 바다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도시와 문명에 의해 대상화 된 존재다. 최영진의 사진은 그런 이분법적, 분별적, 문명적 세계관에 대한 반성이다.

도시에서 산을 바라보지 않고, 산에서 도시를 바라보면 우리네 삶은 어떻게 될까? 산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일까? 바다가 인간 욕망의 배출구로 소비되면 그 끝은 어떻게 될까? 산이 문명을 낳고, 바다가 문명을 낳는 모태인데, 그 모태를 소비해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이런 의문에 대해 사유의 실마리를 넌지시 던지는 작업이다. 

 최영진_네 여자_1997~2000
최영진_네 여자_1997~2000 ⓒ 최영진

최영진은 전라도 영광에서 나고 자랐다. 그에겐 서해안 갯벌과 바다가 추억의 공간이자, 돌아가고 싶은 귀소(歸巢)다. 지금의 작가 정신을 지탱하는 기둥이기도 하다. 바다 곁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바다와 갯벌은 곧 자연이다. 달리 설명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그런 존재다. 그 자연을 자연의 시각으로 담으니, 그의 작업은 결국 자연에 대한 헌시가 된다.

바다가 산보다 위대한 것은 아래에 있기 때문이라는 노자의 생각을 사진으로 말하고자 한다면, 굳이 인간을 중심으로 놓고 유한한 시간을 기록하는 방식을 따를 필요가 없다. 인위적 방식으로 만들어 내는 예술의 방편을 따를 이유도 없다. 노자의 자연을 사진으로 말하려면 쉬운 사진이 좋다. 그래야 여러 쪽에서 울림이 생긴다. 결정적 순간이라든가, 기존 프레임의 파괴, 예리한 운동성 같은 특별한 (혹은 창조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담는다. 때로는 은은하게 때로는 세밀하게.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 <도덕경> 56장

사진가 최영진이 자연과 생태의 삶을 주제로 삼아 하는 작업 가운데 말하기 방식의 관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서해안'이라는 이름으로 2013년에 전시하고 <West Sea of Korea>라는 이름으로 낸 책이다. 이 책은 멀리서 본 어느 서해안의 해수욕장 사진 몇 컷으로 시작한다. 아련하고 낭만적으로 보이는 사진들이 한동안 계속해서 나온다.

주로 하늘 여백이 넓고 빛이 은은하고 사람들이 아주 작게 나오는 이미지들인데, 흔한 키치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흔한 동양화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서양의 추상화적 풍경화 같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누구나 좋아하는 전형적인 소재주의 사진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책의 끝 부분으로 가면서 소용돌이가 한 번 인다.

시커먼 하늘 밑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이미지 하나가 나오는데, 누가 봐도 어? 이게 뭐지?라고 의문을 가질 만하다. 노자가 말하는 현공(玄空)일까? 그리고 곧 이어져 느닷없이 죽은 철새 한 마리 대가리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다. 섬뜩하다 못해 소름 끼친다. 그리고서는 또 죽은 새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가 나오면서 책이 끝난다. 끝 부분의 사진 몇 컷 때문에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은 혼란스럽게 된다.

 최영진_ 서해안 새만금,2004~2008
최영진_ 서해안 새만금,2004~2008 ⓒ 최영진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 작가의 메시지를 쉽게 간파하기가 어려운 것은 그의 이러한 말하기 방식 때문이다. 이런 작업의 경우, 책이나 전시장의 첫 이미지와 끝 이미지, 각 파트의 첫 이미지와 끝 이미지에 주목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의 경우 작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끝 부분의 사진들에 주목하지만, 난 첫 부분의 사진들에 주목한다. 첫 부분의 해수욕장 풍경 사진들은 평화스럽고 아늑한 느낌이다. 반면에 끝 부분의 사진들은 죽어서 썩어가는 새와 물고기라 심란하다.

첫 부분 사진들만으로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혀 읽을 수가 없는 반면, 끝 부분의 사진들은 그것만으로도 작가의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사실, 첫 부분 사진들은 독자를 고의로 안심시키는 일종의 기만전술로까지 읽을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 책 첫 부분의 사진들은 이발소에 걸어놓으면 딱 이발소 사진이고, 응접실에 걸어놓으면 딱 살롱사진이다.

그렇지만 죽은 새와 물고기 사진들과 함께 보면 작가주의에 충실한 작품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도 그의 사진 하나 하나는 애호가에 의해 구입되어 단독의 장식품으로 사용되고 있을 것이다. 그 경우 사진가가 말하고자 하는 묵시록의 메시지는 소거되어 버리고 새로운 차원의 감상 미학이 발생한다. 전적으로 독자가 주체가 되어 사진을 읽어내는 방식이다.

'사람은 땅을, 땅은 하늘을, 하늘은 도를, 도는 자연을 닮는다.' - <도덕경> 25장

고대 힌두 현인들은 땅을 품이 넓은 자라 했다. 그리고 그 품이 넓은 자를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어머니로 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 어머니를 암소로 보았다. 그들에게 땅은 만물에 생(生)을 주고 기(氣)를 주는 암소였다. 그런데 그 대지의 어머니 신 쁘리트위(Prithvi)는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주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인간에게 내어 주는데, 인간은 그를 착취한다.

땅은 모든 식물을 낳게 하는 어머니다. 끝없이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는 생명의 모태다. 곡식은 생명이 되고, 그 생명으로 인간의 생명을 낳게 하고, 죽으면 그것을 품어 다시 또 다른 생명으로 올려주는 너른 터다. 생명과 죽음이 순환하고, 그것이 윤회하는 거대한 유기체다. 그 땅, 어머니 대지가 곧 사진가 최영진의 갯벌, 라 마르(La mar)다.

 최영진_라 마르, 살아있는 갯벌, 2000~2003
최영진_라 마르, 살아있는 갯벌, 2000~2003 ⓒ 최영진

'라 마르. 살아 있는 갯벌' 사진들은 모두 현미경적이다. 전체적으로 사람의 살갗 느낌이다. 어떤 것은 살갗이 튼 자국 같기도 하고, 모세혈관 같기도 하고, 모공 같기도 하다. 숨을 쉬는 듯한 생생한 이미지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낸다. 사방이 꽉 막힌 프레임 안에서는 모든 생명을 잉태한 태초의 땅을 느끼고, 위로 열린 하늘 공간으로 나뉜 프레임으로는 코스모스로 가기 전 카오스의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갯벌 속에서 나온 모든 존재가 어디론가 가는 운동을 보여주는 듯, 힘이 넘쳐흐른다. 프레임이 막혀 있든, 열려 있든 '라 마르. 살아 있는 갯벌' 사진들은 꿈틀거리면서, 갯벌 위 모든 존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작은 것이라고 해서 무시당하거나 없어도 되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얼마나 작은지 우리의 눈과 인식 체계로는 파악할 수 없지만, 그 작은 존재들이 이루는 전체를 인식할 수는  있다.

어머니의 손길 하나만으로도 어머니의 우주적 사랑을 파악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분은 보되, 전체를 보지 못하거나 전체를 보되 부분을 보지 않는다. 이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갯벌을 파괴하는 것이란 곧 그 안에서 숨 쉬고 있는 뭇 생명체를 죽이고 나아가 대지의 순환 체계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인(因)과 과(果)의 거대한 체계 속에서 산다는 말이고, 모든 존재는 그 안에서 반드시 대가를 지불한다는 법칙이 작동한다는 말이다. 현대 문명이 지금같이 자연을 대상화 하고, 약탈하고, 그것을 소비하는 데만 몰두하고 탐닉에 빠진다면 결국 그만큼 자연은 그 명(命)을 재촉하게 된다. 철저한 되갚음, 응보(應報)의 세계다. 그 자연의 보복을 경외하자는 말을 하는 것이다, 사진가 최영진은 지금.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추한 것이 있어서다.' - <도덕경> 2장

최영진은 분노한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식으로 처리해버린 새만금에 대해 분노한다. 그렇지만 그는 그 분노를 열정으로 쏟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격문으로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직설적이고,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지로 넌지시 말한다. 고인돌을 찍은 'Stone, Full of Life. 돌, 생명을 담다'는 그러한 그의 사진 언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고인돌 위에 끼어 있는 이끼, 돌이 갈라지고 그 갈라진 틈이 만들어내는 구멍, 그 사이에서 자라나는 초록의 생명, 그것들이 빛과 더불어 무시로 그려내는 파노라마 같은 그림, 소나무 밭을 주위에 두고 마치 카멜레온처럼 색을 초록으로 만들어버린 오브제 ... 그 어디에도 시간의 흔적이 박혀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의 발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고인돌을 작업한 또 다른 사진가 권태균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권태균의 고인돌 작업에는 내러티브가 있다. 그 중심에 사람이 있고, 그래서 그의 사진은 고인돌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사는 삶의 풍경이다. 따뜻한 인간미가 나는 포토저널리즘에 입각한 다큐멘터리 스타일이다. 그런데 최영진은 다르다. 그의 사진에는 사람이 있지 않다. 자연에 대한 사유만 있다. 냉정하다. 사람의 역사보다 더 큰 차원의 자연에 대한 지구사적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최영진_돌,생명을 담다_2009~2011
ⓒ최영진_돌,생명을 담다_2009~2011 ⓒ 최영진

최영진의 사진은 전반적으로 내러티브를 잘 만들지 않는다. 'Stone, Full of Life. 돌, 생명을 담다'가 그렇고, '라 마르La Mar'가 그렇다. 굳이 말 하고자 하는 바를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식이다. 사람이 들어가지 않고, 사람 사는 모습이 들어가지 않고, 그것을 파괴하는 현장을 이성적 시선으로 분석하거나 기록하지 않는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유를 나누는 방식이다.

고인돌이 사람들 사는 마을에서 놓여 있는 모습을 그리는 방식은 문화를 다루는 방식이다. 하지만, 고인돌을 카멜레온의 보호색을 보여주 듯, 주변의 자연과 더불어 있는 듯 없는 듯 그 경계도 찾기 어렵고, 분별하기도 어려운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은 문화를 낳은 자연을 따르는 방식이다. 갯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경우와 달리, 내러티브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서쪽 바다, 새만금'에서다. 이는 다른 작품과 달리 새만금 간척사업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기록물이다. 그래서 내러티브가 있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장편 서사시에 '새만금'에서 구체적인 에피소드 하나를 취해 끼어 넣는 방식이다.

그 안에는 조개를 채취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주인 따라온 개도 보인다.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시에서나 보일 법한 고급 승용차도 보이고, 그 차가 남긴 바퀴 자국도 있다. 서서히 방파제는 쌓이고, 갯벌은 갈라지면서 물은 빠지고 뭇 생명들이 죽어가는 곡소리가 들려온다. 사진가는 갯벌이 어떻게 죽어가고 그것이 어떻게 인간을 죽이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아 배를 가르듯이 시간이 점점 지나가면서 뻘은 메말라 갈라지고, 그 속에 감추어진 생명체들은 불 속에 타들어가듯이 최후의 순간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최영진_서해안 새만금_2004~2008
ⓒ최영진_서해안 새만금_2004~2008 ⓒ 최영진

그의 사진은 기호와 상징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자연이란 어떤 방식으로든 규정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호나 상징은 대상화를 통한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 자연은 대상화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사진 어디를 보더라도 그가 말하려는 바, 생태학에서 흔히 말하는 근원, 회귀, 순환, 복잡계 등을 드러내는 기호화 된 이미지는 없다.

사진이 자연을 담고자 한다면, 그 방식은 자연의 속성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결국 그의 사진은 노자의 미학을 – 만약 이런 용어가 성립할 수 있다면 – 사진으로 시각화하는 것이다. 노자가 보는 미(美)와 추(醜)를 노자가 말하는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노자가 말하는 비어 있음과 유기체의 방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인공은 여백을 꽉 채우고, 자연은 여백을 만들어낸다. 인공은 부분을 잘라서 인식하고 자연은 부분을 연계시켜 인식한다. 최영진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대지(大地)와 대해(大海), 대공(大空)을 보여줌으로써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이상향을 말하고자 한다.

 ⓒ최영진_서해안 새만금_2004~2008
ⓒ최영진_서해안 새만금_2004~2008 ⓒ 최영진

그의 사진을 보는 내내 'West Sea of Korea'에 나오는 죽어 다 말라 버린 물고기 한 마리 이미지가 쉬 사라지지 않는다. 그 사진을 통해 난, 노자가 말하고 최영진이 따르는 자연의 미와 추에 대해 생각한다. 죽은 물고기의 몸이 썩고 말라 부서진 모습이 흡사 꽃이다. 부서진 자연을 말하려 산화해 버린 꽃. 느닷없이 그 이미지가 화가 최병수의 '너의 몸이 꽃이 되어'에 중첩된다.

 ⓒ최영진_서해안 새만금_2004~2008
ⓒ최영진_서해안 새만금_2004~2008 ⓒ 최영진

미군의 폭격에 죽은 아들이 아비의 품 안에서 꽃으로 산화하듯, 파괴된 새만금 갯벌에서 죽은 새 한 마리가 말라버린 죽음의 땅 위에서 꽃으로 산화한다.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과 추함이 따로 분별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존재가 함께 어우러질 때 그 안에 추함이 있고 그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 바다가 바다로서, 갯벌이 갯벌로서 그 자리에 그렇게 있을 때 그것이 아름다움이다. 보지 않았던가, 고인돌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 교수입니다.



# 최영진#사진가 최영진#갤러리 브레송#이광수 교수#김남진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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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사 전공의 역사학자. 역사를 분석하는 역사학자로서의 삶도 중요하지만, 역사에 참여하여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가로서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현재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이자 해고자생계비지원을 위한 만원의연대 운영위원장 및 5.18기념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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