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법정 최후 진술에는 사람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떤 사건이 나와는 상관없는 뉴스라거나 케케묵은 역사책 속에나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들의 최후 진술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위치가 어디쯤인지도 가늠해보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를 철거반원들이 부쉈다. 일용직 철거반원들로서는 상부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불까지 질러야 했다. 이에 분노해 대항하던 동네 청년이 휘두른 쇠망치에 철거반원 네 명이 숨지고 한 명이 크게 다쳤다. 가해자도, 피해자들도, 모두, 사회적 약자였다. 1977년 4월 광주 무등산 덕산골에서 일어난 박흥숙 사건.
이 사건은 가난한 국민에 냉혹한 나라가 잉태한 비극이었다. 이 진실을 감춰야만 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청년은 '살인마'가 되어야 했다. 그가 살던 동네는 해괴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무당촌이 됐고, 체력 단련을 위해 그가 했던 운동은 언제든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기술로 둔갑했다. 그리고 그를 '무등산 타잔'이라고 불렀다. 잔인한 살인마로 왜곡하기에 더 없는 별명이었다.
우울증 주부 인생 바꾼 사형수의 편지
사람들은 놀라움과 함께 분노를 표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끔찍스러운 사건이 아직 기억에 생생해서 더욱 그랬을지 모른다. 식칼, 낫, 절구공이 등으로 17명의 목숨을 빼앗는데 걸린 시간은 단 55일. 그 범인 얼굴과 마주했던 것이 불과 1년 6개월 전이었다. 1975년 10월 8일, 대한민국 최초의 연쇄 살인범 김대두가 검거됐다.
김대두 사건은 여러모로 충격 그 자체였다. 노인이나 부녀자 등 주로 항거 능력이 없는 이들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을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수법으로 살해하면서 뚜렷한 동기나 이유가 없었다는 점 또한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가 9차례의 범행을 통해 뺏은 것은 쌀 1말, 고추 30근, 시계 1개, 청바지 1벌 그리고 현금 2만6750원이 전부였다. 반성하거나 뉘우치는 기색도 없었다. 그는 현장 검증에서 껌을 씹었고 히죽히죽 웃기까지 했다.
지난 해 10월 8일 JTBC <뉴스룸>은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조명하는 '오늘'이란 코너에서 김대두 사건을 소개하면서 "가난한 집안, 사회적 냉대를 핑계 댔지만 가난한 이웃, 사회적 약자만 노렸다"며 "비뚤어진 욕망의 질주"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비뚤어진 질주', 그 다음 이야기는 앞서와 사뭇 다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고, 마지막에 사죄를 했다고 한다. 사형 당하기 전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했으며, 자신의 영치금을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재소자들에게 나눠주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대두에게는 사형당하기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죽음의 날짜를 받아들고 나면 보통 이런 심경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일까. 허나, 세상에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 김대두 경우에도 그러했다. 평범해 보이는 한 주부가 그의 인생에 뛰어들었다. 교도소로 날아온 한 통의 편지가 그 시작이었다. 편지에 쓰인 이름은 김혜원.
[김혜원 선생 첫 번째 인터뷰] "반기문이란 사람, 어떻게 그런 아부성 발언을..."더 충격적이었던 기사 한 줄
김혜원 선생(81세·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초대 실행위원). 당시 마흔 살이었던 그는 지독한 마음의 병과 싸우고 있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고민하던 젊은 여성, 김혜원이 원래 택한 길은 "사랑을 베푸는 선생님"이었다. 사범대를 졸업하고 수도여고 선생님이 됐다. 결혼도 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아들, 아들 하는 분위기, 그 아들을 낳아야 했다. 하지만 앞서 세 딸을 낳으면서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병행하기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실감한 상황,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그렇게 집에 들어앉았다. 그렇게 차츰 '김혜원'이란 이름이 지워지던 어느 날, 덜컥 우울증이 찾아왔다. "밥맛도 없고, 남편 출근하면 드러눕고, 누워서 하나님 나 데려가라면서 베개를 적시고", "도무지 살고 싶은 의욕이 안 생기더라"고 했다. 병원을 가봐도 뾰족한 처방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1년여를 방황하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우연히 첫 번째 '처방전'을 얻게 된다. 진료실이 아닌 환자 대기실에서였다.
"그런데 정말, 정신적인 치료약을 만났어요. 약 타려고 기다리다 책꽂이에서. 투병기가 있더라고. 김정준 목사님의(구약학의 큰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페결핵으로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만의 신학을 완성했다고 평가받는 인물. 1981년 작고). 사람들이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정작 회복하면 어떻게 살겠다는 서약이 없다는 거야. 이 글이 내 가슴을 찌른 거죠. 그랬구나, 나도 그랬구나."어떻게 살겠다는 서약, 그 답을 다시 구할 차례였다. 성경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두 번째 '처방전'을 '청년' 하용조 목사(온누리교회, 2011년 작고)에게 얻게 된다. "아무런 희망 없는 사람에게 희망 한 줄기가 될 수 있는 삶", 이 말을 가슴에 담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나 자신에게 희망의 여지가 있음에도 싹 하나 틔우지 못하고 절망 속에 살고 있다"는 자성이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아무런 희망이 '극단적으로' 없어 보이는 한 사람이 그의 눈에 띄게 된다. 김혜원 선생은 그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75년 10월 9일 아침, 조간신문에는 이렇게 나와 있었다. 연쇄 살인범 김대두가 잡혔다. 그리고 선생에게는 유독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기사 한 줄이 있었다.
대학 동창들과의 '파티', 그 날 김대두의 답장이...
"범인은 폭력 전과 2범의 김대두(26)로 고향인 전남 영암군 ○○면 ○○리 167에서 가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자로 밝혀졌다."남편(박일재 변호사, 영암군 초대 민선 군수)과 고향이 같았다. 선생은 '나 시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하느냐'고 남편에게 물었다고 한다. 출근하면서 남편이 무심하게 던진 답은 '당신이 회개시키면 되지 않느냐'. 앞서 소개했던 하영조 목사의 말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김대두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한 달 동안, 밤마다, 영혼이라도 구원받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기도를 거듭하면 할수록 마음에서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네가 하면 되잖아'.
"어떻게 해. 내가 찾아갈 수도 없고. 그래서 편지를 썼죠. 모르는 사람에게 편지가 왔으니 당신 아마 놀랄 거다. 내 남편이 당신과 동향이다. 그래서 더 연민을 느껴 이렇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친구가 되고 싶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 이렇게 썼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답장이 온 거예요. 열흘만에."하지만 바로 읽어 볼 수 없었다. 마침 대학 동창들끼리 모여 집에서 '파티'를 하는 날이었다. 고기를 사고 노량진 시장에 가서 회도 떠오고, 손님 맞을 준비에 바쁜 하루. 앞치마에 찔러놓았던 김대두의 편지를 꺼내 읽은 것은 손님들을 다 떠나 보낸 후, 선생의 표현으로는 "주지육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차고 넘치게 진탕 먹은 다음"이었다. 편지를 읽으면서 콧잔등이 뜨거워졌다고 한다.
"기생충 같은 인생...파리 목숨보다 못한 죄인""사모님. 세상 사람들이 멸시와 저주를 하는 저를 생각하시다니... 저는 사치와 허영심에 사로잡혀 허랑방탕한 생활을 본업으로 삼고 범죄의 소굴에서 벗어나지 못해 마침내 기생충 같은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사모님. 박 선생님은 제 고향인 ○○ 초등학교 출신으로 그렇게 훌륭하신데 이 못난 죄인은 이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사모님. 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 100분의 1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보다 더한 고통이라도 달게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고독할 때 자기를 발견한다'고 그러데요.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이 아닐까요... 이 죄인으로 인하여 무참히 피해를 입은 영령들에게 이 세상에서 못다 한 명복을 저승에서라도 빌어주겠습니다...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고 살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용서만 받을 수 있다면 남은 생애를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고 살겠습니다.사모님. 그 고향의 선배님은 그렇게 훌륭하신데 나는 세상에서 돈이면 다 인 줄 알고 살다가 이 꼴이 되어 여러분들의 걱정만 끼쳐 드리게 되었습니다." (김대두가 보낸 첫 편지)사형 직전 남긴 최후 진술 2가지
편지에 김대두가 자신을 가리켜 항상 쓴 표현이 있다고 한다. '벌레만도 못한 김대두'. 그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그런 일을 저질렀고, 또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이 어떻게 내 편지를 읽고 펑펑 울었을지" 궁금했다. 물론 두려움도 컸다. "그런 사람들은 타고난다는데...만나러 가는 길에 부들부들 떨렸다"고 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포는 사라졌다고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인생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76년 12월 28일. 서울구치소에서 급히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선생은 차마 그 곳에 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대신 다른 교화위원으로부터 그의 마지막 이야기는 전해들을 수 있었다. 김대두는 숨이 끊길 때까지 찬송가를 불렀다고 한다. 선생에게는 "자매님에게 감사하다고 꼭 전해달라"는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국가에 남긴 부탁, 사형 직전 '최후 진술'은 두 가지였다.
"죄수들에게도 다 꿈이 있다, 잘 살려고 하는 꿈을 갖고 출소한다. 그런데 이 사회가 너무 냉정하다.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아 또 그렇게 된다. 이 사회가 출소자를 따뜻하게 대해줘서 나 같은 젊은이가 다시는 없게 해달라. 또 한 가지 부탁이 있다. 초범자와 누범자를 분리해서 수용해달라. 초범자들이 잘 모르던 것을 누범자들에게 배워서 다시 또 더 나쁜 짓을 하게 되니까."- 범죄를 계속 낳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말하고 떠난 거네요."그렇죠. 아무리 본인이 개과천선하려고 해도 사회가 그걸 수용해주지 않으면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다고 한 거니까요. 이런 말을 했다는 건,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말해요. 거듭난 거죠.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거죠. 그랬는데 그 사람을 죽인다는 것, 참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김대두는 '오늘'도 묻고 있다
지난 17일, 여중생을 집단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된 중학생 10명을 교도소에서 성인 수용자와 같은 방에 수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형이 확정된 기결수와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를 분리 수용해야 한다는 원칙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김대두가 사형 당한 지 40여 년 가까이 되는 지금까지도 국가는 그 부탁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고 있다. 1975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한 뉴스들이 일상이 되고 있는데도. 그로 인한 두려움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지만, 김대두가 마지막으로 남긴 부탁은 결국 국가와 시민을 위한 것이었다. 정말, 시민의 안전을 '금쪽같이' 여기는 국가라면, 어떤 답을 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연쇄 살인범 김대두, 그는 '오늘'도 묻고 있다.
대한민국은 국가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하루가 소중했던' 사형수들 "그들의 기록과 자료를 기증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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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선생은 김대두의 사형 이후 허망했다고 한다. "너무 마음이 아프고 허망해서 다시는 이런 일을 안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교도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도소의 거듭된 요청에 선생은 본격적으로 교도소 교화위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후 선생은 교화 활동을 하면서 20명 가까이 사형수들을 돌봤다. 그 중에는 금당 골동품상 살인 사건을 저지른 박철웅, 제자를 유괴해서 살해한 주영형 등 사회적으로 공분을 일으킨 살인범들도 포함돼 있었다. 또한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휘말려 사형수가 됐던 김성만씨와 같은 정치범이나 사형 당하는 순간까지 자신은 진범이 아니라고 외쳤던 오휘웅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한때는 선생 자신이 "살이 통통하게 찌면 아이들을 잡아먹으려 하는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마녀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이 사나운 사람들을 순화시키고 잘 다독거리면 무엇하나", "결국 죽일 건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고 한다. 그의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사형제도에 대한 문제 의식으로 발전한다.
이런 문제 의식은 피해자 가족을 만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고 한다. 자신의 남편을 죽인 사형수의 구명운동 탄원서에 눈물을 흘리면서 서명하는 피해자 가족의 모습을 보며 "사형제도로 피해자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줄 수 없다"는 확신을 얻게 됐다고 한다. 또한 범죄 피해자 가족들에게 무관심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며 국가의 책임을 강조했다.
김대두 사형 이후 출소자들을 위해 '꿀벌의 집'을 운영하기도 했던 선생은 "교화 활동도 그렇지만 출소자 문제는 어떤 개인이나 독지가의 힘만으로 할 수 없다"면서 "마음 뜨거운 자원봉사 차원에서만 이뤄질 일이 아니다. 출소 전 또는 출소 후 교화 활동에 대해 보다 전문적이고 국가적인 지원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도소 교화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이르게 된 결론이다.
그리고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함께 했던 자료들이 세상에 의미 있게 쓰였으면 하는 것이 선생의 바람이다. 사형수들과 나눴던 편지와 성탄 카드들, 사형수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교도소에서 만들어 선생에게 보낸 선물 등. 선생 개인에게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기록들임에 분명하다. '하루가 소중했던 사람들'의 기록과 자료들, 현재 김혜원 선생은 이들을 기증할 곳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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