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샘 근무의 피곤도 나를 막지 못했다. 2월 22일, 밤샘 근무를 마치자 차를 몰아 경남 산청에서 진주 이반성면으로 단숨에 내달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차마 가보지 않았던 곳이다. 그래서 더 보고 싶었다. 전쟁 없는 세상을 염원한 신라인들의 바람이 담겼던 용암사 터로 부리나케 다녀왔다.
이반성면 소재지로 가는 작은 다리를 건너 이반성 우체국 못 미쳐서 바로 우회전하다 들어가면 큼지막한 선간판이 내가 목적지에 다 왔음을 알려준다. 용암사지 승탑 700m를 알려주는 이정표를 따라 시멘트 포장길을 넓히는 공사하는 마을로 들어갔다.
여기는 절골이다. 좁다란 길을 지나자 정자나무가 나오는 마을 삼거리에서 잠시 차를 세웠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일러주는 이정표가 없었다. 근처 집으로 들어갔다. 용암사지 승탑을 가는 길을 여쭈자 할머니는 "미륵불요~ 저기 저쪽으로 쭉 들어가면 나와요" 한다.
정자나무 앞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차 하나 겨우 지나갈 좁다란 길을 따라 야트막한 구불구불 영불산 속으로 300m 정도 갔다. 해주 정씨 문중의 재실이 나왔다. 정씨 집안의 사유지다. 재실의 정문인 비연문(斐然門)은 열려 있다. 재실은 절골로 들어오기 전에 들어선 충의사 옆으로 옮겨간 터라 을씨년스럽다.
비연문으로 들어가자 재실인 장덕재(章德齋)가 나온다. 장덕재 왼편으로 농포집장필각이 있는데 이 또한 재실과 함께 충의사로 옮겨가 있다. 장덕재 오른편에는 비를 떠받치는 거북이(귀부)와 비의 머리 장식인 이수가 덩그러니 있다. 비석을 받칠 거북이는 자신의 육중한 사명을 잊은 채 작은 돌멩이 하나에 기울어지는 자세를 바로잡고 있다.
비석의 몸통은 어디 가고 없고 비석을 받치는 거북이와 머리 장식만 남은 뒤로 용암사 승탑과 석불이 있다. 스님들의 끊이지 않는 염불 소리가 울렸던 곳은 지나가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대신한다. 천천히 승탑을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은행잎이 푹신하게 받쳐준다. 승탑 앞에는 보물 제372호를 알리는 작은 비석이 서 있다. 비석의 존재와 안내표지판이 아니라면 이 탑은 그저 돌덩이에 불과했다.
안내표지판은 '용암사 터 서북쪽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2년에 원래의 위치로 옮겨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몸돌, 중간 받침돌, 바닥 돌은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의 중간 받침돌에는 용과 구름무늬가 있었으나, 새것에는 간략하게 8각 모서리에 기둥만이 새겨졌다'고 소개하고 있다.
어느 스님의 사리를 모신 보두인지 알 수 없다. 승탑 아래 받침돌의 8면은 꽃잎 모양으로 움푹하게 파고, 구름무늬를 바탕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천부상(天部像)이 도드라지게 조각되어 있다. 이렇게 정성 들여 새긴 승탑이 왜 이렇게 제자리를 찾지 못하다 이제 이렇게 드러났을까 한참을 쭈그려 앉아 구경했다.
승탑 옆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마치 우산처럼 승탑을 보듬고 있다. 승탑 대각선으로 석불이 있다. 석불이 모셔진 전각의 문을 열자 머리에 두건을 쓰고 옅은 미소를 띤 듯한 얼굴의 보살이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맞잡고 가부좌로 앉아 있다.
안내표지판에는 '머리 부분은 지장보살을 손 모양은 비로자나불의 모습을 한 특이한 형태의 불상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지장보살과 진리 그 자체인 비로자나불을 한 몸에 담은 까닭이 궁금했다.
석불을 모신 전각 뒤 편 돌담 위로 올랐다. 통일신라 말 무렵 풍수지리에 능했던 도선국사가 지리산 성모천왕으로부터 세 개의 암사(巖寺)를 세우면 삼한이 통일되어 전쟁이 그치게 된다는 계시를 받고 선암사(仙巖寺), 운암사(雲巖寺)와 함께 여기에 절을 세웠다고 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에 기록돼 있다. 도선국사가 창건한 이후 고려시대까지 융성했던 큰 절이 언제부터 역사의 뒤안길을 걸었는지 이후 기록은 없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북관대첩의 영웅 농포 정문부(1565~1624)의 후손들이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해주 정씨 문중의 사유지로 바뀌었다. 현재는 재실도 충의사로 옮겨간 뒤라 절터는 더욱 스산하다.
돌담을 내려와 석불 전각 뒤를 천천히 걸었다. 금빛 불상이 벼랑 아래에 있다. 옆에도 작은 불상들이 놓여 있다. 이곳을 찾은 불교 신자들이 놓은 듯하다. 작은 불상을 뒤로 하고 왔던 길을 돌아 나왔다.
비연문을 나서자 오른편 바위 사이로 굳건하게 뿌리 내린 나무가 보였다. 바위를 움켜쥔 모양새로 자리잡기까지 나무 뿌리의 살겠다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조용히 바위 쪽으로 귀를 쫑긋 세운다. 나무는 그저 바람이 머물고 세월이 스쳐 지나간 이야기를 건넨다.
왔던 길을 돌아 충의사로 걸음을 옮겼다. 용암사 터에서 충의사는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충의사는 농포 정문부를 모신 사당으로 정문부의 시호가 충의(忠義)다. 1995년 남강댐 숭상 공사로 진주시 귀곡동에서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정문부는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북평사(北評事)로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함경도를 침략한 왜군을 물리치고 지방 반군을 소탕하고 북방 호족을 몰아내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북관대첩을 이루었다. 전쟁 후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후에 무죄로 해명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장군의 삶만큼이나 북관대첩비도 기구한 운명을 맞기도 했다. 러일전쟁 때 일본에 의해 강제로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었다. 이후 의병 후손들의 반환운동으로 2005년 돌아왔다가 원래 있던 북한에 전달되어 복원되었다. 현재 충의사와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복제품이 있다.
충의사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수령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에 줄이 쳐져 있다. 줄 아래에는 누구의 바람이 촛불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나도 슬그머니 두 손을 모았다. 용암사 터로 가는 길은 잊힌 길이 아니다. 용암사는 언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삼한 통일을 통한 전쟁 없는 세상을 염원한 사람들의 염원이 묻어 있다.
덧붙이는 글 | 경상남도 인터넷뉴스 <경남이야기>
진주지역 인터넷언론 <단디뉴스>
개인블로그 <해찬솔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