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기사들이 고개를 들고 연단을 쳐다봤다.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0시간 18분 만에 테러방지법 반대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를 마무리하면서 울먹거릴 때였다. 이들은 24일 오후 7시 현재, 만 하루 동안 꼬박 이어진 필리버스터의 또 다른 '주인공'들이다.
국회 의정기록과 관계자는 이날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현재 5~10분마다 교대하고 있다"라면서 "속기사 전체가 투입되는 중"이라고 밝혔다.
현재 국회의 속기사 전체 인원은 65명. 이들이 번갈아가면서 무제한 토론 발언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이 역시 역대 필리버스터 관련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기도 하다. 앞서 박한상 신민당 의원이 지난 1969년 8월 29일 당시 3선 개헌 저지를 위해 10시간 15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벌였던 당시 기록을 참조하면, 박 의원의 발언을 기록하기 위해 60여 명의 속기사가 교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관계자는 "1명 혹은 2명씩 투입되고 있다"라면서 "5분 동안 속기한 걸 정리하는 데 1시간 정도 소요돼 결국 쉬지도 못하고 계속 들어가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또 "정회도 없이 진행되는 상황이 상당히 부담이고 속기사들도 많이 긴장하고 있다"라면서도 "우리만 아니라 국회 의사과 관계자들이 모두 고생하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대로 다른 의사과 직원들도 '비상 근무 중'이다. 이 때문에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에 배치된 직원들 일부는 기자들과 방청객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직원은 본회의장을 휴대전화로 촬영하려는 60대 남성을 황급히 손으로 막으면서 "일어서서 나오시라"라고 안내했다. 또 다른 직원은 필리버스터 취재를 위해 노트북을 소지하고 온 기자들에게 "충전 케이블은 구석 자리에 꽂으시라"라고 안내하기도 했다.
무제한 토론에 나선 의원들은 각자 묵직한 '준비물'을 준비해 왔다. 역대 최장 토론시간을 기록한 은수미 의원의 발 아래에는 서류뭉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매번 토론 때마다 허리를 굽혀 서류더미를 들고 내렸다.
네 번째 필리버스터 주자로 나선 박원석 정의당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연단 위에 <간첩의 탄생>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국정원 과거 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통한 발전위원회 보고서> <조작된 공포> <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 31> 등 책 다섯 권과 관련 문서들을 가져왔다.
두 사람 모두 운동화를 신었다. 첫 필리버스터 주자였던 김광진 더민주 의원이 '가장 힘든 점'으로 "발바닥이 아팠다"라고 한 것을 참조한 결정이다. 은 의원은 검정색 운동화를 신었고, 박 의원은 파란색 운동화를 신었다.
새누리 "경쟁력 떨어지는 이들이 지푸라기 잡으려는 것"
새누리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에서 "테러방지법과 관계된 얘기만 하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무대는 본회의장 밖이다. 주로 대변인 브리핑 등을 통해 야당을 압박하고 있다.
특히 이번 필리버스터를 '야당의 총선용 술책'으로 규정하고 있다. 앞서 김용남 새누리당 의원이 은 의원을 향해 "그런다고 공천 못 받는다"라고 막말을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이날 오후 원내대표단-정보위원 연석회의를 주재하면서 "기어코 더민주는 민생보다는 선거, 국민보다는 선거, 국가보다는 선거를 택한 것"이라며 "오로지 선거만 앞세우는 필리버스터를 통해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기막힌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선거구 획정 합의 당시) 시간이 없다고 해놓고 자기들 선거운동을 하면서 국민 안전은 내팽겨치고 국회를 유린하는 상황"이라며 "반드시 이 책임을 더민주가 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는 "광우병 때가 자꾸 생각난다"라면서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난 것처럼 선전·선동하는 모습들이 자꾸 보여서 왠지 씁쓸하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그는 "우리 당에서는 저건(필리버스터는) 경쟁력 떨어지는 여러 사람들이 그나마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아서 컷오프에서 살아남고 지지율 떨어진 것 만회하려고 하는, 정치적 악용을 하는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했다. 즉, 필리버스터에 나선 야당 의원들이 공천을 받기 위해 나선 것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그는 또 "책임감 전혀 없는 바깥의 좌파 교수 얘기하는 식으로 테러방지법 없어도 테러 막을 수 있다고 하는데 앞뒤 안 맞는 얘기"라며 "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이 올라오니 잘해서 오른지 아는가 보다, 국민들은 테러방지법 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알고 있다"라고도 말했다.
김용남 의원은 "(국회가) 기네스기록 도전장 같다"라고 비꼬았다. 김 의원 역시 "인지도가 약한 야당 의원들이 의도를 갖고 필리버스터를 악용하고 있다"라면서 "개인적 목적을 위해 의사진행방해를 하고 있는 실태가 개탄스럽다, 국회가 '숨 오래 참기 놀이장'이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새누리당 일부 의원들은 지역구로 내려가 선거운동 중이다. 당장, 국회 정보위원장인 주호영 의원이 이 연석회의에 불참했다. 원 원내대표는 연석회의를 시작하면서 "주 위원장에게 전화하니 동대구역에 계시다고, 오늘 하루 종일 계시겠다고 양해를 구하시더라"라고 다른 의원들에게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