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오후 2000억 원 규모의 삼성물산 주식을 사들였다. 또 삼성엔지니어링의 주식 302억 원어치도 매입했다. 삼성물산은 지난해 9월 제일모직과 합병으로 그룹 지주회사 성격을 갖는 계열사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씨 오너 일가 가운데 가장 많은 지분을 갖고 있다.
이로써 이 부회장은 삼성물산 지분율을 16.5%에서 17.2%로 올리게 됐다. 이건희 회장(2.9%),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장(각각 5.5%)의 지분은 변동이 없다.
삼성그룹은 이날 주식시장이 끝난 후, 이 부회장의 주식 매입 사실을 발표했다. 이와함께 삼성 에스디아이(SDI)와 삼성 엔지니어링도 각각 특수관계인(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주식처분 사실을 공시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공정위 요구에 따라 계열사 간의 순환출자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이번 계열사들의 주식 매각이 이뤄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순환출자 해소과정에서) 계열사 주식이 대량으로 시장에 쏟아져 나올 경우 소액주주들이 (주가하락 등의) 피해를 볼수 있다"면서 "대주주로서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지분 일부를 직접 사들이기로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삼성엔지니어링 살리려 마련한 3천억... 물산 지분 취득에 2천억 써이재용 부회장은 무슨 돈으로 이번 주식을 샀을까. 이 부회장은 지난달 28일 자신이 갖고 있던 삼성 에스디에스(SDS) 주식(2.05%)을 매각해 3000억 원을 마련했다. 삼성 쪽에선 이 부회장이 당시 자본잠식 등 경영난을 겪고 있는 삼성엔지니어링 지분을 인수하는 데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계열사에 대한 '책임경영' 차원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삼성엔지니어링은 경영정상화를 위해 주식을 추가로 발행하기로 했고, 이 부회장이 기존 주주들이 주식매입을 하지 않을 경우 일반 공모에 참여해 주식을 사들이겠다는 것.
이 부회장의 이같은 의지가 알려지자, 기존 주주들이 엔지니어링의 새 주식 청약률이 99.8%에 달했다. 결국 이 부회장은 삼성엔지니어링의 주식을 사지 못했다. 삼성 주변에선 향후 엔지니어링이 갖고 있는 주식(자사주)을 인수하는 방법 등이 거론됐다.
결국 이 부회장은 이날 삼성엔지니어링이 갖고 있던 자사주 302만 4038주(302억 원 규모)를 사들이기로 했다. 삼성 관계자는 "삼성물산 지분 매입에 2000억 원을 사용하고 나머지 1000억 원은 엔지니어링에 쓰게 될 것"이라며 "이번 자사주 매입에 300억 원이 들어갔고, 나머지 700억 원 규모의 주식은 다른 방법으로 취득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삼성엔지니어링의 일부 소액주주들의 불만도 터져 나왔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주주는 "삼성물산이 사실상 그룹 지주회사 아닌가"라며 "만약 삼성SDI가 내놓은 물산 지분을 다른 사람들이 사들이게 되면 오너일가의 지배력이 그만큼 약해지게 된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책임경영 차원에서 엔지니어링 지분을 사기로 한 돈으로 자신의 지배권 강화를 위해 사용했다는 것.
이날 삼성 SDI가 내놓은 삼성물산 지분은 모두 500만 주. 이 가운데 이 부회장이 사들인 주식 수는 130만 5000주로 약 2000억 원 규모다. 나머지는 주식 시장이 끝난 후, 시간외 대량매매(블록딜) 방식으로 국내외 기관 투자자를 상대로 매각된다.
'공정위의 순환출자 해소 요구-지배권 강화' 두마리 토끼 잡기?
이미 삼성생명공익재단도 대량매매에 참여해 3000억 원 규모의 지분을 매입하기로 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공익재단 이사장도 맡고 있다. 이에 따라 이재용 부회장은 이번 삼성SDI의 주식 매각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5000억 원 규모로 삼성물산 주식을 사들이게 됐다.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의 물산 지분 취득은 SDI의 순환출자 해소과정에서 소액주주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진행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9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으로 그룹 계열사간 새로운 순환출자구조가 생긴 것을 확인하고, 삼성 쪽에 시정을 요구했었다.
지난 2013년 공정거래법이 바뀌면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속하는 주요 재벌들은 새롭게 순환출자를 할 수 없도록 돼 있다. 당시 공정위는 삼성 쪽에 6개월 안에 신규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라고 결정했다. 이 떄문에 삼성SDI는 자신들이 갖고있던 삼성물산 지분 4.7% 가운데 2.6%(500만 주)를 오는 3월 1일까지 매각해야 했다.
그동안 삼성 쪽은 정부의 판단을 존중해 순환출자 해소에 나서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삼성물산 주식 규모가 500만 주, 약 7600억 원에 달하는 점 때문에 내심 고민해왔다. 게다가 삼성물산은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으면서, 사실상 지주회사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지분을 사들여야 했다.
결국 이재용 부회장이 SDS주식을 매각해 마련했던 종잣돈 가운데 2000억 원, 삼성생명공익재단이 3000억 원을 투입하게 된 것. 정부의 순환출자 해소 요구도 충족하면서, 이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대해 삼성 관계자는 "이 부회장과 재단 등에서 물산 주식을 취득하지만, 그래도 SDI가 갖고 있던 2000억 원 규모의 주식이 국내외 기관투자자에게 넘어가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럴 경우 삼성물산의 오너와 계열사 등 특수관계인들의 지분율은 낮아지게 된다"면서 "그룹 지배권을 강화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고 덧붙였다.
실제 이번 매각이 마무리되면 삼성물산의 지분구조에서 이씨 오너일가와 계열사 등의 지분 합계는 당초 39.9%에서 39%로 0.9%포인트 낮아진다. 하지만 이 부회장 개인의 물산 지분율은 오히려 0.7%포인트(16.5%->17.2%) 올라가면서 최대주주를 유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