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동반한 여행에서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교통수단의 종류가 다양하고 많으면 정말 괴롭다. 특히 이렇게 뜨거운 날씨에 간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그렇다. 먼저 캠핑장을 나서서 버스를 타고 선착장에 도착한 후 베네치아 가는 배를 탄다. 그 배는 정확히 베네치아 관광지의 중심에 우릴 내려놓을 테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이었다. 그렇기에 배를 한 번 갈아타고 다시 가야했다. 사실 이동시간은 모두 합해서 한 시간도 걸리지 않을 테지만 이렇게 뜨거운 날씨엔 너무 힘들다.
캠핑장 리셉션에서 교통 카드를 구입할 수 있다고 해서 상담을 하니 의외로 쭈는 공짜란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 곳도 예외 없이 만 3세에게도 캠핑숙박비를 꼬박꼬박 받은 이탈리아를 야박하게 생각했더니 의외로 교통비를 받지 않는다니 조금 너그러워졌다. 현이는 버스비만 반값이고 배삯은 공짜란다. 결코 싸지 않은 비용이지만 그래도 생각보단 양호하다. 엄청 서두르려고 서둘렀지만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캠핑장에서 나왔다. 산마르코 선착장에 가는 큰 배엔 많은 캠핑장에서 서둘러 쏟아져 나온 캠퍼들이 있었다.
'물', '배'란 낱말을 빼놓곤 설명이 안 되는 베네치아를 가기 위해 물 위로 배를 타고 가는 느낌이 좋았다. 선착장엔 내가 타고 온 가장 큰 여객선에서부터 곤돌라 같은 영업용 배, 개인 보트까지 크고 작은 다양한 배들이 다양한 물길을 내며 지나다니고 있었다. 한 무리의 일본 단체 관광객이 5인씩 나누어 곤돌라를 타고 지나갔다.
노를 젓는 남자들은 빠삐용이 생각나는 반팔 상의를 입고 검은색 긴 바지를 입었다. 깔끔해 보이긴 하지만 너무 더워보였다. 차라리 흰색 반바지를 입으면 더 멋스럽고 시원해 보일 것 같았으나 그럼에도 그들의 유니폼은 왠지 그들을 전문성을 가진 직업인으로 느껴지게 했다. 유니폼을 입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유니-폼(획일적인) 하면 안 된다는 책의 한 구절이 느닷없이 생각난다.
페기구겐하임 미술관은 '아카데미아' 선착장 쪽에 있기에 그쪽으로 가는 배를 찾으러 간다. 직원에게 물으니 다리를 건너가란다. 다리를 하나 건너고 또 물어보니 다리를 또 건너란다. 그래서 알았다. 베네치아는 '물', '배' 뿐만 아니라 '다리'를 빼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다리를 지나려니 다리 저쪽으로 펼쳐지는 운하 좌우의 건물들이 멋스럽긴 하다. 높아진 수면의 찰랑거리는 모습이 시원해 보인다 생각할 즈음 저 뒤쪽으로 어떤 탑이 기운 모습이 보인다. 으아~ 기울어가는 탑은 피사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시원해 보이려던 찰랑거리는 물결은 이젠 탑이, 건물이, 도시 전체가 위태해 보인다는 인상을 주었다.
골목마다 쏟아져 나오는, 산마르코 광장 쪽을 향해 이어지는 관광객의 행렬은 끝이 없었고 얼굴에만 유독 땀이 나는 나를 포함해 모든 이의 얼굴은 땀으로 번질거렸다. 아무래도 관광객의 땀이 베네치아의 수면을 높이나 싶을 정도로 이곳은 여행자의 몸에서 나는 물도, 건물의 문 앞까지 차오르는 바닷물도 풍부했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은 작았다. 작다는 말도, 그럼에도 다양한 유명인의 작품이 전시되어 내실 있다는 말도 이미 책에서 읽어 알고 있던 터였다. 미술관 매표소 앞에 도착했을 즈음 그곳은 마치 '마당'이란 말이 생각날 정도로 작고 아담해서 내 집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검표하는 아가씨는 발랄하게 아이들에게 인사해주었다. '페기'와 그녀의 애완견이 묻혔다는 정원이 우릴 맞았다. 애완견이 한 마리일 것이라 생각했던 우린 그녀의 이름 옆에 쫙 새겨져 내려간 개들의 이름을 확인하고서야 개와 인간의 평균 수명을 생각할 수 있었다. 햇볕이 가장 뜨거운 시간이었기에 우린 나무 아래 만들어진 정원 경계석에 엉덩이를 걸친 후 긴 휴식을 가졌다. 간단한 식사대용 과자와 복숭아를 먹고 물도 먹었다.
현과 쭈는 미술관에서 작품을 본 후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 보겠노라고 제안하였고 그것을 수락한 아빠는 종이와 사인펜 통을 챙겨 들어갔다. 문으로 부터 좌, 우로 여러 개의 방이 있다. 내가 알만한 화가론 피카소, 달리, 폴록, 미로 등의 그림이 있었고 그 외에 '피카소'풍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 '달리'스럽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 등이 있었다.
역시 이왕 창작이란 세계에 뛰어 들어왔다면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이루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 같은 게으르고 무식한 외국여성에게 기억될 수 없다. 그러나 독특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이루는 사람들의 생애 또한 평탄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딸이 화가가 되겠다고 하는 마당에 어느 부모가 딸이 평탄치 않은 삶을 기반으로 치열하게 작품 활동을 한 후, 훗날 화가로서 명성을 얻길 바라겠는가. 현이가 혹 화가가 된다면 유명해지지 않아도 되니 그냥 현실 세계, 삶과 균형을 이루며 행복하게 예술 활동 -그것이 모방에 가까운 것일지라도-을 했으면 좋겠다.
물론 나처럼 게으르고 무식한 사람들이 이름 석 자 기억해주지 않더라도 상관없을 거 같다. 다 차려진 밥상에 우리 딸이 직접 디자인하고 깎아 예쁘게 색칠한 숟가락 하나 올린다 해도 우리 딸이 행복하다면 내겐 우리 딸이 최고 멋진 화가로 여겨질 것이다. 현, 사랑하고 믿고 지지한다. 네 꿈이 무엇일지라도.
현이가 그럴 듯한 그림을 그리는 사이, 그 옆 송주가 그럴듯하지 않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사이 아빠와 엄마는 번갈아 가며 작품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아담한 미술관을 통해 '왜 미술관이 일정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가?'를 확연히 알게 되었다. 좋게 말하면 아담하지만 많이 협소한 곳에 다닥다닥 걸린 작품을 여유있게 보는 것은 힘들었다. 작가, 제목, 부연설명, 작품을 훑어봐야 그 세계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한 추상화 작품은 그냥 보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한 작품인 ' 더 컴포지션 오브 그레이'란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회색계열로만 표현한 추상화인데 전체적인 느낌은 밝았다. 회색은 우울함과 칙칙함을 연상시키는 색채임에도 그 계열만 모아놓으면 그 중에서도 누군 '밝음'이 되고 다른 누군간 '어둠'이 된다는 깨달음으로 인간 세계를 비춰보았다. 이 세상을 이루는 많은 것은 절대적인 것은 없다.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방안에 앉아서 홀로 사색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당연한 것들을 이렇듯 많은 돈을 처들여 낯선 땅, 사람들 사이에서 깨우쳐야 하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깨칠 수 있다면 난 행복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좀 멀었다. 날씨가 너무 더워 다리를 4개쯤 건너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햇빛을 피해야 했다. 노련한 가이드는 단체 여행자들을 시원한 좁은 골목으로 이동시켰으나 그럼에도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가이드를 따라 찬란한 햇빛 밑으로 무리를 지어 다녔다. 정말 많이 더워보였다. 내 곁에서 공무 중 잠시 땀을 식히러 그늘을 찾아든 경찰들을 두고 배를 타기 위해 햇볕으로 나왔다.
올 때는 들리지 않았던 리도란 동네에 들려 집으로 오느라 시간이 늘었다. 배에서 내릴 즈음 이쪽 캠핑장에 짐을 풀었을 한국인스런 남자 3인이 배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러 가는데 저쪽으로 한국말을 쓰는 여인 4인이 걷고 있다. 그들은 우릴 못봤다. 우린 그저 옆모습, 뒷모습만 봤지만 그럼에도 정말 많이 반가웠다. 도전 정신이 살아있기에 젊은이라 말할 수 있는 한국 젊은이들은 참 강인해서 아름답고 자랑스럽다.
"캠핑 중 때로 주눅 들어 짜증나고 당혹스럽더라도 미소를 잃지 마세요. 미소를. 웃는 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합니다. 미소는 허다한 당혹스러움을 넘어 설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맞벌이 엄마, 아빠, 5살, 7살 두 딸은 직장과 유치원을 쉬고 쉼(태국), 사랑(터키), 도전(유럽캠핑)을 주제로 5개월간 여행하였습니다. 본 여행 에세이는 그중 도전을 주제로 한 유럽캠핑에 관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