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은 테러방지법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아마 새누리당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직권상정만 하면 수월하게 통과되리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야당이 초유의 '의사진행방해(필리버스터)'에 나서면서 테러방지법은 곤란에 빠졌다.
필리버스터는 테러방지법에 숨겨진 독소조항을 공론의 장으로 끄집어 내는 데 성공했다고 본다. 독소조항의 핵심이라면 "국가정보원(국정원)이 대테러 활동에 필요한 경우 법원의 영장 없이 감청을 실시할 수 있다"는 2조, 그리고 "국정원장은 테러 위험인물이라고 판단될 때 출입국 기록, 금융거래 기록, 통신 이용 기록, 위치정보 기록 등을 수집할 수 있다"는 9조일 것이다.
테러방지법의 독소조항을 살펴보니 작가 필립 K. 딕이 1956년에 쓴 단편소설 <마이너리티 리포트>(원제 : Minority Report)가 떠오른다. SF영화 팬에게 그의 이름은 친숙하다. SF의 고전 <블레이드 러너>를 비롯해 <토털 리콜>, <페이첵> 등은 그의 원작 소설이 모태다. 지금 소개할 작품 <마이너리티 리포트> 역시 지난 2002년 스티븐 스필버그 연출로 영화화됐었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선구적이다. 필립 K. 딕은 이 작품에서 '프리크라임'이라는 범죄예방 시스템이 사회를 관리하는 미래상을 그린다. 이를 통해 범죄예방 시스템이 안정된 삶을 약속하기는커녕 인간을 억압·통제하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
인간을 통제하는 범죄예방 시스템 작품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범죄예방국 국장으로 재직중인 존 앨리슨 앤더튼이 자신만만한 신참 수사관 대니 워트워의 방문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 하나, 존 앤더튼은 뚱보에 대머리인 중늙은이다. 반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미남 배우 톰 크루즈가 존 앤더튼으로 등장한다.
30년 전, 존 앤더튼은 범죄예방 이론과 뛰어난 예지능력을 소유한 3명의 백치들과 컴퓨터를 이용해 '프리크라임'이라는 이름의 범죄예방 시스템을 고안해 낸다. 프리크라임 덕분에 범죄발생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다. 그러자 앤더튼은 즉각 범죄예방국을 설립하고 국장에 오르며 장기집권 가도에 돌입한다. 그러나 그마저 이 시스템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한다. 그는 예방국 수사관 워트워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린 법을 어기지 않은 사람들을 잡아넣는다네.... 다행히 아직 법을 어기지 않은 사람들이기도 하지. 그 자들이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쓰니까 말이야.... 우린 그들을 유죄로 보지만 그들은 끝까지 결백을 주장한다네. 사실, 어떻게 보면 무죄라고도 할 수 있지."앤더튼은 워트워와 함께 범죄예방국 분석실을 둘러보던 도중 분석기에서 나온 출력카드를 받아 들곤 당혹스러워한다. 그 카드엔 앤더튼이 곧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예언이 적혀 있었다. 다행히 분석기 바로 가까이 있었기에 일단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출력카드의 사본은 다음날 육군 총사령부에 전해지게 돼있다. 이는 범죄예방국의 권한이 비대해지는 상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다. 더구나 군부는 범죄예방국의 일거수 일투족을 면밀히 감시 중이다. 육군 총사령부는 곧 앤더튼이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사실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앤더튼은 즉각 자신이 거대한 음모에 휘말렸음을 직감한다. 처음엔 워트워, 아니면 범죄예방국 임원으로 재직중인 아내 리자를 의심한다. 워트워는 상원을 등에 업고 범죄예방국 국장 자리를 호시탐탐 넘보고, 리자는 분석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드에 찍힌 대상자는 레오폴드 캐프랜이라는 이름의 남성이다. 게다가 앤더튼은 그를 알지도 못한다. 앤더튼은 무슨 이유로 이름 한 번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을 살해할 것인지 의아해 한다.
범죄예방 시스템 무력화시키는 '미래의 다양성 이론'앤더튼은 문득 자신이 고안해 낸 시스템을 떠올린다. 이 시스템은 우선 3명의 백치들이 앞으로의 일을 '지껄여' 댄다. 백치들의 예언은 분석·검증을 거쳐 최종 보고서로 출력된다. 그런데 세 명의 예지자들이 미래를 똑같이 예언하는 일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셋 가운데 둘의 예언이 합쳐져서 '머저리티 리포트(majority report)', 즉 다수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미미하지만 시간과 장소가 변수로 작용해 둘과 다른 예언을 한 예지자의 보고서인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가 도출된다.
이렇게 따져 보면 세 명의 백치 가운데 둘이 앤더튼이 살인을 저지를 것임을 예언했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다고 예언한 셈이다. 만약 마이너리티 리포트만 손에 넣는다면 음모의 실체는 드러나게 된다. 이에 앤더튼은 범죄예방국으로 잡임해 들어간다.
예방국으로 들어간 앤더튼은 비로소 사태의 전모를 파악한다. 레오폴드 캐프랜과 그의 수하들이 벌인 짓이었다. 레오폴드 캐프랜은 서방동맹군 퇴역장교 연맹의 주축 인물이었다.
여기서 잠깐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미국을 주축으로 한 서방동맹은 중국과 3차 세계대전을 벌인다. 이 결과 세상은 폐허로 변해버린다. 전쟁이 끝나자 서방동맹은 무장을 해제하고 군부의 위세는 한 풀 꺾인다. 결국 군부는 위세를 되찾기 위해 범죄예방국과 그 수장인 앤더튼을 타겟으로 삼은 것이다.
군부의 책략은 성공했다. 다수의견의 자세한 내용은 이렇다.
"상원은 앤더튼이 캐프랜을 살해할 경우 군부와 경찰간 내전이 빚어질 것을 우려, 범죄예방국을 해산하고 군사법 부활을 포고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앤더튼은 캐프랜을 살해한다."정말로 앤더튼이 캐프랜을 살해하면 호시탐탐 재기를 노리는 군부는 즉각 범죄예방국에 전쟁을 선포할 것이 분명했다. 반대로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예언대로 앤더튼이 캐프랜을 죽이지 않아도 상황은 심각해진다.
즉, 30년간 3명의 예지자 중 2명의 예언이 일치한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시민들을 범법자로 몰았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이 경우라도 군부가 범죄예방국 해체를 주장할 것은 뻔하다. 캐프랜은 강력한 어조로 프리크라임의 오류를 지적한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범죄를 예방한다는 명목 하에 수용소에 감금당했습니다....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저지를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언된 정보가 입수되자마자 그것 자체가 변수로 작용해 미래가 또다시 달라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경찰은 이 비합리적인 방법을 고수해 왔습니다. 예언이 예언 자체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경찰이 당장 손을 쓰지 않아도 범죄는 전혀 일어날 리가 없는 것입니다."캐프랜의 주장엔 중요한 이론이 숨겨져 있다. 바로 '미래의 다양성 이론'인데 프리크라임으로 상징되는 감시사회가 무용함을 입증하기 위해 작가가 꺼내든 이론이다. 이 이론은 "미래의 길이 오직 하나만 있다면, 다른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미래를 예언하는 일부터가 무의미해진다"로 요약이 가능하다. 테러방지법으로 풀이하자면, "국정원장이 테러 용의자로 지목해도 용의자가 반드시 테러를 저지르리라 예측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
꼭 '미래의 다양성 이론'이라는 거창한 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현 정부가 밀어 붙이려는 '테러방지법'은 위험천만하다. 이 법이 통과되면 이제 테러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저지를' 위험 때문에 관계당국의 감시를 받아야 해서다. 또 실제 이 법이 아니어도 이미 공권력의 감시체계는 전방위적으로 작동 중이다. 이와 관련, 한 언론보도를 살펴보자.
"지난 2월16일 서울 강북경찰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총기 사진과 함께 '청와대로 공격하러 가자'는 글을 올린 충북 청주에 사는 한 대학생을 긴급 체포했다. 이 학생이 실제 총을 사거나 서울로 가는 움직임을 보인 바는 없었지만, 경찰은 글만 가지고 협박죄를 적용했다."
- 시사IN 442호 <2016 막걸리 보안법 개봉박두?> 기사 중 필립 K. 딕은 영민한 예지력으로 앞으로 닥쳐올 미래를 내다본 작가였다. 그러나 인간의 미래에 대한 결정론적 시각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래서 그는 작품의 결말을 모호하게 남겨 놓았다.
테러방지법은 어떤 식으로든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청와대와 여당이 워낙 강경해서다. 그러나 결말은 아직 모른다. 궁극적으로 행복한 결말을 만들어 가는 일은 결국 국민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