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든 여권이 나왔다. 여권에는 중국 비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국내 생산을 해서는 단가를 맞추기가 힘들고 거래처 중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대기업의 생산 라인이 중국 남경으로 이전하면서 우리 중국 공장도 남경에 설립되었다. 그리고 우리 팀 전원은 여권을 발급받았다.
우리 회사의 중국 공장에는 이사님 한 분을 비롯한 몇 명의 한국 직원들이 주재원으로 나가 있었다. 주재원으로 나가 있는 사람들의 직급은 한국에서 부르던 직급이 아닌 '총경리'와 '부총경리'처럼 중국식 직급으로 불려졌다. 그리고 진행 프로젝트에 따라 한국 직원들이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몇 개월씩 파견을 나가는 식으로 중국공장이 운영됐다.
우리 품질보증팀에서는 팀장님이 직접 중국 공장에 파견을 나갔다. 내가 입사할 당시에도 중국에 파견을 나가 있어 과장님이 팀장 대행으로 나를 채용했는데, 그 뒤 잠시 한국에서 근무를 하시다가 또 다시 남경으로 나가셨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 팀장이 부재 중인 채로 지내야 했다. 때문에 부서간 협조가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직급'에 밀려 손해를 보는 일도 많았다.
중국 공장이 생기면서 한국에 있는 우리에게도 엄청난 업무가 밀려들었다. 그 중에 특히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많았는데 바로 중국산 '로컬' 부품의 신뢰성 시험 업무가 바로 그것이었다. 중국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단가를 낮추고 부품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상황이지만 중국산 부품의 품질은 국산 부품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중국 공장에서 근무중인 부총경리가 중국 부품업체를 찾아 샘플을 만들어 한국으로 보내면 내가 그 부품들을 받아 우리 제품에 적용이 가능한지를 검증한다. 그리고 결과 리포트를 중국으로 보낸다. 내가 진행하는 시험에서 합격을 한 회사의 부품만 우리 제품에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렵게 업체를 찾아서 부품을 만들어 보냈는데 계속 불합격 처리가 되다보니 부총경리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자주 짜증을 냈다.
멀리 타국에서 생활하는 것만해도 힘들 텐데 어렵게 찾은 업체의 부품이 불합격하면 생산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그렇게 되면 그 일정을 맞추기 위해 훨씬 더 바쁘게 움직여야 했을테니 짜증이 나는 것이 이해는 간다. 하지만 감정에 치우쳐 업무를 대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 짜증도 다 받아가며 일 해야하는 나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적당히 좋은게 좋은 거라고 패스했다가 제품을 만든 뒤에 문제가 발생되면 결국 그 품질문제는 우리 팀에서 떠안아야 한다. 중국에서는 제품을 만들어 한국 공장으로 보내면 그 뒤에 생기는 품질 문제에 대해서는 결국 우리가 모두 처리를 해야 한다. 같은 회사끼리 귀책을 따져 비싼 물류비를 내면서 반품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 생산할 때부터 확실히 품질관리가 되어야 했다.
직장에서 함께 일을 하다보면 서로 감정 상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같은 곳에 근무를 하는 사람이라면 소주도 한잔 하고 이해와 화해의 시간을 가질수 있지만 한국과 중국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끼리는 그런 화해의 시간을 가질수가 없다. 그래서 평소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실제로 가끔 만나더라도 분위기가 험악해지곤 한다.
중국 공장이 생기고 로컬 부품 업체가 모두 선정될 때까지 나는 일과 신경전의 교묘한 경계선 사이에서 아슬 아슬 줄타기를 하듯 업무를 진행해야 했다. 중국에 근무하는 사람들보다 나이도 어리고 직급도 낮다 보니 최대한 그들의 신세 한탄을 다 받아주면서 업무는 또 업무대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한국과 중국 직원들간의 큰 감정 싸움으로 번질 수 있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동고동락 2주... '배타적' 이미지는 '친근함'으로 바뀌었다
중국 로컬 부품 업체 선정이 끝난 뒤 중국에서 교육생들이 한국으로 왔다. 그들은 우리 회사 중국 공장에 채용된 중국인 사원들로써 한국 공장의 생산 시스템을 배워 중국 공장에서 실제로 근무를 할 사람들이다. 나는 생전 처음보는 중국인들이 신기해서 첫 날 그들이 대기하던 회의실을 계속해서 기웃거리곤 했다.
우리 팀 과장님은 중국어를 잘하셨다. 따로 배운 건 아니고 출장으로 중국을 자주 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배워진 것이라고 했다. 우리 팀 전원이 여권을 발급 받으면서 가끔 과장님께 중국어를 배우곤 했었는데 실제로 그 중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족'들이 바로 눈앞에 있으니 몇마디 배우지도 않은 그 중국어를 실제로 써보고 싶었다.
교육생들이 모여있는 회의실안을 보니 20대의 중국인 남녀가 10여 명 있었다. 과장님은 그들을 인솔해 마트에 가서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을 구매하도록 했다. 한국에 있는 직원들 중에는 가장 자연스러운 중국어가 가능한 과장님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인 교육생들은 20대 초반의 청춘 남녀답게 아주 혈기왕성해 보였다. 2시간 정도 대기시켜 놓은 회의실 안에서 얼마나 크게 떠들어 댔는지 바깥에 있는 생산현장까지 시끄러웠다. 하지만 대화가 잘 안 통하다 보니 그 어린 교육생들을 통제하는 건 아주 어려웠다. 떠드는 소리가 점점 커질 때마다 회의실로 가서 문을 열고 '쉿' 하며 검지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면서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는게 그들과 나눌수 있는 의사소통의 전부였다.
일을 배우러 왔으면 좀 더 진지한 자세로 긴장하고 임해야 할 그들이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처럼 자기네들끼리 모여 웃고 떠들었다. 그 모습이 아주 '무개념'스럽게 보였다. 생각해보면 일을 하러 왔다고 하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 와서 모든것이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을 텐데 너무 일방적으로 '한국사람 입장'에서만 그들을 생각한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마냥 무개념으로 보이던 그 들도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한국 생활에 적응을 해 나갔다. 일과 시간에는 제조반에서 근무하는 주부사원들 옆에 1명씩 붙어 앉아 검사 노하우를 배웠다. 처음엔 낯설고 불편하기만 그들과 매일 얼굴을 보며 지내다보니 대화를 해야 할 일도 생겼고, 자연스럽게 과장님께 배운 중국어를 써먹어볼 수도 있었다. 내 입에서 나온 중국어를 알아듣는 그들을 보니 신기했고 점점 그들에게 호감이 생겨났다.
'반가워' '밥 먹었니?' '수고했어' 정도의 간단한 말밖에 건네지 못했지만 그들은 내가 중국어로 말을 걸어주는 것에 대해 아주 적극적으로 호응을 해줬다. 그리고 함께 온몸으로 대화를 나누며 한 마디 한 마디 중국어 실력을 키워갔다.
짧은 2주간의 동고동락을 끝내고 그 들이 중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어서는 어느새 그들과 가까워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엔 중국에서 다시 만나자며 나는 아쉬움 속에 그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