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포세대, 헬조선, 흙수저에 이르기까지... 청년세대의 절망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넘쳐납니다. 청년들이 참 할 말 많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어린 것이 뭘 아느냐', '사회문제에 신경 끄고 네 앞가림이나 해라'라는 '꼰대'의 말에 하고 싶은 말을 삼킬 때가 많습니다. '할많하않', 이 신조어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의 줄임말입니다. '할많하않'이 아닌, 할 말이 많으니 하겠다는 청년들을 만나봤습니다. [편집자말] |
20대 국회의원 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총선은 앞으로의 4년이 걸려있는 거대 이벤트다. 유권자는 선거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스포츠 경기를 중계하듯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보도 사이에서 중요한 정보를 잡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둘 중 하나다. 수많은 장애물을 헤쳐 나가며 끝까지 총선 레이스를 좇아가거나,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여기, 유권자들에게 총선에 대한 '진짜 정보'를 전하기 위해 나선 청년들이 있다. '갈릴레이 서클'이다. 갈릴레이 서클은 언론인 지망생이 주축이 돼 만든 모임이다. 이들은 '모비딕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내걸고 SNS와
공식 홈페이지, <오마이뉴스>를 통해 2016년 총선과 관련한 정보를 전달한다. 딱딱한 기사가 아닌 영상, 인포그래픽, 카드뉴스 등이 주를 이룬다.
모비딕 프로젝트는 두 명이 구상해, 여덟 명이 체계를 잡아갔다. 현재 열 두 명이 함께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그래도 아직 규모만 놓고 보면 망망대해에 떨어진 '통통배' 수준. 이들이 온갖 정보가 뒤섞이는 풍랑 속에서 총선이라는 거대한 고래, 모비 딕을 잡아낼 수 있을까. 지난 2월 29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갈릴레이 서클 팀(김수빈, 박종화, 송찬양, 이종희, 장은선, 정재우, 조유라)을 만났다.
언론인을 꿈꾸는 청년들, '구석 정치'를 조명하다 "소설 <모비 딕>에선 거대 고래에게 다리를 잃은 사람이 나와요.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바쳐가면서 고래를 좇습니다. 이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것을 끝까지 좇아가야 하는 것이 기자의 역할 아닐까 생각했어요."(박종화)갈릴레이 서클을 처음 떠올린 건 박종화씨와 장은선씨다. 같은 독서 모임의 구성원이었던 둘은 지난해 10월, 또 다른 친구 한명과 함께 '총선에 대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자'고 마음먹었다. 독서 모임에서 읽었던 경제학자 칼 폴라니의 책 <거대한 전환>에서 영감을 얻었다. '갈릴레이 서클'이란 팀명도 칼 폴라니가 대학 시절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기 위해 만든 모임의 이름에서 따왔다.
"'청년들 투표율 낮고 관심 없다'고 말하는데 '과연 진짜 그런 걸까'하는 의문도 있었고, 그게 사실이라면 정치를 쉽게 알려줄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정치는 생활과 떼어놓을 수 없잖아요." (장은선)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지난 1월 1일부터. 초기에 함께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친구가 빠지고, 종화씨와 은선씨만 남았다. 언론인 지망생 카페에 글을 올려 모비딕 프로젝트를 함께할 사람을 구했다. 6명이 모였다. 모두 기자, 아나운서, PD를 꿈꾸는 언론인 지망생.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자'는 마음은 같았다.
"학교에서 기사작성 수업을 맡았던 현직 기자 분이 항상 하신 말씀이, '너희는 언론인이 되려고 하면서 앉아서 하는 공부만 하려고 한다'는 거였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그저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취재를 하고 무언가 알리고 싶으면 지금도 할 수 있는데, 그동안 왜 그걸 안 했을까'라는 생각하게 됐습니다." (김수빈)"스물여덟이라는 제 나이에는, 앉아서 일년에 몇 번 있는 언론사 입사 시험을 준비하는 것보다 나서서 무언가를 해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조금 어려울 뿐이지,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이 있잖아요." (장은선)
기성 언론이 정치를 다루는 방식에서 느낀 아쉬움도 있었다. 이종희씨는 "기성 언론이 선거나 정치를 바라보는 입장은 스포츠와 비슷하다"고 평했다. 그는 "필리버스터를 봐도, '누가 (시간) 기록을 깼다'는 내용의 기사는 많은데 필리버스터에서 어떤 이야기를, 왜 하는지 말하는 언론은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정치는 사실 상대방과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설득시키는 과정이고, 설득에는 일정한 논리와 명확성이 필요해요. 그런 걸 언론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보다는 자극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는 것 같아 아쉬웠어요.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의미가 커요." (이종희)모비딕 프로젝트는 '구석 정치'에 집중했다. 기성언론이 비추지 못한 곳을 조명했다. 지지율은 낮지만 주목할 만한 군소 정당의 후보들을 찾았다. 그들의 정치 이력보다,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물었다. 국회의원 예비후보자 1,426명을 전수 분석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후보자를 소개하고, 청년이 사라진 선거판의 모습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군소 정당 인터뷰는 정치 버전의 '못친소' 같은 거예요. 총선이 진행될수록 거대 정당에 주목하지, 소수 정당을 메인으로 다루는 언론사는 없어요. 모두 '잘생긴' 사람을, 혹은 잘생긴 사람들 중에서도 못생긴 사람을 비춥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모르지만 나름의 의제를 가지고 있는 '못생긴 사람'들도 있잖아요." (정재우)
"시민 단체에서 일할 때 '좋은 사람은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판단하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지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온전하게 보여주는 것은 저희의 몫이라 생각했습니다." (조유라)형식에도 변화를 꾀했다. '총선'은 무겁게 들릴 수밖에 없는 주제. 독자들이 어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인포그래픽, 영상, 카드뉴스, 짤방(유머 이미지) 등을 적극 활용했다. 군소 정당 후보 인터뷰 기획(프로듀스 300)같은 경우,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에서 컨셉을 빌려왔다.
"기성언론이 맡고 있는 영역이 있다면, 저희가 잘할 수 있는 또 다른 영역이 있다고 생각해요."(박종화)
좋은 선택을 돕는 것은 언론의 몫갈릴레이 서클은 지난 2월 15일부터 모비딕 프로젝트 콘텐츠를 발행했다. 프로젝트는 4월 13일, 총선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이제 갈릴레이 서클 팀은 후반부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 박종화씨는 "그간 소수 정당과 정치인에 관심을 뒀다면 앞으로 시작할 기획에선 유권자와 선거 정치에 집중할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갈릴레이 서클이 20·30대가 모여 만들어진 팀인 만큼, 청년 유권자의 목소리를 담는 기사도 준비 중이다.
"청년 세대가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투표를 안 한다고 원망과 지탄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왜 이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지, 투표를 해도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과정 없이 청년을 그저 비난의 대상으로 삼고, '그러니까 청년 정책이 없는 거야'라는 소리를 하는 건 하나의 프레임이라고 생각해요." (김수빈)"20대의 투표율이 낮다는 문제보다 중요한 건 정치에 대한 무관심인 거 같아요. 정치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투표를 하지 않는 20대도 있겠지만, 마찬가지로 정치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늘 찍던 1번에 투표하는 60대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청년들을 설득하고 있지만, 60대를 설득하는 건 또 다른 누군가의 역할 아닐까요." (장재우)실제 이들이 취재하며 마주한 청년들은 무력하지 않았다. 갈릴레이 서클 팀은 지난 25일 테러방지법 통과 저지를 위한 국회 필리버스터 현장을 찾았다. 이때만 해도 국회 방청 방법이 많이 알려지지 않아 방청객 수가 많지 않았지만, 이들의 상당수가 청년이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던 종화씨는 "청년이 정치에 관심 없다는 건 편견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후반부는 청년 유권자의 목소리에 집중 갈릴레이 서클은 최근 5명의 인원을 충원했다. 모비딕 프로젝트의 후반부 기획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그간 적은 인원으로 일주일에 다섯 번씩 회의를 해가며 콘텐츠를 제작했다. 불평이 있을 법도 한데, 이들은 힘든 경험을 털어놓으면서도 웃었다. 수빈씨는 "필리버스터 취재를 하기 위해 하루에 국회를 몇 번 씩 드나들었는데, 그날 밤 국회를 걸어 나오면서 '이게 꿈인가'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즐겁게 호흡을 맞춰가며 노를 젓는 배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저희도 그냥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으로 모비딕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뜻만 통하면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건 생각보다 금방이에요. 각자가 있는 분야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 시도를 하면 재밌는 시기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박종화)"정치는 뭐든 제일 중요한 게 뭐라도 해보는 거 같아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라도 되겠죠. 저희 프로젝트도 그렇겠죠."(이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