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바티칸광장을 나오며 바티칸박물관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만난 르네상스 예술품들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르네상스 천재들의 삶과 깨달음은 많은 시사점을 주었습니다. 인본주의 사상에 바탕을 둔 탁월한 창조성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르네상스의 교훈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멈췄습니다. 대신 을씨년스런 로마의 겨울날씨가 몸을 움츠러들게 합니다. 네 시간 남짓 바티칸에서 보낸 시간에 시장기가 동합니다. 점심으로 곁들인 포도주 한 잔이 몸을 후끈하게 달굽니다.
식사가 끝나자 여행가이드가 로마 행선지를 설명하며, 다음 일정에 기대를 부풀게 합니다.
"이번엔 영화 속의 무대가 된 곳을 찾아갈 겁니다. <로마의 휴일>에 등장한 '진실의 입', 또 너무도 유명한 영화 <벤허>의 대전차경기장의 무대가 되었던 곳을 만날 거예요. 예전 추억 속의 영화를 떠올려보며 로마의 멋을 즐겨봅시다."붐비는 입구와 달리 한가하고 적막함이 느껴지는 성당 안 우리는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로마가 품은 역사가 얼마나 찬란하고 광활하면 이런 말이 있을까요? 로마 시내에는 고대 로마제국의 위용을 느낄 수 있는 유적지가 즐비합니다. 또한 역동감이 있는 조각품들이 거리를 수놓아 로마가 얼마나 많은 역사와 숱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진실의 입'은 어떤 이야기가 숨겨있을까? 소히 말하는 '진실의 입'은 로마 중심부에 위치한 코스메딘 산타마리아 델라 성당 입구에 있는 조각상을 두고 하는 말합니다.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진실의 입' 조각상은 고대 로마시대의 하수도 뚜껑이었다고 합니다. 지름 1.5m의 사람 얼굴 가면처럼 생긴 조각상이 기기묘묘합니다.
사람들은 진실의 입을 보고 강(江)의 신 홀르비오의 얼굴을 조각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조각상이 진실과 거짓을 심판하는 '진실의 입'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매우 오래된 일이라 합니다. 진실의 입은 중세 때부터 죄인을 심문할 때 조각상 입 안에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손이 잘릴 것을 서약하게 한 연유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이 조각상이 더 유명해진 일은 따로 있습니다.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열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이 조각상이 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휴일>에서 두 배우는 '진실의 입'의 조각상 입에 손을 넣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연출하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 이미 수십 명의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사진 찍기를 기다립니다. 아내와 나도 긴 줄 꽁무니에 섰습니다.
"우리도 연출해서 찍어볼까? 영화 속의 배우처럼!" "배우는 아무나 하는 줄 아나 봐!""그래도 인증샷은 남겨야지!"나는 카메라를 일행에게 부탁합니다. 아내와 나는 영화 속의 배우처럼 흉내를 내봅니다. 놀란 표정의 연출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인 줄 뻔히 알면서도 재미있어 하며 갖은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찍습니다. 흡사 영화배우라도 되는 듯이 말입니다.
오래된 성당의 모습은 아담하고 소박합니다. 특히, 로마네스크양식의 종탑이 멋들어 보입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여느 두오모와는 달리 작지만 정갈해 보이는 성당이 더 정감이 갑니다.
한가하고 적막함이 느껴지는 성당 안은 붐비는 입구와는 다릅니다. 사실, <로마의 휴일>의 '진실의 입'보다 이 성당에는 더 유명한 일화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로 이곳 성당에서 밸런타인데이가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밸런타인데이는 2월 14일인데, 이날은 그리스도교 성인 발렌티누스를 기리는 축일입니다. 발렌티누스의 유해가 이곳 성당에 모셔져있습니다. 3세기경 로마 황제 클라우디스 2세는 군대의 기강이 문란해질 것을 우려하여 병사들의 결혼을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이에 발렌티누스 사제는 이를 어기고 혼배성사를 집전하였다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사제의 순교한 날을 기념하여 축일로 지정한 것이 밸런타인데이의 유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밸런타인데이는 연인끼리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는 풍습이 있습니다. 특히 여성이 남성에게 프러포즈를 해도 부끄럽지 않다는 관습이 전해집니다. 또, 초콜릿을 주고받는 풍습은 19세기 영국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는 제과회사의 상업적 마케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지켜주기 위해 목숨을 바친 발렌티누스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아름다운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대전차 경기장의 숨결로마의 골목은 좁습니다. 우리 일행은 기동력이 좋고, 좁은 길로 다니기 편한 차로 바꿔 탔습니다. 이른바 벤츠투어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영화 <벤허>의 무대가 된 대전차경기장입니다.
아벤티노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에 대전차경기장(Circus Maximus)이 있습니다. 지면보다 10m 낮은 곳에 넓은 공간의 경기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곳에서 영화 <벤허>의 대전차 경주 장면이 연출되었다 합니다. 15분여의 긴장과 박진감으로 펼쳐진 스펙터클한 장면은 영화사의 명장면으로 남아있습니다.
영화 속의 장면을 연상한 나는 다소 실망스럽습니다. 한쪽에 발굴 작업의 현장이 없다면 왠지 우리나라 한강 시민공원과 같은 분위기입니다. 잘 정비되지 않은 공터가 쓸쓸해 보입니다. 산책하는 사람들 몇 명이 광장을 걷습니다. 궂은 날씨에다 평일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합니다.
경기장 주변 오래된 고대 건축물은 훼손이 심합니다. 과거 찬란했던 시대의 영화만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있습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은 훼손된 옛 건축물을 보면서도 실감합니다.
하지만, 길이 약 610m, 너비 약 200m의 직사각형을 이룬 경기장은 2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사륜마차경기, 경마, 야수와의 싸움, 그리고 각종 운동경기가 열렸다고 합니다.
경기장을 천천히 걸어봅니다. 이곳에서는 여유를 갖고 걸어도 될 것 같습니다. 한참을 걸으니 영화 <벤허> 속의 관중들의 환호성이 들려오며, 가슴이 조금씩 뛰기 시작합니다.
영화 속의 주인공 같은 아름다운 연인을 만나다영화 속의 환호성을 떠올리며 대전차경기장을 걷는데 젊은 연인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여보, 저 연인들 좀 봐요!" "무엇인데 그래?""무척 다정해 보여! 영화 속의 주인공 같아서요!""그러네. 참 행복한 모습이네.""연출하지 않은 사실적인 모습이 저런 모습인가? 아, 참 예쁘다!"쌀쌀한 겨울날씨에 여성이 남성의 목에 정성스레 목도리를 매어줍니다. 두 연인의 따뜻한 마음이 보기 좋습니다. 정말 행복해보입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카메라를 꺼내 들었습니다. 사진 속 연인들의 모습은 연출하지 않은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고매한 사람들의 진실한 사랑을 엿봅니다.
늘 무언가를 위해 쉼 없이 달려온 지난날들. 우리도 아름다운 젊은 시절이 있었을까?
다음 행선지로 떠나며 나는 아내에게 묻습니다.
"당신도 저 여성처럼 날 챙겨줄 거야?""......""왜 대답을 안 해?"빤히 쳐다보는 나를 보고 아내가 한참 이따가 대답합니다.
"꼭 말로 해야 알겠어요!""......"말보다 마음으로 느끼는 진실이 훨씬 소중함을 우리는 묵언으로 주고받습니다. '진실의 입'에 손을 넣어도 하나도 부끄럼이 없음을 생각하면서….
덧붙이는 글 | 지난 12월 29일부터 1월 6일까지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