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의령군 지정면 기강로 383에 가면 '의령 쌍절각(雙節閣)'을 볼 수 있다. 이름에 '쌍'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비각은 두 분을 기려 세워졌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현지 안내판은 '이 건물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절한 손인갑(孫仁甲, 1544~1592)과 그의 아들 손약해(孫若海, 1565~1592) 부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정려'라고 해설한다.
손인갑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의병장이 된 후 정인홍과 더불어 성주, 무계, 현풍, 초계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는 '그 전과를 인정받아 (송상현이 전사하는 바람에 공석이 되어 있던) 동래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초계 마진 전투에서 왜군을 쫓다 전사하였다.' 그러자 아들 손약해 또한 '부친의 전사 소식을 듣고 나머지 병사를 수습하여 적진으로 뛰어들었으나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합천임란창의기념사업회가 펴낸 <합천임란사>에 따르면 손인갑, 그의 아들 손약해, 그리고 교수 노개방(盧盖邦) 등이 전사한 날은 6월 22일이다.
그날 새벽에 적선 11척이 강을 타고 내려왔다. 중위장 손인갑은 의병대장 정인홍에게 출전을 보고한 뒤 군사들을 이끌고 강변으로 달려갔다. 손인갑은 적들을 섬멸하던 중 말이 모래펄에 빠지는 바람에 불의의 익사를 당하고 말았다(손인갑의 자세한 활약상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의병의 첫 승전지, 어디인지 아십니까' 기사 참조).
아버지에 이어 아들도 전사하다안내판은 쌍절각이 '광해군 원년(1609) 후손들의 거주지였던 봉수면 신현리에 세워졌으나 1943년 5월 임진왜란 전적지인 이곳으로 옮겨왔다'면서 '자연석의 주초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와가'라고 말한다.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건물에 관한 부분이므로 이는 현지에서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현장을 찾아 떠난 역사 답사의 의의가 두 배로 늘어난다.
본문의 '주초'는 '주추'를 잘못된 표현이다. 주춧돌 등 기둥을 받치기 위해 그 아래에 놓는 것을 주추라 하는데, 본래는 한자어 주초(柱礎)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주추"로 발음이 굳었다. 양성 모음이 음성 모음으로 바뀌어 굳어진 말은 음성 모음으로 적어야 표준어규정에 맞다.
민흘림기둥은 굵은 밑동이 위로 올라가면서 직선으로 가늘게 만들어진 기둥을 말한다. 민흘림기둥과 달리, 건물의 조화와 안정을 위해 기둥 중간 배 부분을 약간 부르게 만든 건축 양식을 배흘림기둥이라 한다. 그러므로 흘림은 기둥의 굵기를 밑동에서 꼭대기까지 조금씩 달라지게 하는 일을 가리킨다.
맞배지붕은 박공지붕의 다른 이름이다. 이 지붕은 건물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이뤄진다. 추녀는 처마의 네 귀에 있으면서 끝이 번쩍 들린 네모난 큰 서까래를 가리키는데, 그 부분의 처마 자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용마루는 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 치 기사는 손인갑의 죽음을 전한다. 이 기사는 '의병장 손인갑이 적을 초계에서 패배시키다'라는 멋진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내용은 오히려 그 반대의 슬픔을 안겨준다. 그 중에서도 '의병장 손인갑이 적을 초계(草溪, 지금은 합천군 초계면이지만 당시는 초계현이었음)에서 패배시켰는데, 인갑은 물에 빠져 죽었다'라는 첫 문장이 특히 그렇다.
실록은 그의 죽음을 전한 후 '이에 앞서 인갑이 초계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적이 상류에서 재물을 노략질한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강으로 내려가 요격하여 패배시키고 배 십여 척을 빼앗았는데, 타고 있던 적의 무리가 많이 죽었다. 그런데 적선 한 척이 빠져나가 도망치므로 인갑이 강으로 달려들어가 추격하다가 말이 모래 구덩이에 빠져 사람과 말이 함께 빠져 죽었으므로 군사들이 모두 통곡하면서 흩어지고(軍兵皆哭而散) 원근에서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遠近痛惜)'라고 증언한다.
쌍절각의 현재 위치는 상식적으로 볼 때 조금 특이하다.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의 현지 안내판을 세심하게 읽는 습관을 가진 답사자는 '광해군 원년(1609) 후손들의 거주지였던 봉수면 신현리에 (본래) 세워졌으나 1943년 5월 임진왜란 전적지인 이곳으로 옮겨왔다'라는 문장에서 이미 그런 느낌을 받았을 터이다. 정려는 생가(터), 거주지, 현장 등지에 세워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곳 안내판은 '임진왜란 전적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쌍절각이 자리잡고 있는 이곳은 손인갑이 적을 무찌르다가 순국한 초계 전투지가 아니다. 이곳은 곽재우 의병장의 기강 승전지다. 그래서 임진왜란 전적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별로 연관이 없는 곳에 왜 비와 비각를 옮겨 세웠을까 의아하기도 하지만, 기강 승전지 일원에 대규모 '의병의 숲'이 조성 중인 점을 견줘보면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라 할 수도 있겠다. 두 의병장의 비석이 나란히 한 곳에 세워져 있는 모습은 아주 보기드문 사례이므로!
쌍절각 바로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의령 보덕각'도 살펴본다.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을 기려 1739년(영조 15)에 세워진 이 비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66호로 지정돼 있다(두 비각 모두 문화재자료 66호라고 설명하는 블로그 등이 더러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문화재청 누리집은 보덕각만 지정 문화재로 올려두고 있다).
보덕각과 쌍절각 바로 뒤편의 얕은 동산으로 올라가면 산책로가 가꿔지고 시비가 세워지는 등 공원화 사업이 진행된 뚜렷한 흔적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잘 관리되고 있지는 못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