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단 외우는 까꿍이출근 전이었다. 한창 준비를 하고 있는데 까꿍이가 오더니 슬며시 말을 건넨다.
"아빠는 구구단 알아?""응? 구구단? 1학년이 벌써 구구단 외워? 아빠 때는 2학년 때 외웠던 것 같은데.""아니. 아직 안 배워. 그런데 공책이나 연필을 보면 구구단이 다 적혀 있어. 그래서 나도 한 번 외워 보려고. 어떻게 읽어?""아. 별로 안 어려워. 따라해 봐. 2x1=2, 2x2=4, 2x3=6, 2x4=8….""2x1=2, 2x2=4, 2x3=6, 2x4=8….""우와. 우리 딸 최고네. 그런데 너무 힘들게는 외우지 마. 2학년 때 외워도 늦지 않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부모로서 뿌듯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느새 1학년이 돼 혼자 구구단을 외우겠노라고 애쓰고 있는 모습이라니. 계속해서 저런 모습을 보여야 할 텐데.
그러나 이런 감정도 잠시, 혼자서 구구단을 읽고 있는 녀석을 보고 있으려니 약간의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바둑에서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이 시대에 구구단을 저리 공들여 외우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너희는 어떻게 살래? 세상은 좀 더 나아질까?"며칠 전, 세간의 관심이 쏠렸던 이세돌-알파고 간의 바둑 대결이 끝났다. 결과는 모두 알고 있듯이 1-4 이세돌의 패.
그래도 이세돌이 이길 것이라던 사람들은 경악했고, 당황스러워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할 수 있다는 오래된 가능성을 직접 지켜봤기 때문이며, 또한 그 결과가 이후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감히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알파고에 대해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만 10년 전의 나와는 다른 의미가 추가돼 있었다. 바로 내가 아이 셋의 부모라는 사실이 알파고에 대해서 조금 더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 것이다.
최근 강남 엄마들 사이에서 바둑학원 열풍이 불고, '알파고가 어디에 있는 고등학교냐?'는 우스갯소리 등이 돌아다니는데 그것들은 결국 인공지능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을 의미한다. 나의 아이들이 사는 시대에는 인공지능이 더 활성화될 텐데, 그것이 아이들의 삶에 어떤 삶을 미치게 될 것인지 모든 부모는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너희들은 이제 어떻게 살래? 너희 사는 세상은 좀 더 나아질까?"어머니는 가끔 자라나는 나를 붙들고 위와 같은 이야기를 하셨는데, 내가 나의 아이를 붙잡고 똑같은 말을 하게 될 줄이야. 과연 나의 아이들은 새로운 시대에 어떻게 적응하고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나보다 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직업이 사라지는 시대사실 많은 부모들이 알파고로 대변되는 인공지능에 많은 관심을 갖는 데에는 일말의 불안감이 적잖이 작용한다. 인간의 기술은 지금까지 계속 발전해 왔고, 그만큼 우리의 삶도 조금씩 편해져왔지만,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출현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고 여겨왔던 지능이 기계에 추월당한 것이지 않은가.
이 불안감은 단순히 사람들이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린 SF영화를 많이 봤기 때문에 갖는 게 아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철석같이 믿어온,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월등히 뛰어난 이유는 지능 때문이다'라는 전제가 어그러진 데서 기인한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지능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할 수 없는 시대. 그 새로운 시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세대야 당장 무슨 일이 있겠냐만은, 내 자식 때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초월했을 텐데 어떻게 하지? 내 자식이 잘살 수 있을까?'알파고의 승리 이후 뉴스에서 쏟아졌던 미래 직업에 관한 리포트 등은 바로 이와 같은 불안함의 발현이다. 현재 사회에서 직업이라 함은 먹고사는 생존의 수단이요, 동시에 개인의 사회적 자본이기도 한데 이를 인공지능이 잠식한다고 하니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이보다 심각한 것이 있을까?
예컨대 JTBC <뉴스룸>에서 인용했던 2013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나온 보고서를 보자. 보고서는 인공지능의 발달로 앞으로 20년 안에 현재의 절반에 가까운 47%의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고, 그 중에는 회계사(94%), 프로그래머(48%), 경제학자(43%), 판사(40%) 등 현재 많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직업이 포함돼 있었다.
이는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으로서 매우 심각한 일일 수밖에 없다. 자식이 나보다 좀 더 나은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자식에게 많은 돈을 물려주지 않는 이상 위와 같은 직업들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데,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그 직업들을 대신한다고 하니 말이다.
요컨대 모든 부모들은 불안하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자식이 살아갈 사회를 예측하기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지금까지 사회에서 통용됐던 계층이동의 방식은 많은 변화를 겪을 것이다. 인공지능 개발 자체가 고도로 축척된 자본만이 할 수 있는 만큼 사회의 양극화도 심화될 것이지만, 그것 역시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우리 사회를 상상 그 이상으로 만들 것이다.
인공지능의 시대, 우리가 가르쳐야 할 것들그렇다면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아이들이 어떤 직업을 가져야 인공지능이 인간을 추월한 시대에 대접받고 살아갈 수 있을까? 강남의 부모들처럼 지금에라도 당장 아이들을 바둑학원에라도 보내야 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앞서 언급한 옥스퍼드 보고서에 나와 있는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가능성이 낮은 직업들이다. 보고서는 초등교사(0.4%), 사회복지사(0.3%), 레크레이션 치료사(0.2%) 등을 그 예로 들었는데, 이것들의 공통점은 모두 사람을 직접 대면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점이었다. 어떤 데이터를 분석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사람을 직접 만나 그의 말을 들어주고 공감할 수 있는 직업들.
어쩌면 이는 인간이 매우 똑똑한 인공지능과 공존해야 하는 시대에 우리가 선택하고 집중해야 하는 분야인지도 모른다. 비록 지금은 여타 직업군들보다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보수도 적게 측정되고 있지만, 결국 인간이 인공지능과 가장 다른 것은 지능이 아니라 인간다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에 아파하고, 타인의 슬픔에 같이 슬퍼할 줄 아는 공감능력. 맹자가 이야기했던 측은지심이야말로 미래 사회에 가장 필요한 능력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아이들을 다시금 바라보게 됐다. 지금 이 시대에 구구단을 외우는 게 과연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 아이가 저렇게 수학공부를 열심히 한 뒤 회계사가 됐다고 치자. 어차피 그 일자리는 인공지능에 의해 없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지 않은가.
따라서 지금 내가 아이에게 가장 절실히 가르쳐야 하는 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따라잡을 수 없는, 타인의 감정에 감응하고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지식이야 10대가 되고 20대가 되어도 익힐 수 있지만, 타인의 감정을 나의 것으로 체화시키는 능력은 10대 이전에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어린 시절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굳어지는 자신만의 고유한 기질이요, 인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에 대한 교육에 정답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것만은 견지하고자 한다. 나의 아이가 자신의 존엄성을 좀 더 확고하게 지킬 수 있고, 부디 타인의 감정을 헤아릴 줄 알기를. 그것이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