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마을에 사는 누구 엄마는 정장을 한 벌 구입했다고 한다. 아랫마을 사는 누구 엄마도 구두를 새로 샀다고 했다. 양복과 구두가 아직 쓸만한 나는 전날 밤, 얼굴에 마스크팩을 붙이고 잤다. 직장맘들에게 피와 살 같은 월차를 쓰게 만든다는 바로 그날, 학부모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새내기 학부모는 모든 게 낯설다. 특히나 '학부모 총회'라는 딱딱한 이름이 주는 무게감에 기가 눌리게 마련이다. 인터넷에서 뭔가 정보가 될 만한 게 없을까 검색해봤다. '학부모 총회 패션' '학부모 총회 선물' 등이 연관 검색어로 떠올랐다. '뭐야 이건' 하며 웃어넘기려다가, 한편으로 신경 쓰일 법도 하겠다 싶었다. 많은 학부모들 틈에서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초라하지도 않게'(이것이 학부모 총회 패션의 요점이었다) 보이려면 얼마나 고민이 되겠는가?
그래서 우리 집은 아빠가 가기로 했다. 육아와 교육이 엄마의 전유물이라는 구시대적 발상에서 과감히 탈피해 새 시대를 열어가겠다는 거창한 포부 따위는 없었다. 그냥 조금 더 한가한 사람이 간다는 게 우리집의 불문법이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옷 걱정을 덜어주기 위한 남편의 섬세한 배려쯤으로 정리 하고 넘어가자.
총회 시간에 맞춰 학교에 도착했다. 전교생 98명의 시골초등학교의 학부모 총회는 반상회나 마을 회의 같을 거라는 상상을 했다. 커다란 강당 가운데 50여 명의 학부모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부모가 바쁜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지긋한 연배의 어르신들도 한두 분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숙이고 나눠준 유인물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들은 백발백중 1학년 학부모였다.
이윽고 총회가 시작됐다. 감사패 증정, 교직원 소개, 교장선생님 말씀, 학부모 대표 선발, 그리고 학교폭력 등에 관한 학부모 연수를 끝으로 총회는 끝났다. 정말 이게 다였다. 어느 엄마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가봤자 별거 없는데, 안 가면 찝찝해서' 매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열띤 토론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이건 너무 허무했다. 총회 때문에 새 옷을 사 입고 온 부모들은 정말 돈 아깝겠다는 생각을 하며 담임선생님과의 대화를 위해 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드님이 학교에서 싸웠어요"... 청천벽력
1학년이어서인지 스물넷 아이들의 부모 중 대다수가 참석했다. 그리고 그중 아빠는 나 혼자였다. 몇몇 질문과 답변이 오갔고, 30여 분의 시간이 흐른 뒤 대화는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나오려는데, 담임선생님께서 부르신다. 큰 아이가 오늘 학교에서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얼굴을 주먹으로 맞았고 눈물을 보였다고 하신다. 알아듣게 타일렀으니 너무 걱정 마시라 말씀하셨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고 뇌압이 상승했다.
"남자 아이들끼리 학기 초에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쿨한 척 돌아 나왔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머릿속에는 '주먹, 얼굴, 눈물' 세 단어만 소용돌이쳤다. 다행히 때린 아이의 파워가 약했었는지, 조준이 잘못된 건지 큰 아이의 얼굴에 푸릇한 밤송이가 달려있지는 않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의 아이를 보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리고 그제야 학부모 연수 시간에 나온 학교폭력에 대한 내용이 생각났다. 학교폭력이나 왕따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아이와의 많은 대화가 최우선이라는 것, 아이의 태도와 행동변화를 예의주시하라는 것, 그리고 학교에서 문제가 생기면 일차적으로는 담임선생님의 손에 맡겨야지 아이 싸움이 부모 싸움 되는 게 비일비재하다는 것 등 반쯤 졸며 듣던 내용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남의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대책을 고민해본다. 내가 요즘 배우고 있는 복싱을 큰 아이에게 빨리 가르쳐야겠다는 인과응보형 결론부터, 때렸다는 아이를 만나 짜장면을 사주며 차근차근 이야기해볼까 하는 회유포섭형 결론을 거쳐, 주먹을 휘두른 아이의 가정환경과 성장배경에 대한 원인분석형 결론까지, 다양한 각도로 생각해봤지만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꿀빵'에 얽힌 내 유년시절 기억... 나팔소리가 시작됐다
물론, 우리 아이에게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다툼이라는 것이 말싸움에서 시작돼 실제 폭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쪽의 말만 듣고 섣불리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는 이성적 판단이 고개를 들었다. 감정도 조절할 겸 잠든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고등학교 시절 왕따의 가해자였던 나의 기억이 떠오른다.
학년 초 서로 친해지는 과정에서 친구들끼리 매점도 함께 가고 먹을 것도 사이좋게 나눠 먹게 된다. 그런데 대각선으로 앞자리에 앉은 그 녀석은 자기 돈을 내는 법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그럴 수 있다는 정도의 이해심은 가질 법한 나이였다. 우리 집 형편도 좋지 않았기에 연민의 정 혹은 동지의식을 느끼기도 했을 정도다.
하지만, 머지않아 녀석이 혼자서 몰래 매점에 가서 꿀빵을 사 먹는다는 제보가 속속 들어오면서 정체가 드러났다. 녀석은 심각한 구두쇠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는 돈을 쓰지 않는 아름답지 못한 개인주의자였다. 녀석은 그렇게 친구들에게서 멀어져가며 왕따의 길로 접어들었고, 나 역시 그 과정에서 한몫을 해냈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폭력을 휘두르거나 '빵셔틀' '가방셔틀' 같은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시라.
사실 나는 초·중·고를 지나오며 친구들과 주먹다짐 한 번 하지 않았던 모범생 라인이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희한하게 싸움 좀 한다는 아이들이 나와 친했었다. 학교 짱까지는 아니어도 반 서열 2~3위의 우직한 친구들이 늘 내 곁에서 함께하다 보니 누가 나를 건드리는 일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여하튼, 왕따의 개념조차 희박했던 그 시절, 요즘도 가끔 녀석이 생각나면 미안하고 죄스러운 기분이 든다.
아이의 다툼이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니 이제 겨우 서막을 알리는 나팔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발생할 것인가? 이번에는 크지 않은 다툼이었기에 담임선생님이 잘 정리하셨지만, 또 다른 사건 앞에서 나는 과연 어떻게 대처할지 의문이다. 현명한 학부모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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