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란 말, 틀렸다"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중학교 시절에는 책과 담을 쌓고 지냈으니, 내가 이 말을 배운 건 아마 고등학교 시절일 것이다. 나는 성인이 되고 사회에 눈을 뜨기 이전까지 오랫동안 이 말이 진리라고 믿어왔다. 대의 민주제 아래서 국민을 대표하는 일꾼을 뽑는 행위는 분명 희망찬 미래를 기대하며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때문에 선거는 국민들에게 하나의 축제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건 무지했던 나의 착각이었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말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말일 뿐, 현실에서의 선거는 대리자들을 선출하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 처음 참여했고, 조금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국회의원 선거는 2008년 있었던 제 18대 총선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총선의 최대 이슈 중 하나는 '친박연대'의 등장이었다. 특정인의 이름이 들어간 정당이 만들어진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당시 '친이계'의 주도로 '친박계' 인사들이 한나라당 공천에서 대거 탈락한 것은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 아니라, 일부 권력자나 권력을 쥔 계파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공천권, 보이지 않는 손, 특정 계파가 좌지우지그리고 2016년 우리 정치는 지난 8년간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지난 3월 초 국회에서 선거구 획정안이 통과된 뒤, 각 정당은 공천 작업에 열을 올렸다. 공천 작업은 각 정당이 국민의 지지를 받아 국회에 입성할 후보자들을 낙점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는 매우 의아한 장면들을 몇 차례나 보았다. 국민적 지지를 받던 인사가 공천에 탈락하거나,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공천관리위원장'이 선출된 권력인 '당 대표'의 위에 서서 공천을 좌지우지하는 모습,
민주주의 사회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며, 국민이 선출한 대표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비해 보다 큰 정당성을 가진다. 그럼에도 이 같은 모습이 연출된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리고 비극적인 사례가 몇몇 있다.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의 컷오프,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과 이해찬 의원의 컷오프다. 이들은 모두 지역구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는 자들이며, 전국적 지지도도 비교적 높은 사람들이다. 한데 양당의 공천관리위원회는 뚜렷한 이유 없이 이들을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유승민 의원은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배신의 정치'로 낙인이 찍혀, 정청래 의원은 최고위에서 했던 '공갈'이라는 말 한마디로 '막말꾼'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이해찬은 김종인 비대위 대표의 '정무적 판단'이라는 이름으로 각각 공천에서 탈락했다. 탈락 기준은 누구인지 모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정해졌다. 국민이 아니었다. 특정 정당의 공천을 받으면 사실상 대부분의 국회의원 당선이 결정되는 한국 사회에서 공천권 행사는 곧 국회의원 임명권을 행사하는 것에 다름이 없다. 이 때문에 이런 현상은 더욱 아쉽다. 국민 다수가 지지하고 싶은 후보자에게 표를 행사할 권리마저 박탈하는 정당이 존재하는 이 나라, 진정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총선 17일 남은 지금 정책이 보이지 않는다백번 양보해 공천권의 행사는 정당의 고유한 권한이며, 공천자 선정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유권자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고 치자. 유권자는 공천이 확정된 후보자만을 보고 투표에 임하는 것이 옳다고도 해보자. 그럼에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2016년 3월 27일부터 제 20대 총선일인 2016년 4월 13일까지는 '17일'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그런데 평소 신문을 자주 보는 나조차도 각 정당이 선거에 나서며 어떠한 공약을 제시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나마 '더불어민주당'이 경제민주화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는 정도다. 물론 각 정당의 공약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언론'의 탓이 크다. 그들은 각 정당의 정책 공약을 국민에게 소개하기보다 이슈가 될 만한 사건만을 그간 보도해왔다.
그렇다고 각 정당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새누리당'은 3월 21일, '국민의 당'은 3월 23일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정책 공약집을 발간했다. '더불어민주당'은 3월 26일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지역 공약집을 발간했고, 지난 12월부터 몇몇 공약을 따로 제시해왔다. 정의당은 3월 17일 정책 공약집을 발간했고, 지난 1월부터 몇몇 공약을 따로 제시해왔다. 선거를 한 달도 남기지 않고 공약집을 발간하는 태도가 바람직한 것일까. 더구나 각 정당의 공약집은 정당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찾아보지 않는 이상 보기조차 힘들다.
선진국에선 각 정당이 선거 4개월 전에 후보를 지정하고 공약을 제시해 국민들이 누구에게 투표할지를 고심토록 한다. 그 전에 치열한 경선과정을 겪기도 한다. (주마다 차이는 있다.) 그런데 고작 선거 1개월 전에 공천자를 자신들만의 기준에 따라 선정하고, 정당의 정책 공약집을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곳'에 비치하는 우리 정치권, 대체 국민더러 무엇을 보고 선거에 임하라는 것일까. 국민들 다수가 지역주의에 따라 특정 정당을 지지할 것이며, 어차피 지키지도 않을 공약이니 참고할 필요도 없다는 심산일까.
난 지금 '정치혐오증'을 앓고 있다'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라는 말은 어쩌면 책 속에만 존재하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현실은 그와 정반대이거나 그 이하다. 그간 몇 번의 선거를 거치며 든 생각은 하나다. 어쩌면 선거라는 것은 민주주의의 꽃이 아닌 민주주의를 가장하기 위한 하나의 '요식행위'일 뿐이라는 것, 제 20대 총선을 17일 앞두고, 지금의 난 무엇을 보고 이번 선거에 임해야 할지를 도통 모르겠다. 각 정당의 공천과정이 민주적이라 생각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부여한 것은 정치권에 속한 바로 그들이라 생각한다. 난 지금 '정치혐오증'을 앓고 있다.